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의란 무엇인가] 피리 부는 공공철학 전도사

 


 

 

연말 한 신간 아닌 신간의 출간을 놓고 온 출판계가 떠들썩하였다. 아니, 갑작스러운 행보를 몇 건이나 해낸 한 출판사가 벌인 일 중 하나라고 하는 게 더 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두고 갑론을박이 팽팽하였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의 결정이었는데 책 제목 때문에 더 저자는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향해 열심히 자기변호 해야하였다. 문제의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지난 20여 년간 14000명 이상의 하버드대 학생들이 수강한 명강의 정의Justice’2009년 녹화영상과 책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하버드대는 PBS와 공동 기획해 12강 분량의 강의를 녹화해 아카데믹 어스 사이트와 유투브 하버드채널에서 전부 무료 공개하였다. FSG에서 출간해 유료로 판매한 책 역시 곧 전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고 37개국에 수출되었다.

 

 

발 빠르게 마이클 샌델과 교섭한 김영사는 20092만 달러에 판권을 사 2010년 말 번역본을 냈고 그 해 판매 1, 다음 해 판매 2위라는 기록적인 매출을 올렸다. 또 일본에서 12강 강의를 정리한 책도 번역하며 마이클 샌델과 정의 신드롬에 더욱 불을 붙였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우리나라의 판매고는 123만부 이상, 지급 인세만 147600만원에 달하며 현지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에 저자를 비롯한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심지어 모 외제차 한국지사는 마이클 샌델의 방한 때마다 차량협찬을 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방한했던 어떤 해외 석학도 받지 못한 대우였다. 문제는 판권 계약 기간이 불과 5년이었다는 것이다. 재계약 판권비가 무려 10배 이상 올랐는데 개정판도 아닌 일반 재계약본이 출판사가 바뀌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출간 초엔 재계약에 실패한 김영사로 언론의 편이 실렸다. 200만부 돌파라 거짓 표기, 번역 표절 의혹, 번역이 어렵다는 등의 수용할 수 없는 지적, 상도덕에 어긋난 판권 뺏기 등이 비난의 주 골자였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이 직접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고 김영사 역시 다른 출판사의 시리즈 신작 판권을 채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면이 전환되었고, 판단의 몫은 독자에게 일임되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두 출판사가 제시한 판권비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김영사와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무단으로 <어린이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출간한 것에 크게 실망을 해서란다. 그리고 보란 듯이 11월 말 이번 <정의란 무엇인가>를 낸 미래엔(구 대한교과서)에서 <10대들을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냈다.(와이즈베리는 미래엔의 인문경제경영도서 브랜드, 아이세움은 미래엔의 아동도서 브랜드이다.) 실제로 <어린이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마이클 샌델이 아닌 국내 작가의 이름으로 출시되었고,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폭발적 인기 속에서도 김영사나 미래엔 같은 거대 출판사 뿐 아니라 영세한 신생출판사를 비롯한 다양한 출판사와 다른 저서의 판권 계약을 했었다.

   

뒤늦게 <정의란 무엇인가>의 독자로 합류하여 와이즈베리의 새 번역본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점을 의식하며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서평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완독한 독자의 입장에서 필자는 와이즈베리 쪽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일단 표지가 원서와 더 가깝다. 이전 번역이 어렵고 이번 번역이 쉬워 완독률을 높일 것이라는 와이즈베리의 주장은 마케팅적 과장인 감이 크지만, 굉장히 많은 부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라져서 번역의 정확도가 더욱 높아졌다. 제목부터 김영사 아이디어의 표절이란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원제의 제목은 ‘Justice정의지만 곧바로 제목 옆에 ‘What's the Right Thing to Do?’란 부제가 붙여 있다. 따라서 김영사 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라기보다 어떤 출판사라도 원서의 제목과 부제를 고려했을 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본문 번역 표절에 있어서는 표절까지도 아니더라도 기존 번역본을 상당히 참조해서 표현을 바꾼 감은 있다. 실제로도 와이즈베리는 일찌감치 이창신 번역자에게 번역의 재사용에 대해 문의를 했었고, 새 번에 대해 이창신 번역자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다만 책의 표지에도 새기고 주 마케팅 문구기도 한 한국 200만부 돌파는 확실한 잘못이긴 하다. 김영사 덕분에 판매부수를 한 자리대까지 다 알게 되었지만, 판매부수는 비공개라 200쇄 이상 나온 것을 보고 200만부로 추정했다는 와이즈베리의 입장도 사실이라면 경솔한 시도긴 하나 수긍의 여지도 조금 있다. 아무튼 수많은 식당들이 곧 맛집이라는 간판을 내거는 것처럼 새 <정의란 무엇인가> 역시 200만부를 목표로 열심히 달려야 할진데 상당한 인고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스테디셀러화되는 대부분의 베스트셀러가 그렇지만 <정의란 무엇인가> 역시 100만부 판매는 11개월 안에 끝난 것, 그 후 판매가 얼마나 더디게 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타 출판사가 이룬 과거의 영광을 홀랑 가져가긴 하였지만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가는 셈. 한편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 내내 우리나라 국민은 평균 독서량이 별로 많지 않은데도 이렇게 교양 수준이 높은 걸까 싶었다. 판매량에 비해 완독률이 형편없는 책이라는 와이즈베리의 주장이 맞는 걸까.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것들을 묻고 싶다.

 

 

대충이라도 서양 철학사의 주요 흐름과 학자, 개념을 알고 있는가

정의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많은가

사유를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변화시킬 의지가 강한가



마이클 샌델은 정의론 분야의 세계적 학자이자, 공동체주의 4대 이론가이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상아탑 밖으로 나와 철학에 대한 대중 참여를 적극 유도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자처하였다. 그의 궁극적인 사상은 아직 이름이 없다. 이 책을 감수한 김선욱 교수는 자유적 공동체주의라고, 이 책의 해설을 단 서평가 로쟈는 공공철학이라고 편의상 명명한다. 요는 기존의 정의론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의론의 모색, 기존의 어떤 철학자보다 정의에 있어 대중의 기여를 기대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정체성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점이 처음부터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아니라 하버드대에서 하버드대 학생을 위해 이루어진 강의였다는 것이다. 지식수준이 상당하고 졸업 후 사회를 이끌어 갈 엘리트들을 놓고 논하는 정의론과 철저한 정책 수용자인 대중을 위한 정의론은 소재는 비슷할지언정 강의 수준과 방향이 전혀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하버드 강의내용을 일반교양서로 풀긴 하였지만 완전한 대중 맞춤이라기보다는 우리(하버드)가 평소 공부하는 바를 여러분에게 보여주겠으니 알아들을 수 있으면 이해해봐라에 더 가까운 책이다. 그래서 어려운 게 당연하고 어느 수준 이상 인기 있는 것은 의아하다.


