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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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이론에 기댄 Hendrix의 '冊論'

세상에는 겁대가리 없이 분류해 보자면, 5가지의 책이 있다.

1. 계속 읽을 책들

이런 책에는 함부로 줄을 긋지 않는 편이 좋다. 왜냐면, 계속 읽어가면서 머리 속에 그 구도 자체를 찬찬히 각인시키는 근육의 독서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넘지 못할 책들은, 천천히 '자근 자근 씹어주면서' 읽어줄 필요가 있겠다. 게다가 여러번 읽어야 하니,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지만, 덕택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 하겠다.

2. 요약해가면서 정리해가면서 읽을 책들

이런 책은 일단 한번 주욱 보고선, 한번 더 읽을 때, 옆줄(!)을 긋고 독서 노트 한권을 정리해가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정리된 바를 머리속에 갈무리 해가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는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3. 지식을 쌓기 위해서 읽는 책들

이런 책들은 한번 읽고선, 다시 뒤척여가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을, 독서 카드 등에 기록할 수 있는 책들이다. 계속 볼 필요는 없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할 것. 대신 처음 읽을 때 통독을 하고, 다음 번부터는 필요한 부분을 독서 카드를 통해서 읽으면 된다. 논문을 쓰기 위해서 읽는 자료들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다.

4. 한 번 죽 읽으면 되는 책들

가벼운 맘으로 읽으면 되는 책들이다. 그냥 읽고나서 인상만 남으면 되는 그런 책들은 이렇게 읽으면 된다. 대신 책값은 노래방이나 비디오방에서 노는 대신으로 지불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노래방은 한시간에 15000원이지만, 4시간정도를 10000원 정도에 해결할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진 않은 휴식법이라 할 수 있겠다.
 

5. 읽다가 찢어야 할 책들

책으로 느껴지지 않는 책은 읽다가 과감하게 찢어도 된다. 다만 그런 '찢는 행위'를 저지르는 판단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확고하게 그런 판단이 섰다면, 그런 책은, 찢던지 라면 받침으로 쓰면 된다. 확고한 판단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다.

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건 바로 이 분류들이 강유원이 말하는 책의 분류에 기인해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나에게 강유원은 지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강유원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이윤기가 번역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오역을 지적하면서 부터였다.

그 전까지 홉스, 로크 연구자이자 회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몇 몇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철저한 독서에서 비롯된

그런 오역의 지적과, 곧바로 이어진 이윤기의 개정판의 펴냄은 그를 꽤 많은 이들에게 알리게 했다.

요새 주로 들어가서 많은 도움을 받는 지식인들의 블로그가 있다면, 바로 우석훈의 블로그("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의 저자 : economos.egloos.com)와 강유원의 블로그(armarius.net)이다.

우석훈의 블로그가 최근의 어젠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한다면,

강유원의 블로그가 가진 매력은 바로 "튼튼한 토대"에서 나오는 글들이 많고, 항상 그것들이 많은 고민거리를 제공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의 책에 대한 평가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는 거다. 그 만큼 빽빽하고 치밀한 서평을 쓰기 때문이다. 

요근래는 여성의 흡연이나, '혼전순결'의 문제등이 거론되었는데, 인터넷 어느 게시판에서도 볼 수 없는 건강한 논의가 펼쳐졌었다.


그것 역시 armarius 커뮤니티의 '지적인' 신뢰성의 예라 할 수 있겠다.

'책과 세계'

사실 이 책은 그 전에 썼었던 "서양문명의 기반"을 연구하면서 나온 화두 하나에 대한 탐구이다. 그는 서양문명의 기반을 연구하기 위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오는 단상들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이다.

강유원식 스타일이란 그런 거다. 물론 내 규정이지만, 하나하나 차근차근 포기하지 않고 급하지 않고 무거운 책을 읽어내는 정성. 그리고 그것을 통한 사유. 그가 '방방' 떠다니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철퇴를 퍼붓는 데에도 이유는 있는 거다. '직관'적 철학에 대한 회의라고 할까?? (그런데 나는 이를테면 프랑스 철학을 더욱 더 단단하게 보강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의 스타일대로 추구하는 독서는 느리지만 사유의 깊이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고, 그는 통찰력의 확장을 얻어내고 있는 거다.

책과 세계. 무엇을 이야기하는 건가??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p.4)

이러한 토대에서 독서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 차라리 컨텍스트의 산물일지도 모를 텍스트들 스스로가 말하게 하고,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컨텍스트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p.5)

즉, 책 그 내용 자체로의 책과, 그 책과 조우한 세계, 그리고 그 책이 바꿔놓은 세계라는 3개의 축으로 볼 수 있는거다. 더 정확히는 헤겔적 정-반-합의 구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정(그 자체로의 책-텍스트) ----- 반(책과 조우한 세계-컨텍스트(맥락))

                                       ▽

                               합(책이 바꿔놓은 세계)

이러한 구도 안에서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들과 당대의 컨텍스트와 그 책들이 미친 파급력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컨텍스트(사회경제적 배경, 정치적 역학관계)를 제외하고 또 하나의 파급으로 "매체"를 언급한다.

