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촘스키와 푸코, 두 사람이 산을 오른다.
그 산의 이름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
촘스키는 날 때부터 타고난 '내재주의 언어론'을 재잘대며 뛰어가고,
푸코는 "규정된 건 없어. 뭐가 그리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정의할거야?" 중얼거리며
한 발 한 발 '권력 관계'의 규칙성을 찾으면서 걸어간다.
네덜란드 TV, 토론의 사회자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한다'고 서두에 소개한다.
지켜본 소감은?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산을 타고 있었던 것 같다.
촘스키 : 저의 관심사는 정신에 내재하는 특성이고, 반면에
푸코 씨는 사회적, 경제적, 기타 조건들의 특정 배열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합니다. - p.56
촘스키가 오르는 산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보편적인' 지형이 결정되어 있는 산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진행할 때 마다 부분적으로 밝아지는 지도처럼,
그는 '생래적' 지형의 존재를 의심치 않고 그 '심층구조'를 밝힐 수 있다며 겁없이 뛰어다닌다.
지식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사회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면서
언어이론과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거침없이 골고루 재잘거리며...
푸코가 오르는 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아무것도 '당연한 게 없다'.
상황, 사회, 역사, 제도, 계급 등 조건에 따라 지형도, 오르는 규칙도 변화 무쌍하다.
그는 그 속의 여러가지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이런저런 주제들의 법칙성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의 발 아래에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의된 '담론'들이 디딤돌처럼 한 발 한 발 솟아올라 놓여진다.
때로는 자신의 모습조차 불확실해지는 그 산을 오르면서 그는 화두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이 언어, 이 지식을 규제하는 권력 관계는 대체 뭐야?"
푸코 : 중요한 것은 사건들을 변별하고, 그 사건들이 속한 네트워크와 층위를 가려내고,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생산해내는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구조의 영역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 대신에
권력 관계의 계보, 전략적 발전, 전술의 측면 등을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대단한
랑그(langue: 모든 개인의 두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 체계)와
기호(랑그에 의해 가능해지는 각 개인의 구체적 언어 행위)모델이 아니라
전쟁과 전투 모델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품고 규정하는 역사는 전쟁의 형태를 취하지 랑그의 형태를 취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 관계이지 의미의 관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 p.190
그렇다면, 이걸 '같은 산'인 양 퉁쳐서 소개했던 그 사회자는?
아마 또 다른 언덕에서 이들 둘을 구경하고 있었겠지. ㅎㅎ;
잘은 모르지만 두 사람의 익숙한 이름과 '인간의 본성', '대중을 위한 TV토론' 같은 말에
홀딱 넘어가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내용을 접한 독자들은?
한번쯤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런 멘트를 떠올려 봤음직하다.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듀스, '우리는')
그들이 내뱉은 한숨들이 한겨울 중고책 되어 어딘가 쌓여있다는 슬픈 전설...
이해하기 어려워 더 많이 읽히기도 한다는 역설적인 독서계의 주인공들 아니시던가. ㅠ.ㅠ
촘스키 : 지배 이데올로기와 선전 체계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해방하려는 사람은, 조금만 노력하고 응용하면, 상당수 지식 분자들이 발전시킨
왜곡의 양상을 즉각 간파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만약 이런 분석이 잘 안 된다면 그것은 사회·정치적인 분석이 실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특정한 이권 계층을 옹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분석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지식인 계급이 우리에게 심어주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난해한 활동에 종사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립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사회과학도 그렇고 무엇보다 오늘날의 사건에 대한 분석에,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가설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고, 심오하고, 모호하다는 얘기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체제가 선전하는 환상일 뿐입니다. - p.97~98
생득론이 어떻게 활발한 정치적 참여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촘스키다운 발언이지만,
푸코와 촘스키가 당연한 듯 내뱉는 이야기들 그 자체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쉽게 이해할 것 같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상황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 ^;
그렇다고 얄팍한 두께에 동네 뒷동산쯤 만만하게 생각하고 성큼 발을 내디뎠다간
마주치는 생경한 언어와 개념들에 길을 잃고 헤메일 수 있는 산이라는 것도 조금은 안타까운 사실...