 

상이군인 훈장 논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담긴 도덕 논리를 보여 준다. 군인 훈장의 경우, 어떤 미덕을 가려야 하는가를 묻지 않고는 수여 대상자를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격과 희생이라는 경쟁적인 개념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어쩌면 군인 훈장 논란은 명예와 미덕이라는 고대의 윤리관을 되짚어 보아야 하는 특수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정의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란은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그리고 시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에서는 복지와 자유를 앞세우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경제적 배분의 옳고 그름에 관한 주장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도덕적 자격을 갖추었는지 따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으로 흔히 다시 돌아가게 된다. -p.31

     

누구나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를 깨닫고 이러한 사실을 도덕적·정치적 삶의 근간으로 삼는다. 공리의 극대화 원칙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입법적 차원에서도 적용된다. 어떤 법이나 정책을 집행할 것인지 결정할 때 정부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집단이다. 그러므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하고 모든 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게 되는가?” -p.63

 

자유지상주의자들 생각에는 안락사를 금지한 법이 부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내 생명이 내 것이라면, 내게는 그것을 포기할 자유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내 죽음을 돕도록 내가 허락한다면, 국가는 이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p.117

 

정의에 관해 뜨겁게 논쟁할 때면 시장의 역할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자유시장은 공정할까? 돈으로 살 수 없는, 혹은 사면 안 되는 재화도 있을까? 있다면 어떤 재화이며 그것을 사고파는 것은 왜 문제가 될까? 자유 시장에 우호적인 시각은 보통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한다. 하나는 자유를 중시하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복지를 중시하는 주장이다. -p.123

 

롤스는 사실들을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각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사회적 여건을 (우리를 위해) 이용하자고 제한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 철학이 지금까지 내놓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이 분명하다. - p.248

 

학생의 학업 성취 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해 표준화된 시험을 이용하려면 학생의 가정, 사회, 문화, 교육 배경을 고려해 점수를 해석해야 한다. SAT에서 똑같이 700점을 받았더라도, 사우스브롱크스에 있는 열악한 공립 학교를 다닌 학생이 맨해튼의 부유한 지역인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일류 사립 학교를 졸업한 학생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 p.254

      

 

와이즈베리의 새 번역본이 대중들의 관심을 끈 이유 중 하나는 기존 번역본에서도 감수를 맡았던 김선욱 교수의 해제 외에 특별 부록으로 로쟈와 정수환(대입 논술 강사)의 해설까지 덧붙인 것이다. 정수환이 제시한 이 책을 읽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은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 정도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 것. <정의한 무엇인가>는 전형적인 철학서이다. 큰 질문을 던진 후 여러 가지 예시를 준 다음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사유가 오가도록 둔다. 행복하게 뒷짐 지고 있던 철학자는 적절할 때마다 등장해 논의를 갈무리한 후 자신의 주장을 말한다. 그래서 앞서 말한 수준의 지식은커녕 이 책이 철학서인 것도 모르고 집은 독자라 하더라도 아주 암담한 것은 아니다. 사례는 입시 정책과, 훈장, 안락사와 대리모 등 아주 친근한 시사 문제이고, 철학사적 순서와 상관없이 철학자들을 등판시키긴 하나 그들의 사상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은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아무리 읽어도 결국 저자의 정의론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독자가 있다면, 본문 마지막 장의 이 대목을 언급하고 싶다.

   

 

도덕적 이견에 좀 더 적극적으로 공적 참여를 한다면 상호 존중의 기반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 동료 시민이 공적 생활에서 드러내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배우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숙고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종교적 견해의 진가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어떤 도덕적·종교적 교리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것을 덜 좋아하게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해보기 전에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도덕적인 참여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에게 더 많은 이상을 불어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유망한 기반을 제공한다. -p.390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총 10장에 걸쳐 근 400쪽이나 되는 긴 서술을 하며 저자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것이다. 특히 마이클 샌델이 철학자로 연구에 매진하면서 넘고 싶었던 것은 롤스의 정의론이었다. 그래서 벤담과 칸트, 로크에 거쳐 서양 철학의 본격적 기원인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이디어를 찾는다. 로쟈의 지적처럼 마이클 샌델이 가장 긍정하는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볼 수 있지만,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클 샌델은 결국 정의와 공동선을 뗄 수 없으며 철학의 정치성을 높이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높인 도덕적인 참여 정치가 사회를 좀 더 이상적이고 정의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책의 결론부만 읽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답의 학문이 아니라 과정의 학문이며, 그래서 어떤 책보다 논리의 전 과정을 톺으면서 치열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철학서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마이클 샌델 정의론의 결론이라기보다는 중간 점검이자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폭제이다. 그의 바람대로 이 책으로 수많은 반박서와 지지서가 촉발되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더 깊게 이해하고 싶다면 미주에 언급된 문헌들을 검토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막상 특별부록과 해제는 아주 큰 도움은 되지 않는 편, 고생스럽더라도 정복하는 맛으로 한 장 두 장 곱씹으며 직접 저자의 정의론을 이해하도록 애쓰는 것을 더 추천한다.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읽는 즐거움은 몇 배 더할 것이다. 새 번역본은 원래의 원서 서문이 빠지고 한국판 특별 서문으로 대체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기존 번역본의 업그레이드이다. 점점 심해지는 번역서 판권비(선인세) 전쟁이 빚은 촌극이 책 자체보다 더 주목받고 있는 게 아쉽다. 요약하면 와이즈베리의 번역서가 약간의 도덕적 쟁점이 있긴 하나 독자들의 입장에선 기존 번역본보다 훨씬 만족스러울 것이다. 비상식과 비정의가 횡횡한 사회에서 스스로도 정의스럽지 못한 일상을 사는 요즘, 책으로 정의를 찾았던 이번 독서가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샌델의 의사는 존중해야 하나, 정의를 논하는 책의 저자의 정의에 대해 여전히 석연치 않다. 그 어느 때 읽은 독자보다 더 정의를 고민하며 읽게 되었으니 행운인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천국 주식회사] 대책 없는 하느님과 의외의 최종병기

 

 

 

미친 듯이 일하고 미친 듯이 노는 12, 그래서 더 속이 헛헛하고 욕구불만을 풀 도피처가 절실한 것 같다. 어서 읽어 달라 아우성대는 책 사이에서 방금 배송 받, 출간된 지 일주일도 안 된 <천국 주식회사>부터 읽은 것도 잠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미국 소설인데 올해 출간되었던 책도, 12월에 출간된 책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말 번역본이 올 연말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은근히 연말에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책의 작가 사이먼 리치는 국내 독자들에게 아직 생소한 편이다. 2011년 살림에서 번역본을 내놓으며 처음 그를 소개하긴 하였지만 아직 수상 타이틀은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썼지만 장르가 제각각, 굳이 공통분모를 찾자면 유머가 주특기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최연소 SNL 작가로 방송과 영화계에서 열심히 경력을 쌓으면서 꾸준히 소설도 내고 있어 주목할 만한 젊은 영미권 작가이긴 하다.

