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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ㅣ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만포르트, 에트르타] 1883, Monet,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무래도 19세기 후반 프랑스에는 '인상파의 神'이 강림을 하셨던 모양이다.
감상적인, 그러나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어딘가 들떠있는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
책을 펼쳤을 때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장면들과 함께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수다스런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바람과 햇빛,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매 순간 끊임없이 출렁대며 변화하는 바다의 표면, 그처럼 울렁이며 들떠있는 목소리라니.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와 어느정도 동일한 시공연속체를 공유했을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와 물을 즐겨 그린 그의 그림으로 <La Mer (라 메르; 바다)>의 한국판 표지와 삽화 일부를 장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번역자도 출판사도 두 사람의 작품 사이에서 유사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일까?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 …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 …
- 네이버 백과사전 :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中에서
모네의 화풍에 대한 설명이 미슐레가 묘사한 <라 메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흡사 '글로 그려낸 인상파 그림' 같은 느낌이다.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을 파악하여 직관적인 표현과 함께 주관적인 감각을 반영'하는 글쓰기 방식은 영락없는 19세기 인상파 회화의 그것이다. 바다와 관련된 온갖 생명들과 현상에 대한 설명들이 하나 하나의 붓자국이 되어 점묘법처럼 전체 그림을 형성해낸다. 묘사되는 대상의 윤곽선은 때로 불분명하지만, 자신만의 감상과 표현이 붓자국 처럼 뚜렷이 남아있다. 열띤 감정으로 글 전체에 '밝은색'을 구사하고, 생생한 묘사로 '자연의 빛'을 대신한다. 사실적인 묘사와 자유로운의 표현이 인상파 화가들의 '빛과 색의 진동'처럼 독특한 밝음과 깊이를 함께 만들어낸다. (아, 그런데 이 양반, 붓질이 너무 잦다...)
[에트르타, 일몰] 1883, Monet,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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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와 힘에서 모두 감탄할 이 짐승은 피는 뜨겁고 젖은 따뜻하며 선의에 넘친다. 오로지 생존 수단만 부족하다. 그 수단은 이 지구의 전체 규모와 무게에 불가피한 법칙도 고려하지 않았다. 거대한 뼈대로 받쳐진 거죽은 아름답다. 거대한 늑골은 가슴을 자유롭게 열리도록 할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땅에 올라와 바다에서 적을 피하자마자 곧바로 폐의 무게라는 적에 짓눌린다.
멋지게 10미터 높이로 뿜어올리는 물기둥과 분수구멍은 바로 유치하고 야성적인 기관이라는 표시이자 증거이다. 힘껏 공중으로 분수를 쏴 올리면서 그 '숨 가쁜 통풍기'(수플뢰르 에수플레'라고 고래의 한 종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오, 자연이여, 왜 나를 노예로 만드셨나이까?" (p.219;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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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물이 '무엇(what)'인지를 설명하기에 이 책은 참으로 부적절하다.
묘사하는 대상과 범위, 그리고 표현의 방식이 너무나 다양하고 폭이 넓기 때문이다. 바닷물 그 자체부터 그것이 품고 있거나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다채롭게 생동하고 요동친다. 작디작은 티끌과 미생물부터 사람과 파충류, 어류를 거쳐 고래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비와 파도와 폭풍과 달과 태양에 이르기까지, 서양과 동양의 여러가지 장소, 옛날부터 지금과 알 수 없는 시간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온갖 것들이 정신없이 득시글 거린다. 실제의 바다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더더욱 온갖 '묘사와 감상'들이 사실(fact)의 틈들을 메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고, 작가의 <라 메르>가 쓰여진 방식 또한 그러하다. <라 메르>가 '무엇(what)'을 다루고 있는지 설명하기보다는 '어떻게(how)' 어떤 문장으로 쓰여졌는지를 묘사하는 것이 합당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만약 제 3자에게 이 책을 설명하려면
(1) 상당히 많은 부분을 직접 '인용'하여 소개해주거나
(2) 글이 쓰여진 '방식'에 대해 추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만이 대체로 가능할 듯 싶다.
따라서 (그럴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 책의 내용을 사실(fact)의 측면에서 접근하려 한다면 작은 혼란을 맛보게 될 것이다. 1861년 출판이다. 과학적 사실 여부나 남성이 봐도 불편한 19세기 남성 우월주의적 표현 같은 것을 차치하고라도 작가는 이미 달빛에 취한 시인처럼,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사실과 감상과 추측과 창작을 뒤섞으며 자신만의 풍성한 이야기를 시작한 상태다. 무언가에 단단히 필(feel) 받은 것이다.