마샬 맥루한을 연상시키는 논의(사실 이 부분도 여러가지 첨예한 논증들이 있으나 생략한다.)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논의들의 섞임에도 불과하고 그의 글을 쓰는 방식은 기민하고 늘어지지 않는다. 그게 그의 글의 장점이다.
 

예전에 강유원이 강의에서 했었던 말이 있는데,

"<<책과 세계>>의 '환상적 불멸성 : 신국'을 한번 보자. 글을 자세히 보면 뒷문장이 앞문장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독자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일관되게 다른 생각을 들지 않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강유원의 저술이 빛이 난다.
 

천천히 공부한 자가 한 마디를 할 때의 묵직함이 묻어나는 짧지만 강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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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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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매력적 파괴욕 

인간의 본성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나 뭔가를 한번쯤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사는 듯하다.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것들을 한 번쯤 부숴버리고 싶은 파괴욕.

이상하게 몸이 뒤틀리면서, 거북함을 느낄 때, 그 것들을 전복하고 싶은 욕구.

그런 파괴욕의 정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일 거다.

그렇기 때문에 명문화는 되어있지 않지만, 어떤 종교도 자살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고 금기시하는 것을 본다면, 자살은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 비추어 짐은 틀림없다.

한동안 자살 싸이트가 유행했었다. 아니 지금도 유행이다.

쉽게 편하게 아름답게 자살하는 법에 대한 연구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런 방법들로 실제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2007년의 대한민국의 자회상, 아니 어쩌면 전지구적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왜 자꾸 사람들은 자살에 집착하는가? 난 여기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따위의 사회학적 연구를 들먹거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난 그 탐미주의적인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거다.

그 극단에 서 있는 욕망의 정점. '자신을 파괴한다'...

죽음의 욕망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이 주어진 질서에 그대로 저항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내는 생성적 욕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생성을 이야기했던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곤 했다(예를 들면 들뢰즈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p.16)

주인공의 직업은 자살청부업자.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 자살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끝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p.17)

그는 자살을 도와주고 그것을 글로 쓰려한다.

"그 남자는 묘한 사람이었어. 그 남자와 이틀을 보내고 나서 나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게 됐더랬어. 나는 그 남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욕조에서 칼로 동맥을 긋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 이유? 아무것도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이유를 가지고 그러는 거 같지만 아냐. 어쩌면 그날의 퍼포먼스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십 년이 넘게 해오던 동안 난 내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몰라.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 그 남자를 만나서 나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알게 됐어."(pp.149-150)

삶에서 생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통해서 제공하려 한다.

그때 유디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 생기. 그녀는 나와 만난 후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를 띠고 있었다.(p.85)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p.85)

인생이 맘대로 되지 않으나, 끝끝내 자기를 자기 의지대로 끌고 가고 싶은 여자 유디트, 쳇바퀴처럼 도는 그냥 그런 저런 '작업'을 하는 예술가 미미. 그들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냥 "제멋대로 그런 거"일테고, 거기에서 어떤 '행복' 혹은 '활기'를 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생기'를 제공하는 방법은 죽음 뿐이다.

게다가 죽음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두 점의 빛은 마지막 희망 같은 거에요. 피로와 권태에 찌든 주름살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죠. 그런 희망은 삶을 향한 게 아니라 휴식을 위한 거에요."(p.71)

진정한 휴식(죽음)을 찾아주는 주인공...

그를 우리는 비난해야 하는가? 어떤 근거로?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거에요?" 사실상 그들의 인생은 사회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 아니었나??

갈때까지 밑바닥으로 기어간 막장인생의 유디트. '잘 벗고' '파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예술가로 불리는 미미.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고, 규정지어진 그들의 구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그들에게 제시해야하는거지?

물론 다른 길을 한 번 밟어나가면서 전혀다른 결과들이 생겨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나 구심력은 작용하게 마련이고, 쳇바퀴는 계속 굴러가기 마련이다. 김영하의 이 때의 감성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1996년)

나는 기억한다. 그 무렵 나는 스피드에 중독돼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몇 바퀴를 회전한 일도 있었고 서울 도심에선 함정단속을 벌이던 경찰차와 추격전을 벌인 일도 있었다. 또 앞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스템을 저주했고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를 찬양했다. 국가가 개인의 환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아니 사실은 국가가 하는 모든 일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모든 진영을 조소했으며 야당과 시민단체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선량한 시민으로 그 정체를 감추고 살고 있었다. 골초였고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마셨다 하면 며칠 동안 마셨다.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죽어도 좋다, 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그렇지만 자살을 결행할 만큼 독하지는 못했으므로 일종의 정치적 자살을 결심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이상한 소설들을 써대기 시작했다.(pp.219-220)


원색의 페인트를 흰 캔버스에 뿌려대는 느낌의 색감과, 금기를 차갑게 비웃으며 써대는 문체가 맘에 들었다. 특히 츄파춥스를 떠올릴 때의 아찔함이란...