 

 

하느님은 기적 코딩을 직접 하지 않으세요. 그 작업은 철저하게 기술적이거든요. 그분은 오히려 아이디어맨에 더 가깝죠. 아시잖아요? 처음부터 그분은 구체적인 실무를 대신 해결해 줄 사람들을 고용했어요. 그분께서 회사 일상 업무에 참여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네요. -p.27

 

어느 계약직 천사도 기도 수취부에서 기적부로 껑충 건너 올라간 적이 없었다. -p.34

 

크레이그는 천사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천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수습이나 비서로 일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퇴직할 때까지 대충대충 복무 기간을 채웠다. 하느님은 40년의 복무 기간을 요구하셨으나 어떤 직종을 선택하든 상관하지 않으셨다. 천국 주식회사의 근로자들이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개 하루 5시간도 안 됐다. 테니스 코트, 보치 공놀이 경기장, 잉어 연못 등 캠퍼스에는 없는 게 없었다. 실내에 처박혀만 있는 건 미친 짓이었다. -p.46

 

인간들은 자신들이 이성적 존재로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신념 체계를 따라 산다고 믿고 있었다. 아침에 뭘 먹었는지, 잠을 잘 잤는지 못 잤는지, 그리고 최후의 만족스러운 오르가슴이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가 그것이었다. - p.242

 

 

그 흔한 역자후기나 주석 하나 없이 깔끔하게 본문만 있어 일단 읽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천국 주식회사>의 원제는 ‘What in God's Name’,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면 도대체정도의 감탄구인데, 원제가 참 딱인 소설이다. 당황스러울 만큼 밑도 끝도 없는 발상의 발칙한 소설이다. 사이먼 리치의 상상에 따르면 하느님이 지구를 만든 이유는 오직 크세논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설계한 세상을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82개 층의 거대 기업조직을 세웠는데 그 중 74개 층이 크세논 사업에 몰두할 만큼 크세논에 대한 하느님의 꽂힘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흥미를 잃은 하느님은 대단히 무능하나 여러모로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들을 구경하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하루 대부분을 인간에 할애하기 시작하였다. 점점 관련 업무는 증가하였고, 기존 인력으론 도저히 소화할 수 없어 죽은 인간들을 40년 계약 천사로 채용하였다. 그런데 천국의 인사도 고과는 물론 비정규직과 정규직, 명예퇴직과 정년퇴직이 나뉜다니 젠장.

 

 

하느님은 세상과 천국 기업조직을 만들었을 뿐 거의 모든 업무는 천사들의 몫. 쉴 새 없이 돌려보는 지구본과 서버(원하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조회 가능)를 통해 기적을 행하거나 재해를 막기도 하고, 밀려드는 기도들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해 하느님에게 결제를 올린다. 그런데 천사들도 몰랐다. 하느님은 단 한 번도 인간의 기도를 들어준 적 없으며, 편애도 심하고, 주기적으로 악플 검색 등을 하며 놀고 또 논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렇게 가만히 계시는 게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더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 사업에 싫증을 느낀 하느님은 천국에서 아시아 퓨전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며, 아예 지구 자체를 종말 시키고 천국 기업조직도 대폭 축소하자는데. 이런 일은 또 무척 빠르셔서 한 달 후에 실행하시겠단다.

 

 

인간이 죽어 천사가 되면 인간 시절의 기억을 모두 잃는다. 그저 업무 대상으로서 인간을 대하는 것이고, 천국 기업에서 일하지 못하더라도 천국에 지내는 데는 별 문제 없다. 그런데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어떤 위기적 사건이 등장하면, 그를 해결하고자 나서는 오지랖 넓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천국 주식회사>도 두 유능한 천사 크레이그와 일라이자, 두 찐따 인간 샘과 로라가 대책 없는 하느님을 막아 지구를 구하고자 한다. 재밌는 것은 그 중 반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이 긴박한 미션에 휘말린다는 것. 3부로 구성된 <천국 주식회사>, 제목은 <천국 주식회사>지만 천국의 시스템을 다루는 부분은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 원제 그대로 갔으면 책을 읽기 전까진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출판사가 어쩔 수 없이 번역하면서 제목을 바꾼 것 같긴 하지만, 그야 말로 ‘What in God's Name!’의 연속이다.

 

 

<천국 주식회사>는 독자의 독서량과 독서철학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소설이다.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는 입장에선 합격점이다. 그러나 미학적으로 감탄할 부분이나 내용적인 여운은 기대할 수 없는 작가의 이력이나 집필 지향점을 떠올리면 이상한 게 아닌데 어쨌든 너무 가볍다. 평소에 책을 거의 안 읽는데 모처럼 뭐 재밌는 소설 없나 하고 찾는 독자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러나 연평균 100권 이상 꾸준히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아주 뛰어나다고 느끼기 쉽지 않다. 코미디인지 로맨틱코미디인지 장르적 정체성을 확실히 했어야 한다는 아쉬움도 있다. 원제와 비중을 고려했을 땐 작가는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추지 않았을까 추측하는데. 그게 의도가 맞다면 전반부의 분량이 너무 많고, 번역판 제목은 천국조직에 초점을 맞춰서 그 의도를 잘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이 책은 문학적인 가치보다 영상화할 만한 매력적인 소재로서 더 가치 있다. 기본 설정과 인물들의 특징이 기발하고 개성적이어서, 잊을만하면 사고치는 CEO(하느님)과 그를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쁜 직원(천사)들이 나오는 특이 오피스물 드라마로 몇 시즌이고 내놓을 수 있다.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그들의 실책과 성과에 따라 요동치는 인간 세계도 중간 중간 보여주고 얼마나 재밌겠는가. 그래서 <천국 주식회사>의 후반부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게 책의 하이라이트니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조금 조언을 준다면 이 책은 지금부터 내년 한 해 동안이 가장 읽을 맛이 훌륭한 최적 독서기간이다. 빨리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다. 특히 요즘을 추천했던 것은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들 예수의 축복(휴일)을 누릴 때기도 하고 연말 스트레스 풀 오락거리로 딱이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장 읽어주는 남자
장진혁 지음 / 인사이트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장 읽어주는 남자] 11번가 상무에게 배운다 : OM JOB 워너비들의 필독서

