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자유 - 김인환 산문집
김인환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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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 한 권의 책을 공들여 천천히 읽는 것이 독서의 유일한 방법이다천천히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은 대부분의 경우에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일 것이다책은 우리가 시간을 들인 만큼 우리에게 무엇인가 알려준다.” (김인환타인의 자유』 27)

 

타인의 자유는 공들여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너무 어려우니까동학과 중세철학과학기술과 모던 팝릴케와 라캉이 하나로 묶인 책이라니. 75세 문학평론가의 배움의 과정을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여러 번 찢어졌다하지만 시간을 들여’ 끝까지 따라갔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으며 오랜만에 뿌듯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헤매며 읽었는데, 뿌듯함이라니. 묘한 기분으로 밑줄 친 문장들을 다시 읽는 동안 한 가지 열쇳말이 떠올랐다. 배움의 태도. 그 태도의 측면에서 책을 다시 읽었다. 전에는 두드러지지 않던 새로운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로자의 자본축적론도 읽어보았으나 나는 그녀의 경제 이론이 논리적인 체계에 있어서 다소 미흡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책을 이해하는 능력은 자기에게 필요한 책을 선택하는 능력 또는 맥락을 구성하는 능력과 다른 것이 아니다.”

누가 팔정도의 바야마와 육바라밀의 비르야가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법신-화신-보신의 구조를 하느님-부처님-얼사람의 구조로 풀어보고 싶다.”

상징과 사물이 얼크러져 만드는 공간을 나는 두루뭉수리라고 옮겨보았다.”

 

배움의 길에서 언제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던 저자가 나는의 얼굴을 하고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모를 땐 묻고 배우면 사용해보고, 이렇게도 풀어보고 저렇게도 옮겨보라고. 어떤 책의 의미는 다른 책과 맺는 관계 안에서 알 수 있다고. 공들여 천천히 읽고 시간을 들일 때만 알려준다는 무엇인가가 그제야 보이는 것 같았다.

 

한 권의 책을 정밀하게 읽어서 그것의 밑바닥에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은 책의 다양한 의미를 제한하게 된다의미는 책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들이 다른 책들과 맺는 무수한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책들과 책들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의 결을 파악하려면 깊이의 비전 대신에 옆으로 보는 비전을 따라가야 한다측면의 독서만이 맥락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

 

저 단락 속 의 자리에 철학’ ‘음악’ ‘사람등을 넣고 보니, 상관 없는 주제들이 한 데 묶였다 싶던 책의 인상이 달라졌다. 맥락을 구성하는 능력을 갖출 때, 배움은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 평생의 배움이란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유연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이 책은 11개 꼭지 내내 증명하고 있었다.

 

어려운 용어들에 지레 겁먹지만 않는다면, 공들여 천천히 읽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한다면 당신도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1946년에 태어나 검은 교복을 입은 채 신나게 색소폰을 불던 한 명의 고등학생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즐거운 배움의 길 위에서 좋은 길잡이이자 길벗이 되어 줄 솔직하고 유연한 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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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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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으며 기어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개운한 눈물이었다. 눈물이 나간 자리에 봄의 기운 같은 것이, 움트는 생명력 같은 것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시기에 덩달아 움츠러든 어깨를, 쪼그라든 마음을 쫙 펴고 싶게 하는 소란騷亂이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읽은 것이 아니라 내내 겪은듯한 독서였다. 흰 종이 위에 차분히 놓여 있던 글자들이 읽는 즉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생선이 톡 건드리면 팔딱 튀어 오르듯, 읽으며 만난 모든 이야기가, 그 속의 사물들이, 223쪽 내내 살아 움직였다. 자꾸 말을 걸고 얼굴을 들이밀고 손을 잡아끌었다. 좋았던 문장을 인용하는 일이 무색하게 모든 문장이 좋았다. 자주 책장을 덮었고, 사랑하는 이를 안듯 책을 끌어안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낯선 비유들. 공상의 전문가가 한참을 들여다본 단어와 풍경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후두둑 쏟아졌다. 손우물에 그것들을 담아 읽고 또 읽다 보면, 경험한 적 없는 세계를 감각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솔직함.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작가의 솔직함 앞에서 자주 시원했다. 나 역시 그렇게 시원하게, 수치스러움을 모르고, 일곱 살처럼 쓰고 싶었다는 것을, ‘부재’한 줄 알았던 욕구의 ‘존재’를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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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책’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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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일곱 살 때 안 힘들었어요?
정용준 지음, 고지연 그림 / 난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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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곱 살 아이를 만났다. 이름은 나나("나요, 나!" 하고 떼쓰는 듯한 이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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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으니 항상 늦잠을 자고, 바닥에 물을 자꾸 쏟고, 할 일이 너무 많다는 말을 달고 사는 데다, 비 오는 날엔 달리기를 하겠단다. 어서 자라고 하면 “아빠도 안 자잖아요”라고 하고, “아빠는 할 일이 많잖아”라고 하면 “나도 할 일 많아요. 너무너무 바빠요. 아빠는 말해도 몰라. 내가 해결해야 해”라고 받아친다. 일곱 살 꼬마가 대체 뭐가 바쁘다는 건지.