두 관점의 차이는 "옮긴이 후기"(p.263)를, 책 전체의 배경은 "서문"을 일단 먼저 챙겨 읽고,
가능하면 웹 서핑과 최소한의 사전 지식으로 기초 체력을 다진 다음
베이스캠프가 감 잡혔을 때 한 발씩 도전하면 '골라먹는 재미'를 조금씩 느껴볼 수 있는 것 같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와 자료를 한 권으로 묶어뒀기에, 언어/정치/권력/진리/정의 등
그들이 1970년대에 각기 다른 산을 오르며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주요 분야의 견해들을
생생한 인터뷰 형식을 통해 짚어보고 때로 비교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등산 코스의 장점.
푸코 : 당신의 질문은 제가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 어떤 맹목성, 어떤 귀먹음, 어떤 이데올로기가 나를 압제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정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경제 관계, 우리 행동의 규칙적 형태와 그 행동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권력 체계, 이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됩니다. 우리 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적 기능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치에 관심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제입니다. 그러니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일동 웃음을 터뜨리고 방청객도 웃음) - p.61~62
이민자 지지 데모중인 푸코와 사르트르 (1972)
인터뷰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곁다리들...
▶ 유전, 선험, 관념론, 인지, 정신, 생득주의... 이것은 촘스키?
▶ 양육, 경험, 경험론, 구조, 조건, 구조주의... 이것은 푸코?
엄밀히 말해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이런 개념들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이 건드려놓은 관점과 논쟁들에 한 다리씩 연결 가능한 개념들 되시겠다.
푸코는 "저는 구조주의자 아니거든요?" 라며 꼬장꼬장 의미의 재해석을 요구할 듯 하지만. ㅎㅎ
여기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행동주의, 인지주의, 구성주의 같은 것도 슬쩍 한 다리...
그렇다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여 반대 입장을 내놓았던 것은 아니니 재미있는 일이다.
푸코와 촘스키의 견해는 '다른' 것이지 엄밀히 말해 '반대'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책이 두 사람을 엮어놓긴 했지만, 그들이 돌아다닌 山은 서로 다른 산이라니깐... )
어쩌면 힌두교와 불교의 관점까지 대비되어 떠오르기도 한다.
생득적인 '아트만-브라흐만' 내지 '푸루샤-프라크리티' 시스템의 힌두교는 촘스키와 뭔가 이야기가 통할 것 같고,
모든 것은 서로 조건지어 발생할 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는 없다고 하는 '연기론'의 불교는
어쩐지 푸코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연히 촘스키/푸코의 구체적인 사상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느껴지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유사성이 엿보이는 이상의 관점들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내 인류의 관심을 끌어왔다는 것,
현실세계를 설명하고 집단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도구로까지 사용되어 왔다는 점은
푸코나 촘스키의 이야기에서 선뜻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을 접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던 사실.
어쩌면 한갖 '관점'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들의 생각이 언어, 정의, 정치로까지 개념이 확장되어
그들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일련의 학문적/사상적 흐름을 이끌어내면서
사회적/정치적 활동으로까지 체계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던 쉽지 않은 독서를 통해 얻게 된 또 다른 뿌듯함이랄까...
그런데, 이처럼 현란한 언어와 관점으로 짜여진 남의 산을 헤메이다 얼핏 드는 생각은
왜 내가 남들의 그 산을 애초부터 '명산'이라 열광하며 오르려고 애쓰는지,
이렇게 발 디디고 서 있는 내 산은 대관절 어떤 것인지 더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지더라는 것.
P.S.
실제로 푸코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사상가로 분류되는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이 모두
불교와 선禪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로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게다.
(그러면, 푸코의 '권력'에 대한 설명은 불교의 어떤 개념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