 

 

 

‘막연한 동경(p.118)’.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궁금한 건 직접 보고 만져야 직성이 풀리는, 전형적인 몸이 피곤한 성격이었기에 ‘알바’라는 편리한 수단으로 돈을 벌면서, 궁금한 현장을 찾아 다녔다. 3대 마트와 SSM을 찾아가 영업 종료 후 손님 없는 매장과 창고를 돌고 돌았다. 직접 고용과 아웃소싱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어떻게 상품이 관리되고 있는지, 기업별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업무 틈틈이 배웠다. 기회가 생기면 티셔츠 한 장을 입고라도 냉장창고에 들어가 보고 혹시 몰라 편의점에 대해서도 어깨 너머로 열심히 보고 듣고 외웠다. 그러다가 의류 브랜드 하나에 한해서지만 백화점으로 파견가기도 하였다. 물류배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무작정 국내 최대 택배회사의 한 영업소를 찾아가 야간 상하차를 하였다.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별별 일을 하였다. 몇몇 대기업은 대놓고 ‘이력서에 쓸 수 없는 하찮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들임에도 말이다. 그렇게 무모하게 살아서라도 하고 싶었고,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직업이 MD였다.

 

 

이 책의 저자인 장진혁의 말처럼 MD라는 직군은 ‘뭐M’든지 ‘다D’하기 때문에 매력을 느끼고 막연히 동경하기 쉬운 직종이다. MD 취업을 준비하는 데 있어선 보통 두 가지 접근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영마광(영업·마케팅·광고)적 접근이다. 흔히 마케팅과 기획은 모두가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잘하지 못하는 분야라고 한다. 그래서 스펙도 천차만별인데다가 경험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국의 미친놈들이 죄다 모인다. 회사마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보니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방계(?) 직군도 고려하는데 그 중 하나가 MD다. 다른 접근은 유통적 접근이다. 현장 친화적이고 업계어를 많이 쓰다 보니 자격증을 차례차례 따며 차분하게 준비하는 이도 있고,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올라가는 이도 있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들이 훨씬 희망하는 진로인데 막상 업무를 해보면 여러모로 남자들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다보니 박이 터지는 곳이 온라인 MD.

 

 

어제(12/12) 국내 OM(온라인 마켓)업계에서 깜찍한 이벤트를 시행하였다. 이름하야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올 한해 엄청나게 급증한 해외직구족과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를 의식한 OM연합 세일 행사였다. SK11번가, 현대H몰, 롯데닷컴, 엘롯데, 롯데마트몰, 롯데슈퍼, 하이마트쇼핑몰, CJ몰, AK몰, 갤러리아몰 10개 업체가 참여하였다. 할인품목의 양이 많지 않고 세일 대상 제품이 기존 최저가보다 크게 낮지 않아 소비자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첫해고 홍보가 부족해 알지 못하고 넘어간 뒷북 소비자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업체들의 자평은 긍정적이다. 당초 전체 1000억 매출을 목표로 기획하였는데 1500억을 돌파하였고, 참여 사이트 대부분이 서버 다운되었으며, 적게는 11%에서 많게는 200% 이상 매출이 증가하였다. 최고의 승자는 이번 행사를 주도한 11번가였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아이디어는 작년 11번가에서 낸 것이 기원이다.

SK에서 운영하는 OM 11번가는 여러모로 연구할 거리가 많은 흥미로운 대상이다. 상당한 후발주자였고, 기존에도 SK에서 여러 번 OM 사업을 벌였지만 성과가 별로였기에 시장에서 큰 기대를 받지 못하였다. 주요 유통업계가 통합 멤버십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체 계열사 브랜드와 제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초기 11번가의 고속 성장엔 SK텔레콤이 국내 이동통신 가입자 1위인 것을 이용, T멤버십 반값 데이 등 공격적인 가격차별 정책이 1등 공신이었다. 뒤이어 OK캐쉬백과 오포인트도 멤버십에 적극 연계하면서 다른 통신사 고객의 박탈감을 해소하고 포섭하였다. 그리고 110% 보상제나 11%할인쿠폰 발급 등 11과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행함으로서 이용자들에게 브랜드를 세뇌시켰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기 진화하는 11번가의 마케팅은 언젠가부터 누구에게나 눈에 띌만한 괴물들을 내놓고 있다. 작년이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라면 올해는 단연 ‘쇼킹딜11시’다. 이러한 11번가의 모든 역사엔 OM 총괄 상무 장진혁이 있었다.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에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 동안 11번가 이용자로서 혼자 생각해왔던 바에 대해 답안과 해설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처음 신간 목록을 살펴보다 <시장 읽어주는 남자>라는 제목을 발견하고 경제전망서류인지 알았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으로 책을 집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말리겠다. 이 책은 타깃 독자가 분명하다. OM에 관심이 있고 현직 셀러나 MD거나 그를 희망하는 독자에게만 한 줄 한 줄 천금 같고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도 유용성도 현저히 반감된다. 책은 11번가에 대한 이야기, OM 셀러와 워너비들을 위한 조언, OM MD와 워너비들을 위한 조언, 자신의 MD 이력과 철학 해서 네 장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11번가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는 몰랐던 부분들을 빠르게 찾고 숙지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는데 예를 들어 11번가는 차별적 혜택이나 공격적 마케팅이 아닌 신뢰에 운영 중점이 있다. 그리고 요즘 국내 모바일 산업의 핫이슈가 옴니 채널과 아마존·알리바바·해외직구에 대한 대응인데 업체 노하우와 직결되는 민감한 부분이라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상당한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쇼킹딜11시와 애플리케이션과 관련한 자체 분석과 평가 부분을 보며 배운 바가 참 많았다.

