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살림지식총서 168
김성곤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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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하긴 하지만 작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샐린저는 자신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를 고소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병적인 거부감을 보였단다. 자기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처럼 속물스런 세상을 거부하고 은둔하여, 현재 이 유명한 소설가의 근황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하니, 1919년 생인 그가 혹시 벌써 사망한 것은 아닐까.
가끔 어떤 작가들의 프로필을 볼 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글귀를 접하면, 그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로서는 굉장한 아쉬움을 갖게 마련이다. 작품은 책으로 출판되는 순간 작가와 별개의 존재가 되지만,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좋은 (어떤 때는 가장 편협한 시각을 조장하기는 하지만) 자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이 읽혀지지 않는 것보다 잘못 읽혀지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서문이나 작가 노트의 지면을 빌려 작품의 의도를 설명해주는 '친절한'(?) 작가들도 있지만 좋은 작품이란 역시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하는 화수분 같은 작품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샐린저의 은둔은 작품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해 준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그가 더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책이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킨 만큼 전세계 수십개 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는데, 각 나라에서 이 책에 붙인 제목들이 재미있다. 이탈리아어판은 '한 남자의 인생', 일본어판은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 노르웨이어판은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 스웨덴어판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 덴마크어판은 '추방당한 젊은이', 프랑스어판은 '마음의 파수꾼', 독일어판은 '호밀밭의 남자', 네덜란드어판은 '고독한 방랑자'(후에 '사춘기'로 바뀜)이다(본서 36-37쪽 참조). 각 나라의 특성을 잘 살려 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노르웨이어판 제목 같은 경우는 어쩌면 책의 내용과는 좀 동떨어지게 심각하다는 생각 또한 든다. 이렇게 제목이 다양하게 바뀐 이유는 아마도 이 작품에서 편집자가 어느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나는 소년답지 않은 신랄한 세상 비판과, 그런 가운데서도 여동생 피비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만으로도 홀든이 매력적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홀든 자신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미국 사회와 전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알았다면 아마도 그는 그마저도 허위와 위선이라 생각하며 다시금 도피할 어딘가를 찾지 않았을까. 어제 마침 TV에서 '천국보다 낯선'을 보았는데, 홀든이 거부하는 미국사회의 모습은, 저것이 과연 어느 시대 미국의 모습인가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그 낯설음과 어쩐지 자연스럽게 겹치는 것 같다..

 덧붙여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 값과 꼭 같은 살림지식총서 목록을 보니, '무엇을 택할 것인가' 매우 갈등이 생긴다. 때론 커피 한 잔이 책 한 권만큼의 위안과 흥분을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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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공주 - 북클릿 + 캐릭터 스티커 2종 포함 초회 한정판
방은진 감독, 엄정화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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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의 피해자, 곧 여성은 소위 '두 번 죽는다'.
첫 번째는 피의자인 남성으로부터 가녀린 성을 앗기고, 두 번째는 피의자인 남성을 보호하는 법적 한계로부터 자신을 유린한 당사자를 처벌할 기회를 앗긴다. 운좋게 피의자를 처벌한다 하더라도 사실상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빼앗긴 물건을 돌려받는다거나 피해를 금전으로 보상받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도저히 '보상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성범죄자 처벌 및 재발방지 논의에서 전자팔찌 등등이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인권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분명 그러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대상이 먼저 '인간'임을 전제한다. 그런데 성범죄자는 자신이 그런 범죄를 품는 순간부터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인권을 보호해야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을 제어하고 지배하기 위해 목줄을 메고 감금하는 것처럼 대우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을까.

이 영화는 성범죄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조하고 원인을 제공한 사회에 대한 처절한 복수극이다. 5명의 희생자 중 누구 하나라도 자신의 단계에서 멈춰줄 수 있었다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의 무심함은 한 아이에게 있어 살 수 있는 다 섯번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이 영화는 이러한 피의 복수극을 긍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듦으로써 나의, 내가 속한 사회의 무력함을 일깨우고 있다.