[벨일의 폭풍] 1886, Monet, 개인소장
<라 메르> 전체에 흘러넘치고 있는 이 열띤 감성과 같은 것의 정체는 어쩌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쥘 미슐레' 항목의 설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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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레는 〈프랑스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 르네상스부터 대혁명 직전까지의 제2부(11권, 1855~67)를 완성했다. 불행히도 그는 성직자와 국왕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문서를 성급하게, 마음대로 다루며 상징적 해석에 심취했기 때문에 이 책들은 내용이 왜곡되어 환각이나 악몽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왜곡은 마녀를 신에게서 버림받은 영혼이며 교회의 반(反)자연적인 금지령에 희생이 된 것으로 보고 마녀에 대한 변론을 전개하고 있는 책 〈마녀 La Sorcière〉(1862)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뒤 더욱 새롭고 행복한 영감에 사로잡혀 〈새 L'Oiseau〉(1856)·〈곤충 L'Insecte〉(1858)·〈바다 La Mer〉(1861)·〈산 La Montagne〉(1868) 등 자연에 관한 몇 권의 책을 펴냈다. 이 책들은 1849년 자신보다 30세 어린 아테나이 미알라레와의 재혼에서 자극받아 쓴 서정적인 작품으로, 최상의 산문작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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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국어를 구사하면서 석박사 학위를 4개나 가지고 있던 프랑스계 캐나다 교수 한 분이 떠오른다. 그가 영어에 프랑스어와 다국적 유머를 섞어가며 신나게 이야기 할 때면 남자도 저렇게 수다스러울 수 있구나 감탄(?)하곤 했다. 때론 너무 현란한 표현과 제스처에 질릴 때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 분을 자주 떠올렸다. 당신 같은 분이 19세기 프랑스에도 계셨던가 봐요 라고. (아, 그러고보니 그분에게도 거의 띠동갑의 젊은 아내가 있었더랬지. 그것 참...)
[Coming into Port-Goulphar, 벨일] 1886, Monet, 개인소장
무엇보다 번역자와 출판사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원래 미슐레의 문장 자체가 그렇다고 들었지만, 우리말로라도 흔하게 접할 수 없는 현란하고 감수성 풍부한 표현들은 새로 글을 창작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클로드 모네의 표지 그림을 비롯하여 원서에도 없었다는 저자 당대의 삽화들을 골라 넣으면서까지 쥘 미슐레의 유명한 '바다(La Mer)'를 새롭게 되살려 내었다. (외국의 다른 표지에 비해서도 한글판이 본문의 실제 느낌을 잘 반영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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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라는 큰 세계의 일은 현실적이다. 바로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다. 사랑은 그 밤을 풍요롭게 채운다. 사랑은 깊은 곳으로 잠수하고, 가장 작은 생물에게서 더욱 넘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정말 원소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것을 붙잡아 보면, 여전히 사랑하면서 또 다른 개체로 분리된다. 생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어떤 유기적 기관도 없는 그런 것에서, 이미 모든 생식 형태가 완전하다.
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 (p.103: 풍요로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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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출간이 거듭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펴 보기 전까지는 이런 느낌의 책일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설도 아니면서 이처럼 페이지마다 숱한 묘사와 감상이 출렁이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산문과 운문, 사실과 허구를 현란하게 뒤섞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뚜렷이 갈릴 수 있는 독특한 표현들. 불확실함, 감흥의 과잉, 근대 유럽의 정신, 기이하게 들떠있는 열정, 다양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특이한 묘사의 호흡... 이런 온갖 것들이 뒤엉켜 형성해낸, 여전히 책을 열면 와르르 쏟아질 듯 출렁이는 무엇.
<라 메르>는 그 자체가 말들로 넘실대는 수사적 표현의 '바다(La mer)'이다.
이 책은 정말로 바다의 그 무언가를 기묘하게 닮아있다.
[벨일 해안의 폭풍] 1886, Monet, 오르세 미술관
P.S.
웹서핑을 해봤지만 이 책 표지에 사용된 클로드 모네의 원작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책날개에 1886년작 <벨일 해안의 폭풍>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검색으로 발견되는 그런 이름의 작품은 바로 위의 그림뿐이고, Belle-ile 이나 Monet, Tempete 등으로 연관 검색을 해보아도 표지의 바다 일부를 담고있는 그림은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은 개인 소장가의 희귀본 같은 것일까 못내 궁금하다. 덕분에 130여점 모네 그림을 실컷 감상하여 눈이 호사한 하루.
P.S. 주의 : 배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