 

대학에서 창업 강의를 개설하면 십중팔구가 과제에서 오픈마켓 셀러를 포함해 쇼핑몰 창업안을 내놓는다. 그만큼 누구나 손쉽게 떠올리고 시도하는 영역인 만큼 경쟁도 피 터지고 실패하기도 쉽다. 수많은 셀러들의 플랫폼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오픈마켓 창업과 운영 노하우를 알려주는 장은 주옥같은 조언들로 가득하다. 역으로 보면 MD 입장에서 셀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많이 배울 수 있는 장이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MD에 대해 논하는 3장인데 4장에 앞서 자신의 경험담을 적절히 예시로 써가며 특히 MD 취업준비생들이 MD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뭣도 모르고 지원’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일깨워준다. 그래서 <시장 읽어주는 남자>가 가장 유용한 독자는 역시 OM MD와 MD 워너비다. 모든 장이 MD로서 역량 기르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장진혁 상무에 대해 알고 있었던 독자라면 그가 70년대생 기업 임원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갔을 수도 있겠다. 그런 마음에 두근두근하며 마지막 장을 펼치면 좌절과 희망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는 일단 타고난 유복한 배경에 상경전공은 아니지만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영어 능통자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를 파악하는 묘미는 그에 대한 본론은 앞 세 장에 이미 언급이 되어 있다는 점인데 4장과 에필로그를 다 읽었을 때 모든 퍼즐이 한꺼번에 맞춰진다는 점이다. 처음 까르푸에서 입사 면접을 보며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청년이 어떻게 입사했고, 좋은 첫 사수를 통해 오프라인 유통업에서 어떻게 경력을 쌓아 온라인으로 넘어가는지, OM에 젬병이었던 대기업을 어떻게 성장시켜나가는 등등 길지 않은 사담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한편 모든 직장 생활에 두루 적용되는 일반론들도 빼놓지 않는데(이 부분 때문에 OM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더라도 성공한 샐러리맨 자서전 정도로는 책을 즐길 수 있다) 아무래도 이 책이 20대 구직자와 사회초년생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책인 만큼 그 즈음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 주고 있다.

 

OM MD나 BM직을 여러 번 지원하고 떨어진 바 있기에,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책이 좀 더 일찍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고 잠깐 상상을 해봤다. 그리고 매우 반성했다. 천성적으로 큐레이션을 좋아하고, 열다섯부터 밥 먹고 물건 팔고 소개하는 것만 생각했으며,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공을 하였지만, 정작 그것이 직업이 되지 않았다면 정말 적성이고 주특기일까. 얼마나 많은 인생을 낭비하고 노력이 부족했나.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헝클어댔다. 책을 소개하다 보면 종종 책의 우수성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어 혼자만 알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책들을 만나곤 한다. <시장 읽어주는 남자>가 그랬다.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을 치고,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볼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독자에게 구성으로도 내용으로도 가볍게 읽을 만한 평이한 경제경영서 혹은 에세이다. 욕망과 관심의 크기만큼 읽게 되는 책이다. 그래도 적어도 셀러든 MD든 OM JOB을 꿈꾸는 이들에게만큼은 필독서라고 자신 있게 권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빚으로 지은 집 -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아티프 미안 &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빚으로 지은 집] 대침체의 처음과 끝, 가계부채

 

 

 

대중교통비와 담배값 인상, 도서정가제 실시 등 각종 가격 정책의 시행 혹은 시행 예고를 두고 민심이 심란하다. 재정 누적 적자 해소, 세수 확보, 산업 활성화 등 타당하거나 선의의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상 이상으로 국민들이 반발하고 원하는 정책 효과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 정책들이 안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 소비 침체에 더욱 기름을 붙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자 실질임금 상승률이 6개 분기 연속 하락세 끝에 0%가 되었고 저임금 임시직은 심지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노동생산성 둔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도 고용을 늘리려면 저부가가치·저임금 서비스업 직종 채용을 늘릴 수밖에 없다. 취업시장에서는 이미 정규직 1명을 채용하면 비정규직 일자리 두세개가 없어진다고 구직자를 세뇌하고 있고, 단순 아르바이트도 수습이 등장하였다. 올해의 경우 세월호 경기 위축이라고 시사용어가 등장했을 정도로 반년 정도 요식업과 문화산업 등에 타격이 있기도 하였다.

 

 

소비 위축을 우려하는 이유는 경제 선순환의 핵심이 소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자 경제 동향은 쉽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의 각종 악재도 있지만 더욱 걱정인 것은 겉잡을 수 없는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가계부채이다. 10년도 채 안 돼 가계부채 규모가 500조에서 1000조로 2배가 되었다. 어느 대부업체가 사채 받아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도 해보고 비싼 옷도 입어 보라는 광고를 해서 격렬한 비난을 받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인간은 저축을 좋아하고 대출을 싫어한다. 그러나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표현처럼 산업과 경제의 고속성장의 결과, 현대 자본주의는 실물부문이 아닌 금융이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다. ‘돈이 돈을 만든다’가 시대의 상식이 되고 금융기관은 앞 다투어 파생상품 판매와 대출 권장에 열을 올렸다. 기업 뿐 아니라 일반 가정도 어느 정도 빚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고, 빚을 내서 투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풍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19세기 말의 대불황과 1930년대의 대공황과 견주어 미국발 글로벌 금융 이후 현재를 ‘대침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상황은 심각하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경제철학은 재편되고 있으며 경제물리학 등의 대안 학문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미국 경제의 들썩임이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친 것은 세계 경제에 미치는 미국 자본의 힘이 엄청난 것도 있지만 미국에서 만든 경제 모델과 처방들을 수많은 나라들이 따라했기 때문도 있다. 혹자는 미국이나 세계가 이제는 대침체를 넘어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중산층 가정의 81%가 15년 전보다 수입이 낮으며, 빈곤율이 15%를 넘어섰으며 SNAP(식품 지원)나 TANF(재정 지원)에 등록된 저소득자가 점점 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올해 5월, 미국에서 흥미로운 경제서가 출간되었다.

 

 

IMF가 선정한 45세 이하 차세대 경제학자 25인에 속한 두 경제학자 아티프 미안과 아미르 수피가 8년간의 실증 분석 끝에 경제에 미치는 가계부채의 위력을 낱낱이 밝힌 역작을 내놓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계부채가 나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상식적으로 모두 아는 사실이고 관련 서적도 많다. 하지만 데이터로 명확한 실증을 제시하고, 가계부채 한 주제에만 집중해 이만큼 분량의 책으로 나온 것은 거의 없다. 압권은 이 책의 결론인데 ‘심각한 경제 침체 이전에는 반드시 가계부채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대침체의 시작도 끝도 가계부채라고 못 박은 것이다. 그래서 파이낸셜 타임즈는 일찌감치 이 책을 올해의 책 최종 후보로 올리기도 하였는데, 발간 6개월이 채 안 돼 열린책들에서 한국어 번역판을 내주어 반갑고 고마웠다. 이번 번역은 저자 중 한 명인 아티프 미안 교수 아래서 박사 학위를 받았던 연세대 경제학과 박기영 교수가 맡았다.