도통 친근해지지 않는 무력함의 표상 문성근과 오싹하게 히스테리컬하다가도 문득 '싱글즈'의 동미를 연상케하는 엄정화의 연기가 묘한 언발란스를 이룬다. 영화 자체가 잘 만들어졌다기 보다도 한 번의 강렬한 메시지가 크게 다가온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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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6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0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범죄라는 것이 그다지 색다른 주제도 아니고, 근데 이 영화는 묘한 울림이 있네요~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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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는 이가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던 그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먼저 그녀의 종교와 가까워졌고, 세례받기 직전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무사히 신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자신은 "여자친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모태신앙을 가진 나는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있고, 지금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그 신앙이라는 것이 마치 숨쉬는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의미를 온전히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내게 하느님은 '사랑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힘이 들 때 매달리고, 고통이 지나간 뒤에는 감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저 하늘 위에 있는 존재였다.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 저 사람은 여자친구와의 사랑이 끝나버리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끝나버릴지 모르지만, 어쨌든 신에 대한 믿음을 '사랑'으로 시작한 그 앞에서 나는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파이의 삶(이 책의 원제에 'story'가 아니라 'life'가 쓰였다는 점을 기억해두고 싶다) 속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신을 대하는 어린 파이의 순진무구함이었다.
파이는 자신이 힌두교도이며, 힌두 사원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영을 의식하며, 힌두의 눈을 통해 우주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파이는 힌두교가 "사랑 넘치는 자비심의 어마어마한 우주적인 힘"(p.70)이라고 매혹적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충분히 (자신의 종교에) 만족하는 힌두교도"인 파이는 열네 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십자가 위에서 '멍들고 피흘리는' 희생자가 바로 기독교의 '신'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왜 예수는 인간처럼 죽어야만 했는가, 신이란 온 우주를 품고 있는 위대하고 강력한 존재여야하지 않는가라고 파이는 사제에게 묻는다. 사제는 그 모든 질문에 '사랑'이라는 말로 답하고, 파이는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며칠을 괴로워한 끝에 기독교도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로부터 일 년 뒤 파이는 이제 이슬람교도가 된다. "형제애와 헌신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종교"의 방식으로 기도할 때, 그는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으로 무릎을 꿇었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일어났다."(p.85)
이렇게 이 열 다섯의 소년이 자신 안에서 힌두의 신들과 예수와 알라를 만나는 사이, 아이러니하게도 세 종교의 사제들은 저마다 파이가 자기 종교의 신자라며 부모를 설득한다. 당황한 파이의 아버지는 그에게 왜 기도를 하고 싶어하느냐고 묻는다.

 "신을 사랑하니까요."(p.98)

나는 이 대목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랑이란 부족함을 채워주는 행위이고, 부족함이 없는 신에 대해 감히 나는 사랑한다는 단어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도 어떻게 해야 신을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 단순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서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 파이를 극한의 고통 속으로 몰고 간다. 파이는 그 속에서 신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신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존재의 기본원칙은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랑은 불가항력적인 것이지만, 때로는 명확하지 않고, 분명치도 않고 즉각적이지도 않다."(p.86)

그는 구명보트 안에서 리처드 파커와 단둘이 남았을 때 단순히 리처드 파커를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를 이해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주는' 행위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한없는 '이해'가 아닌가. 그렇지만 리처드 파커는 작별인사도 없이,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그를 떠나버린다. 파이는 그때를 생각하며 악몽을 꾸지만, 그것은 여전히 "사랑으로 얼룩진 악몽"이다.
이 모든 시련이 끝난 뒤 파이는 성모님을 본다. 아니 그는 "그분을 봤다고 느꼈다." 그 자신도 왜 성모님이었을까 자문한다. 그분은 파이에게 사랑 넘치는 미소를 지어주었고 그는 "신의 존재가 최고의 보상"이라고 느낀다.

무엇보다 파이는 신의 존재란 인간적 상실에 대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사랑은 서투른 이별로 끝났지만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은 바로 신의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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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4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04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시작이 참 어려웠어요. 몇 번을 덮었던 책인데, 속도가 붙기 시작하니 이번엔 놓기가 힘들더군요^^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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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인문학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분석은 어떨지 몰라도 종합을 하려면 결국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위의 저 말은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최재천 교수의 말이다. 문득 인문학도로서 뿌듯한 감흥이 생겨나는 동시에, 논문을 쓰면서 느꼈던 내 문제의 본질을 꿰뚫게 됨으로써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논문이란 분석한 항목들을 일목요연하게 종합하여 하나의 조직적인 구성체로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 같다. 구구절절 절감하는 바로, 사실 분석도 부족하긴 마찬가지이지만 인문학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종합' 능력이 부족하여 나의 논문은 지난한 작업이 되고 말았다. 논문의 반, 아니 80%는 목차를 짜는 것, 그러니까 글의 뼈대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10%가 분석력, 나머지 10%가 필력인 것 같다. 한심한 나는 마지막 심사가 코앞에 닥쳤을 때도 80%의 그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여전히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논문을 쓰는 목적이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 것일텐데,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오히려 그 폭은 사정없이 줄어들고 말았다.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도 모자라다. '시간이 없다'는 새빨간 거짓말들로 자기변명을 하면서 나는 점점 다이제스트식 독서에 자신을 길들이고, 깊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읽지 않은 책들은 뇌사상태에 빠진 식물인간처럼 점점 시들시들해져간다. 책은 호박 안에 갇힌 중생대 곤충처럼 눈으로 즐기는 보석이 아닌데. 영혼의 교감이든 육체적 교감이든 부딪치며 느껴야지.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아래 도정일씨의 아름다운 충고를 되새기며 책읽기를 더 바지런히 해야겠다. 