그런데 이 꼬마, 조금 재미있다. “그런 게 있어요”라면서 신기한 말을 툭툭 던진다. 예를 들면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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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쁜 기억을 바다에 던지지 못하겠어요. ... 나쁜 기억을 갖고 있으면 힘들어요. 답답하고 가슴이 콕콕 아프고 눈물도 나고... 그런데요, 그 기억은 좋은 기억도 함께 섞여 있어요. 그래서 힘들다가도 행복하고 눈물이 나다가도 웃음이 나와요. 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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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곱 살 아이가 저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고? 나쁜 기억을 바다에 던진다는 건 또 무슨 의미지? 철든 어른처럼 말한다싶더니. 저 녀석, 또 바닥에 물 쏟았네. 정말 귀찮다. 너란 아이.

소설가 정용준이 쓴 동화 <아빠는 일곱 살 때 안 힘들었어요?> 속 ‘나나’의 첫 인상은 딱 ‘미운 일곱 살’이었다. 착한데 말은 참 안 듣고, 자꾸만 사고를 치고, 밤마다 우는 동생 라라 때문에 늘 ‘피곤한 엄마’와 주문이 밀려 잠도 못 자고 일하는 ‘바쁜 아빠’에게 놀아달라며 자주 떼를 쓰니까. 그런데 이 미운 일곱 살이 나를 자꾸 데려갔다. 27살의 나, 17살의 나, 7살의 나로. 그러면서 던져버린 줄도 몰랐던 나쁜 기억들을 찬찬히 건져냈다. 꺼내고 보니 나나 말이 맞았다. 거기엔 정말, 좋은 기억도 함께 섞여 있었으니까.

조심성이 없어서 물을 쏟는 게 아니었다. 그건 ‘나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비밀열쇠, 물방울 비행기였다. “하트 모양 잎사귀를 가득 달고 있는 나무들과 솜사탕을 닮은 보라색 구름, 시원하게 쏟아지는 콜라 폭포와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강, 크고 작은 사탕 바위들과 뾰족뾰족한 밤송이처럼 그린 것 같은 노란 별들, 하얀 설탕이 깔린 사막과 젤리로 채워진 호수”가 나나의 나라였다. 나나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꿈속의 세상. 그 낯선 풍경을 보며 일곱 살 때 나의 나라,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상상했다. 분명 지나왔지만 생경한 그 시절, 내 전부였던 것들을.

일곱 살 나나의 나라에선 토끼도 스컹크도, 사슴도 기린도 모두 달리기 선수들이었다. 1등한 나나도, 간발의 차로 2등이 된 얼룩말도, 더 늦게 들어온 동물들도 모두 즐거운 나라. 다치지 않고 무사히 달리기를 마친 것이 커다란 기쁨인 나라. “좋아해!”를 다섯 번 더하면 ‘사랑해’의 뜻이 되고, 아빠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아빠를 사랑하면 그게 바로 ‘아름다운’ 것인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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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일곱 살’ 나나를 만나는 동안, 나는 이미 알고 있던 말들이, 너무 쉬워 뜻을 찾을 필요도 없는 그 말들이 자꾸만 낯설어졌다. 이를 테면, 나쁘다 좋다 기쁘다 슬프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슬프다 같은. 뱃속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열심히 일하다 힘들어 쉬는 한숨이 ‘방귀’라는 아빠의 말에 “그 아저씨는 정말 이상한 아저씨예요. 에휴-라고 해야지. 뽀옹이라고 한숨 쉬잖아요. 그리고 아저씨에게 칫솔 드려야겠어요. 입냄새 지독해”라고 말하며 배에 치카치카 양치질하는 이 아이 덕분에, 방귀 하늘 바다 파도 밤 별 낮 해 같은 말들을 어떻게 잘 소개할 수 있을까 신나게 고민했다.

생각할수록 정말 이상한 일곱 살 아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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