   

 

미국처럼 경제적 재앙 이전에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소비 지출이 급감하는 패턴은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찾아볼 수 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가계부채가 더욱 크게 증가할수록, 소비 지출 또한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 p.20

 

은행 위기로 인해 촉발된 불황 이전의 부채 증가량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무려 다섯 배에 이른다. 그리고 은행 위기로 촉발된 불황이더라도 민간 부채가 낮았을 경우에는 경제적 여파가 일반적인 불황의 충격과 비슷함을 알 수 있었다. - p.23

 

빚은 보험과 정반대로 위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빚은 주택 소유와 관련된 위험을 분산시키기는커녕 그 위험을 감당할 능력이 가장 적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전가시킨다. 빚은 대침체기 동안 부의 불평등을 두드러지게 심화시켰다. 빚은 또한 압류를 통해 자산 가격을 떨어뜨린다. 떨어진 자산 가격은 모기지 대출을 이용한 주택 소유자의 순자산을 크게 감소시키며 이는 또 다른 재앙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 p.51

 

레버리지가 높은 가계일수록 집값 변화에 따른 한계 소비 성향이 높다. - p.66

 

결국 경제 상황은 수요에 의해 주도된다. - p.83

 

빚은 거품의 생성뿐만 아니라 팽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p.166

 

 

두 저자는 이번 연구를 통해 대내 채무, 대외 채무 모두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레버드 로스 (프레임워크) 이론(모델)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논의하는 모든 내용의 이론적 기반을 여기에 두고 있다. 빚을 지다leveraged와 지렛대lever의 중의적 의미를 담은 이 이론은 ‘빚 때문에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해가 증폭된 손실’에 관한 이론이다. 한 경제의 구성원은 빚의 유무에 따라 이질적이며, 빚을 진 가계들이 급격하게 소비를 줄이게 만드는 경제 전체에 대한 충격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 두 가지 요인으로 부동산 가격의 하락이 소비에 미치는 효과가 증폭되는데 그 양상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주택 자산의 가치가 변할 때 소비를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계층, 즉 빚진 사람들에게 손실이 집중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압률 인해 집값 하락의 충격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비를 줄이지 않고도 손실로 인한 충격을 더 쉽게 완화시키려면 채무자가 아닌 순자산이 많은 저축자가 되어야 한다.

 

책 제목이 <빚으로 지은 집House of Debt>인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먼저 이 책의 출발이 되는 미국의 경제 대침체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대표되는 가계의 무분별하고 폭발적인 주택 대출 때문에 시작되었다. 또 가계부채의 주요인이 주택 대출 때문이다. 가계 경제에 있어 ‘내 집’의 의미와 총자산에서의 비중이 상당한 만큼 가계 ‘경제(개인 소비자)=집’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과장이 아닌데, 그 집이 빚으로 이룩한 것이라면 그 존재가 사상누각처럼 얼마나 위태로운가. 저자는 국가 경제의 탄탄한 기반은 정부나 기업이 아닌 가계에 달렸다고 본다. 그렇기에 ‘빚으로 지은 집’(의 증가)은 크게 해석하면 ‘국가 부실화’의 비유로까지 확장 연결할 수 있다.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가계부채의 요인이 주택 대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제목을 <빚으로 지은 집>으로 지은 것은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가계부채의 중요성에 회의적인 경제학자들도 많다. 그들의 시각은 크게 셋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시각은 경제의 펀더멘털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비합리적이고 자주 변하는 기대 때문에 경기 변동이 발생한다는 야수적 충동 가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채의 누적이 문제가 아니라 부채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 문제로 금융 부문을 강화하여 은행이 가계와 기업들에 계속 자금을 공급함으로써 자금의 흐름이 원활하다면 경기를 복구할 수 있다는 은행 중심적 시각을 들 수 있다. 앞선 두 시각은 결국 불황은 경제가 자연스럽게 돌아가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딱히 해결법이 없다. 마지막 시각이 대침체기 동안 정책 입안자들의 주 기조인데 알다시피 그 정책들은 실패하였다. 저자들은 경제적 재앙에 대처하고 이를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인을 아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가계부채’로 보고 책의 전 장에 거쳐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2002년에서 2005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모기지 대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평균 소득은 점점 감소하는데 대출은 더해주며 비상식이 횡횡했던 디트로이트 서쪽 지역의 사례는 대침체 전 가계 대출에 대한 금융기관의 행각과 사회 풍조가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빚으로 지은 집>은 이러한 가계부채의 심각성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그 해법까지 제시함으로써 완벽한 가계부채 단행본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막연히 위험하다고 느꼈던 가계부채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문제는 흔히 원대한 야망을 품은 연구나 저서들의 공통적인 문제, 해법의 부실함이다. 거시 경제 정책의 기본은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이다. 치밀한 분석 끝에 저자들은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 모두 가계부채 감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얼마나 되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단 하나이고, 가계의 주택 대출의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 ‘책임 분담 모기지’라는 새로운 모기지 계약 형태이다. 책임 분담 모기지엔 하방 위험 보호 조항과 자본 이득 공유 조항이 있다. 전자는 주택 가격이 구매 시점보다 떨어질 때 낙폭에 비례해 상환금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인플레이션 연동 국채 등을 생각해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시도도 아니다. 후자는 주택 가격 상승으로 인한 이득의 일부를 채권자에게 지급함으로써 채권자의 위험을 줄인다. 정도를 5%로 두고 비과세로 처리해 채무자도 부담이 적다. 저자들은 책임 분담 모기지가 주택 순자산의 감소를 줄이고 연쇄 효과로 높은 가계 지출과 적은 일자리 손실을 촉발한다고 전망한다. 소비가 증가해 경제가 바닥에 있어도 총수요를 지탱할 수 있다면 그만큼의 일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저자들은 책임 분담 모기지를 통해 시장 거품을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다만 지금까지 책임 분담 모기지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정부가 빚을 이용한 자금조달에 대대적인 정책적 보조(광범위한 세제 혜택)로 대출 제도 개선과 혁신에 게을렀기 때문이다.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는, 이타적인 정책이 유일하고 강력한 해법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우리가 책에서 했던 분석들 대부분은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빚이 거시 경제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최상의 미시 데이터를 구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결론과 시사점들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 지역의 최근 불황은 미국의 경우와 매우 비슷한 경로를 따르고 있습니다. (...) 빚의 무서운 파괴력을 겪은 지역으로 아시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 한국은 대외 채무의 위험성을 잘 관리했지만, 국내의 높은 민간 채무로부터 비롯된 문제에는 여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 동아시아 위기 이후 한국의 가계부채는 급속하게 증가해 왔습니다. 가계부채의 증가세는 가처분 소득의 증가세를 크게 앞질렀습니다. 가처분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동아시아 위기 이후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2012년 말 기준으로 가처분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OECD 국가 평균은 133퍼센트이나 한국은 164퍼센트에 이릅니다. 국내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해 가계부채의 증가에 너무 크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200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우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한국 경제가 당면한 위험은우리가 해외의 여러 역사적 사례들에서 살펴본 경우와 유사합니다. 주택 시장이 침체하기의 총수요는 부정적인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저자들의 한국어판 특별 서문 中