"나는 예술이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인문학적 경험은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인문학적 삶의 제 1조예요."

오... 아름답다. 나의 고리텁텁한 두뇌 속에는 그저 예술은 미의 탐구를 통한 예술적 경험만을 준다는 사고방식만이 들어있었는데, 그방식에 일대 획을 긋는 엄청난 반향이다!  부시Bush가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부시의 인문학적 소양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부족, 이러한 com+passion의 경험을 최재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고, 호모 폴리티쿠스이기도 하지만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공생인간이기도 하다"

스타워즈 episode 1에서 콰이곤 진은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는 아나킨 스카이워커한테서 미디클로리언 수치를 조사한다. 아나킨이 미디클로리언 수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콰이곤은 "미디클로리언이란 간단히 말해서 포스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포스의 뜻을 전달하는 공생자(Midichlorians are simply the symbiont that conveys the will of the Force to those who are Force-sensitive.)"라고 설명한다. 공생자가 전달하는 포스란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선과 악의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정신적 우주적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힘인 것 같다.

서로 다른 길을 가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 상생의 길을 찾듯이 극적인 것들의 어우러짐은 21세기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주요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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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9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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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면 우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것이 중도에 책을 덮어버리거나, 심한 경우 던져버리거나 하는 과격한 행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임을 먼저 말해두고 싶다. 논리적인 줄거리 전개, 이따위 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훌훌 털어버리고 그냥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들 그 자체를 즐긴다면, 새벽녘에 미친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도 그다지 한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저 드넓은 미지의 우주에는 과연 우리 아닌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보통 영화 같은데서 보면 우리보다 지적으로 월등한 생명체들이 지구를 우호적으로 혹은 공격적으로 방문하곤 하는데, 아직 그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무한한 우주에 덩그마니 놓인 지구가 어쩐지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존재치 않는다는 논리는 세상 재미없게 살아가는 사람들더러 고민하라 하고,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우주를 향해 깨끗하고 흰 수건 한장 들고 엄지 손가락을 바짝 치켜 들련다. 

 책이 워낙 두텁고 길다 보니 여러 가지 감상이 드는데, 마구마구 웃다가 울게 만드는 한편의 로맨틱 코미디 SF 영화를 보는 듯하다. 황당무계한 이야기 같지만 천체 물리학 비스무리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할 때도 있고, 시간 개념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 능력도 더러 필요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간혹 신경질이 나기도 하고, 지루해서 하품이 나기도 하고,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다가도, 사라지고 난 뒤에서야 느끼게 되는 그 사라진 것에 대한 소중함이 아련히 울려 온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명시되어 있는 지구에 관한 설명에서, 주목할 것은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다"라는 부분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 여성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멋지고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는지를 알게"되는 순간 지구는 사라진다. 아직 마지막 권을 남겨두고 있는데, '42'라는 답에 대한 질문이 저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가끔은 나도 사람이 제법 많은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큰 소리로 흥얼대는 파렴치한(?)이 되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최근 그런 사람을 자주 봐서 그런가. 오늘은 중년의 한 아줌마가 MP3 이어폰 밖으로 흘러나오는 '빗속의 여인'을 엉덩이까지 덩실거리며 부르시던데. 반대편 승강장에서 한 아저씨는 박수를 쳐대며 앵콜을 외치고,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쭐이 났다. 남의 이목 신경쓰지 않고 음악에 심취해 음정박자 다 틀린 멜로디를 흥얼대던 아줌마. 때아닌 리사이틀에 앵콜까지 받았으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기분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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