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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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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기억들이 또렷이 떠오르는 걸 발견한다. 나는 제법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네 살 적에 있었던 일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기억들. 명절이면 친구들과 한복을 입으며 강강술래를 하던 일. 보름날이면 친구들과 모여 나물과 밥을 비벼 먹던 일. 그리고 고민 있을때마다 꾸던 꿈에서 나오던 내가 살았던 시골길. 그 길을 걷던 나. 잊혀질 만도 한데 마치 그림을 펼쳐놓은 것처럼 그대로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기억속에 남아있다.

 

  사십이 넘은 지금. 이십대, 삼십대에서는 정신없이 삶을 사느라 현재의 시간을 중요시하고 미래의 시간만을 위해 살았던 것도 같다.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탓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 사십대의 나이에 적응을 하다보니 이제 삶의 여유가 생겼다. 다른 이를 위해 살기 보다는 나를 위해 살수 있는, 내 삶의 여유가 생겼다. 여기서 삶의 여유라는 건 경제적인 것보다는 마음의 여유라고 해야 더 옳다. 삶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의 나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사십대가 싫지만은 않다. 받아들이기 힘들기만 했던 사십대에도 나는 친구처럼 함께 하는 여유가 생겼다. 나이들어 좋은 점, 이런 것도 있구나 싶다.

 

  2014년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노벨문학상의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처음에 읽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난뒤 꽤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난 것이다. 『지평』이란 제목이다. '지평'하면 떠오르는 것은 평야의 끝, 지평선이 먼저 떠오른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러한 지평을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에서 미래를 이끌어주는 지평이라는 제목을 택했다. 짧다면 짧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이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의 자신도 있는 것. 희미해진 과거의 기억속의 사람이 문득 생각나는 것. 그 기억을 붙잡을 단어 하나, 사람의 이름 하나에도 반가움이 들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현재 60대를 살아가는 한 남자가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을지도 모를 기억의 파편들을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생각해본다. 머릿속에 떠올려보지만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버리고 만다. 검정 몰스킨 수첩을 옷 안주머니에 담고 다니며 메모를 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깜박거리며 떠올랐던 기억을 수첩을 찾아 메모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육십이 되어보지 못한 나는 상상이 안가지만, 지금의 나도 가끔씩 확연했던 누군가의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나오지 않을때의 느낌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91페이지) 

 

  기억을 잊는다는 것. 슬프다. 내가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잊혀진다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나의 기억을 잊는 일일 것이다. 보스망스가 수첩속에서 발견한 이름, 메로베. 이 사람이 누구일까, 아무리 기억속을 더듬어봐도 누군가의 성인지 이름인지 헷갈리기만 했다. 하지만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보스망스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젊음의 짧은 시간을 함께 했던 마르가레트 르 코즈와 함께 사무실을 썼던 남자였다. 이제 마르가레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리의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났던 여자였다. 마르가레트는 어떤 사연인지 몰라도 한 남자를 만나게 될까봐 두려워했고, 보스망스 또한 폭력적인 어머니를 피해 도망치는 중이었다. 열등감과 두려움을 공존한 이들은 파리의 짧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가 기억하던 마르가레트와의 파리의 거리는 지금의 베를린의 거리와는 또다른 거리였다. 파리의 거리는 두려워하던 것들로부터의 피하고자 하는 거리, 미래를 꿈꾸었던 거리였다면,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은 과거의 기억, 기억속의 파편들을 생각하는 거리였다.

 

그래, 우리는, 마르가레트와 나는 끊임없이 밤기차를 탔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그 시절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혼란스러웠고,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무수한 짧은 장면드로 뚝뚝 끊겼다. (163페이지)

 

  이 부분을 읽는데 문득 스무살 시절에 밤기차를 탔던 일들이 생각난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탔던 밤기차. 창밖을 내다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까만 어둠만 가득했던 그때. 누군가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밤시간을 견뎠던 그때. 아마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혼자서 밤기차를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시간들이 너무 길게 느껴질 것이므로. 그때는 그 시간도 금방 흘러갔다. 마치 젊음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듯, 그때 밤기차를 탔던 그 시간들은 아주 짧았다. 보스망스가 마르가레트와 보냈던 파리에서의 짧은 시간을 사십 년이 지나서야 기억을 했듯.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마르가레트를 만날지도 모른다. 먼 훗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잃어버렸던 옛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었던 미래는 결국 오늘이 되어 돌아왔다. 비슷한 거리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한다. 이런 그의 소설이 좋은 건 비단 나뿐일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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