 

 

해법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막연한 해법 여러 개보다 확실한 해법 하나가 낫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들의 글쓰기 취향이 얼마나 깔끔한지 알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해법 제시도 시원스럽다. 다만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저자들의 ‘유일 필승법’이 무릎을 탁 칠만큼 감탄스러울 수도 있고 다른 것은 없나 싶어 부실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저자들이 한국어판 특별 서문에서 우리 경제에 대한 분석을 살짝 첨언해둔 것처럼 <빚으로 지은 집>에서 논의하는 가계부채 분석은 미국에만 국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참고하고 따라한 모든 나라들에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가계부채 증가율과 경기 상황은 영 심상치가 않다. 열린책들이 서둘러 이 책을 번역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연말, 각종 트렌드 분석서나 재테크서를 읽으며 내년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다. 당장의 생활에 적용하는 실용서도 좋지만 꾸준히 경제경영서를 찾고 읽는 이유가 시장을 보는 통찰력과 감각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서인 바, <빚으로 지은 집> 같은 책도 함께 읽으면 더욱 뇌가 배부른 겨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가족의 역사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1
리쿤우 지음, 김택규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내 가족의 역사] 화가가 끔찍한 상처를 그려 남기는 이유는

 

 

 

 

역사에 대한 기억은 현실을 향한 응시이자 미래를 향한 전망입니다.

이 만화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 리쿤우

 

우리 가족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상처가 다시 드러났다...

전쟁 속의 인간은 선택권이 없다...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오랜 세월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역사는 잊어서는 안 되며 곡해는 더더욱 금물이다.,,

시대의 흔적인 동시에 기억이 내 삶 속에 새긴 콤플렉스...

해묵은 감정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 서문을 대신한 저자(리쿤우)의 창작노트 中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며칠 전 <기획회의> 12월호를 발행하며 올해의 출판계 주요 키워드 30개를 뽑고 그 중 최고의 키워드로 ‘추억의 반추(역사)’를 꼽았다. 고동석 <기획회의> 편집주간의 말처럼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반추하는 추억을 우리는 ‘역사’라고 말한다. 올해는 ‘역사’를 바라보는 책이 여럿 나오고 큰 인기를 누렸는데 단순한 역사책 열풍이 아니라 장르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 개인적인 시선의 미시사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변호인>과 <명량> 등 상당히 허구를 가미한 ‘보고 싶은 대로의 역사’ 영화에 쏠린 광풍과도 맥을 함께 한다. 개인으로서의 무력함과 리더다운 리더에 대한 목마름, 그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를 드높이고픈 욕망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소설로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황석영의 <투명인간>이 유의미했고, 외국 소설로는 일자무식 스웨덴 사내가 온갖 20세기 세계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는 코미디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꾸준히 베스트셀러 랭킹을 지켰다. 이러한 흐름을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책으로. 정계 은퇴 후 안정적으로 작가로 컴백한 유시민의 <나의 한국 근현대사>를 꼽고 싶다.

 

 

역사가가 아닌 이상 개인에게 역사와 시대는 자신이 겪어 온 시간 덩어리로, 기억으로 기록되고 저장된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적 서술은 자의적이고 사적이게 마련이다. 자신과 뗄 수 없고 집안이나 가족과 뗄 수 없는 사건일수록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리쿤우의 그래픽노블 <내 가족의 역사>를 읽으며 떠오르는 추억 하나가 있었다. 대학 졸업 여행 겸 중국에 11일 동안 체류했던 경험이다. 3,200만원 4년 등록금 중 300만원도 채 회수하지 못했던 비루한 부모 등골 브레이커가 장학금을 털어 떠났던 유일한 해외여행 경험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감 등 평소 그리 좋아하는 나라도 아니었고, 현지에서도 그 짧은 기간 동안 별의별 사건에 물과 공기가 너무 안 맞아 술과 차로 연명했던 지난한 여정이었음에도 감행하고 즐겼던 이유는 중국 곳곳에 산재한 우리 독립운동유적지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임시정부조차도 국가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우리 같은 민간의 지속적인 방문과 우리보다 몇 백배 반일감정이 강한 중국 인민들의 오지랖 덕에 겨우겨우 보존해오고 있다. 홍커우 공원에서 조깅하다 윤봉길 의사 찾다 하며 일상적으로 윤봉길을 상기하는 인민들, 우리와 되도 않는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난징대학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던 대학생 등 역사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기억욕은 대단하였다. 대도시 한복판에 판잣집처럼 있던 독립유적지들에도 애써 참던 눈물이 터져 나왔던 것은 태양산 등 1930년대 한중 연합 무장독립전쟁 관련 유적지들에서였다. 그늘 하나 없이 작열하는 민둥산에서도 총알받이를 각오하고서라도 싸웠다는 충격적 사실, 무너진 벽들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이 절절히 느껴지는 표어 등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광경에 온 마음이 무너졌었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척박하고 외진 내륙 지역에서도 조상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 끔찍한 흔적들을 보존하며 대대손손 기억하는 현지인들이었다. 그래서 <내 가족의 역사>의 창작 동기와 작가의 정서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작가인, 중국의 화가 겸 만화가인 리쿤우는 1955년생이다. <내 가족의 역사>의 큰 중심소재는 1894년에서 1895년 벌어졌던 청일전쟁과 1937년에서 1945년 벌어졌던 중일전쟁이다. 즉 그 후 출생한 리쿤우의 역사는 아니기에 ‘내 가족의 역사’다. 특히 책 후반부 중일 전쟁에 대한 부분은 작가의 장인이 겪은 1938년 쿤밍 대폭격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청일전쟁보다 더 직접적인 ‘내 가족의 역사’이다. 리쿤우는 다양한 분야에서 미술활동을 해온 중국 미술계의 거목이다. 그리고 <중국인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전적 역사 만화를 그리면서 프랑스와 벨기에에 이름을 알렸다. 현대사를 소재로 한 <중국인 이야기>와 <내 가족의 역사>는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 그의 자전적 역사 만화 시리즈가 몇 작품으로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지금의 창작 행보는 반드시 할 만큼 하고 살 풀어야 하는 일종의 인생의 소명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역사물보다 저널리즘 르포 같은 분위기가 더 짙다. 만화의 모티브가 된, 아예 스캔까지 해버린 청일전쟁 관련 그림과 복사를 할 방법이 없어 하루 종일 걸려 일일이 사진을 찍은 중일전쟁 관련 사진의 상당 부분이 만화에 직접 삽입되다보니 더 그런 느낌이 강하다.

