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하시는 분을 만났더니 한번 봐달라며 교정 중인 원고를 건넨다.
어린이용 과학책이라는데, 번역된 내용에서 이해가 안되는 내용을 설명 좀 해달라신다.
애들 책이라갈래 만만하게 보고 "뭔데요?" 재미삼아 넘겨봤다가 깜짝 놀랐다.
일단, 수식이 없어서 그렇지 내용과 용어는 거의 중고교 과정이라는 것. (와우~)
그리고 딴건 몰라도 명색이 '과학책'이니
기본용어나 핵심개념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 분 말씀대로 한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애매한 문장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왔다.
끊어읽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중의적인 표현들도 있었고,
학창시절 애 좀 먹은 과학 개념 몇 가지는 명백한 오류로 보였다.
원서를 보여달라고 해서 대조해 보니, 그 분의 과학지식이 짧아서가 결코 아니었다.
원서에는 분명히 해당 개념에 꼭 필요한 '가정'과 '조건'이 서술되어 있었는데,
어린이책이라서 쉽게 옮겨 쓰려고 그랬는지(?) 의미가 훼손되는 무리한 축약들이 보였다.
역접으로 연결되어 반대 의미를 가지는 앞 뒤 문장을
순접으로 연결시켜 두루뭉술하게 풀어낸 것도 있으니, 아무리 읽어봐도 이상할 밖에...
여기에 1교, 2교를 거치면서 어린이용으로 다듬어 놓은 이쁘기만 한 말투들...
복문에서 엉뚱한 부분을 끊어 해석을 하다보니, 동사와 주어의 연결이 잘못되어서
실제의 과학 지식과 완전히 반대 의미로(!!!) 해석된 것도 있었다.
"이거 번역한 사람, 최소한 이공계 아니죠? 이건 좀 너무하네..."
"어? 아냐.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데. 보자..."
어라,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검색해보니 과연, 과학책 번역도 많이 했고 직접 쓴 책도 있는 사람.
게다가 그쪽 분야에 해외 박사까지 갖고있는 자그마치 '교수님'이었다.
누가 번역했는지 알고나니 더 어이없는 그런 상황.
과학 전문 번역가라니 감히 '지나가던 사람3' 따위가 뭐라 입댈 상황이 아니었지만
박사학위 받았다는 바로 그 챕터에 엉터리 개념이 나와 있는건 도대체 어쩔거냐구~
"설마...? 이 분이 과학책을 얼마나 많이 번역했는데...
애들 책이니 쉽게 쓴거지 그런건 아닐거야. 너, 잘못 알고 있는거 아냐? "
네, 네...? '애들 책' 이란 말이 속에서 탁 걸려
같이 원서를 펼쳐놓고 해당 용어를 인터넷 검색해서 확인해 보았다.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과학법칙의 특성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어, 이거 진짜 이상하네. 이러면 완전히 다른 뜻인데?
주어 동사도 잘못 끊어서 번역한 거 맞네... "
갑자기 띠리리 띠리리~ 바쁘게 전화가 오간다.
그런데, 출판사 윗선에서도 반응은 똑같다.
"누가 그런 소리해? 잘못 알았겠지. 그 교수님 몰라?
뭐? 그 친군 뭐하는 사람인데? " (제 전공과 경력은 왜? -_-;)
"아뇨. 제가 이해력이 부족해 그런줄 알았는데, 이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전문가의 이름값이란.. 사실확인 전에 사람 여럿 바보로 만들고 시작한다.)
'그 분'의 명성과 vs. '상식적인 영어 해석' 사이에 또 한번 뜨거운 공방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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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윗선에도 원고를 보여 줘야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엉터리 번역/감수가 맞더라도 역자에게 대놓고 항의하진 못할거라 하면서.
왜냐하면, 그 정도 '유명한 역자'를 내걸어야 책이 팔린다니까.. ㅡ_ㅡ;
책장에 꽂혀있는 그 분의 교양과학 서적을 떠올리니 기분이 착잡했다.
누구한테 대신 맡긴걸까? 정말 감수를 한 건가? 그렇다면 예전의 책들도...?
아이들 책이면 어른들이 읽는 책보다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의 뉘앙스, 선이나 색깔의 직관적인 느낌까지 비판적 해석 없이 무조건 흡수하는게 아이들 아닌가.
설령 어려운 내용을 풀어 썼다면, 원래 개념을 훼손할 정도로 생략만 할게 아니라
더 쉬운 단어를 골라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신경을 썼어야 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왜 강조해야... -_-;)
교수들이 대학원생, 학부생을 동원해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유명한 작가들도 아랫사람들 시켜 이것저것 한다는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전문가가 자기 이름을 팔아 분명히 '번역'과 '감수'까지 거쳤다는 원고의 꼬라지가 (쏘리;)
그 모양이라는걸 두 눈으로 확인하니 절로 한숨이 흘러 나왔다.
뼈대부터 잘못되었는데 거기에 살만 자꾸 떼었다 붙였다 하면 무슨 물건이 될런지...
남의 일이지만 알고나니 걱정이 된다. 저 책 나오면 꼭 받아서 살펴보리라 다짐한다. (으드득..)
그리고 궁금하다.
보고를 받은 '윗선'은 과연 어떻게 처신할까?
상식적인 영어해석과 네이버 검색만으로도 뽀록나는 명백한 오류 앞에서
이미 막대한 비용을 지급한 '과학 전문 번역가'님께 제대로 항의하고 수정을 요청 했을까?
아니면, 당장 그 분의 이름 석 자가 필요하니 2교, 3교만 닥달하면서 그냥 이대로 진행할까..?
주말에 다시 연락을 드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