 

 

<내 가족의 역사>를 읽으며 비장함마저 느끼는 것은 판화를 보는 듯한 진한 만화체인 것도 한 몫 한다. 한술 더 떠 <내 가족의 역사>의 경우 후반부 장인의 회고 부분은 아예 굳이 일일이 판화를 제작해 페이지를 구성하였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한 그래픽노블이다. 골동품 시장에서 얻게 된 귀한 전쟁 자료로 직업정신을 살려 만화로 남긴다는 이야기. 머리도 식힐 겸 골동품 시장 산책에 나선 리(작가)는 자신을 그저 라오치(형제 중 일곱째)라고만 부르라는 묘한 장사치를 만나고, 이상하게 리에게 강한 호감과 신뢰를 느끼는 라오치는 리에게 자신이 ‘애국주의의 국보’로 친다는 일본의 전쟁기록화를 며칠 유상 대여한다. 작업실에 돌아온 리는 조수의 도움(번역)으로 그 그림이 청일전쟁을 아주 세세히 그림으로 그린 걸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전율을 느끼며 몰래 스캔을 뜬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림을 반납하고 대여금을 더 쳐주면서 스캔 사실을 이실직고한다. 라오치는 잠시 당황했다가, 이런 쪽에 관심이 있다면 스승님의 소장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스승님 댁으로 리를 데려가는데 그곳엔 스승이 평생 모았다는 엄청난 양의 중일전쟁 기록 사진집이 있었다.

 

 

그 사진집을 복사할 방법이 없어 일일이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데 그 사진뭉치만 5kg, 조수가 일일이 번역해 1937년에서 1938년 위주의 자료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국주의에 온 열도가 미쳐 날뛰던 시대, 뉴스에 일희일비하는 국민들을 위해 온 전쟁터를 함께 다니며, 병사보다 더 앞서고 방독면을 써서라도 사진을 다 남긴 일본인 종군기자들의 직업정신이 남긴 ‘치욕스러운 보물’이었다. 라오치의 스승이 워낙 좋은 물건을 구했고 보존도 탁월해, 사진을 사진으로 찍은 것만 보고 있노라도 마치 그 시대를 겪고 있는 듯 생생하였다. 사정없이 적에게 잔인한 일본군이 어떤 중국인 장교의 죽음엔 묵념한 것에 의아하기도 하고, 일본군의 점령에 투항한 것까진 좋은데 일본군보다 더 악랄하게 중국인을 착취한 매국노에 분노하기도 하고 조수의 번역을 들으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쯤 장인이 겪었다는 1938년 쿤밍 대폭격 기사를 보게 된다. 그 길로 장인을 찾아가 설득하고 설득한 끝에 장인이 죽기 전 가까스로 회고담을 듣고 만다. 그 때가 1998년이었다. 그리고 2012년에야 한 권 분량의 그래픽노블로 완성할 수 있었다.

 

 

결말이 무척 극적이라(드라마에선 흔하지만 현실에선 흔하지 않는) 이 만화가 전부 사실인 게 맞는 건지, 팩션이라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떤 부분이 허구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한국어판 제목의 이유가 짐작은 가지만 왜 굳이 원제를 바꿨는지 모르겠다. 원제인 <상흔傷痕>이 훨씬 작품의 주제의식과 정체성을 명확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골동품 시장에서 우연히 겪은 기묘한 경험과 인연은 잊고 있던 상처를 건드린다. 애써 세월이 이겨냈지만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고 흉터를 남겼다. 그 흔적을 다시 외면하지 않고 들췄다.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찡그리고 누군가는 그 흉터를 더 건드리며 생채기를 낸다. 누구는 새살이 솔솔 나는 연고를 가지고 뛰어올 것이고 누구는 말없이 안아줄 것이며 누구는 그저 한참을 서서 울다 갈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함께 견뎌 이겨낼 수 있는 존재. 같은 내용을 글만 쓰지 않고 일일이 그림으로 표현하면 시간이 몇 배나 들고 힘들다. 내용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화가는 펜과 함께 붓을 잡았고, 그도 성에 안차 판화까지 새겼다. 책 속의 문장처럼 한 개인의 가장 아픈 상처이자 한 가족의 역사에서 가장 침통한 한 페이지(p.257)일지라도 알리고 남겨서 ‘같이’ 기억하고 싶었다.

 

 

<내 가족의 역사>는 북멘토 출판사의 그래픽노블 시리즈 ‘톡’의 첫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고, 두 번째 책으론 한국전쟁을 다룬 우리 그래픽노블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가제, 근간)>이 예정되어 있다. 여러 출판사들이 10여년 가까이 고군분투한 끝에 우리나라도 그래픽노블을 꾸준히 찾는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북멘토의 ‘톡’ 시리즈는 색깔이 독특한데 ‘십 대와 어른이 함께 읽는 만화’라는 콘셉트로 평화, 인권, 노동, 생태 등을 다룬 사회성 강한 그래픽노블을 출간할 계획이라니 기대가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경구를 그렇게 좋아라하며 마구 인용하면서도, 나라가 앞장서 역사 교육을 홀대하는 우리 사회. 이 책도 ‘추억의 반추’ 유행이 역사 관심을 자극한 김에 올해가 가기 전 읽어볼 만하다고 적극 추천해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인보다 심하게 일본의 착취를 받은 우리가 더 생각과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고,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은 우리 역사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