극단적인 문화적 레디컬의 냉소가 깃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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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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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자본주의 남한에 찌들대로 찌들어 버린, 하지만 북의 명령에 거부할 수는 없는 남파간첩 기영,
80년대 주체사상을 익히고 혁명적으로 살려했으나, 삶에 치여서 어느새 그냥 그런 주부로 사는 마리
재주가 많으나, 한국사회의 모순이라는 것을 쉽게 몸으로 느끼고 사는 그들의 딸 현미
그리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연류되어있는 인물들..

하루만에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과연 털고 갈 수 있을텐가?? 만약,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단순히 가족이 엮여 있기에 때문 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양쪽의 체제 둘 다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일 거다.

북에 귀환을 하지 못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거기까지 생각할 틈은 없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그들이 예전에 벌인 북 고위 인사출신

탈북자들을 대하는 것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배신자의 척결에 얽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이미 그렇게 저렇게 여기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 버린, 생의 반절을 살아버린 그냥 그럭저럭한 가장.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루의 이야기가 한시간씩 한 챕터씩으로 펼쳐진다.

단순히 기영의 중심구도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리의 시점에서, 현미의 시점에서, 그리고 또 그들과 연류된 국정원 직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애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두사람의 남자와 동시의 관계를 갖는 아줌마의 이야기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는 친구의 악소문을 활용하는 중학생의 이야기나....

어쩌면, 우리의 삶의 복합체의 이야기다. 또 어떻게 본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꿈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결에 묻어있는 흠결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졌다. 아니, 세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지난 이십 년간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고(혹은 적절한 유혹을 받지 못했고), 구매자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엄청난 정보를 취급하지도 않았고, 위에서 지시하는 모든 일을 대체로 무난히 수행해왔다. 그런데도 그의 운명은 갑자기 그 방향을 틀어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파이든 다른 그 무엇이든, 실패한 남자가 된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그는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 실패한 남자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pp 345-346)

"어쩌면 이것이 시작일 것이다. 여기서 한 번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카프카의 인물들처럼 그 어떤 복잡한 폐쇄회로 속을 분주히, 그러나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자신에게는 절박한 비극이 타인에게는 우스꽝스런 희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계속 겪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이들은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처럼 자신의 행동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리라."(p.379)
 

기실 개개인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이 흘러갈 것 같은 세계, 어쩌면 반대로 세계는 반대로 가만히 있지만, 내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결론은, 허무하다. 그냥 그렇고 그런, 서로의 내면으로는 상처받았지만, 절대 인상을 구기고서 빈정상했다고 티내기에는 가혹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상을 피고 세상과 대해야만 겨우 살아남을 만큼 가혹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역사의 행위자들을 다면적으로 비추면서 그 갈등들을 끈적거리지 않게 서늘하게 비추는 소설이다.

"기영은 차분히 그들이 알려주는 것들을 들어 익혔다. 그러면서도 빈 강의실을 가득 채운 과장된 엄숙함 때문에 모든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한편의 소극처럼 느껴졌다. 이들이 정말 남한의 체제를 전복할 혁명적 전위들이란 말인가? 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들이? 이들이 그 극악하다는 안기부의 고문을 견뎌내고 폭압적 국가제도를 전복할 수 있단 말인가? 기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북에서 본 혁명가들은 오진우나 김일성처럼 모두 칠십줄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 어쨌든 기영은 이제 NL진영의 활동가가 된 셈이었다."(p.193)


혁명의 시대로 했던 때의 사람들을 한발짝 떨어져서 비추어주고, 그 시대가 허무하게 스러져버린 지금과 연결지을 수 있는 건 어쩌면, 기영이라는 인물만이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하고 지금도 겪지 못한, 후대의 사관만이 가능하겠지..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 결의 촉감을 나타내기에 소설은 역사책보다 어떨 때는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지도 모르겠다. 다분히 주관적으로. 하지만 역사 또한 역사가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가????

 내 선배들의 이야기와, 내 삼촌의 이야기와, 내 또래의 이야기가 묘하게 오버랩된 소설이다. 탐미적인 김영하를 봤다면, 이번에는 혁명의 시대를 겪은 김영하를 보는 기분이랄까??? 여전히 김영하는 유려한 문체와 탁탁 씹히는 질감의 어휘를 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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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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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추억? 

누구나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굉장히 그 추억의 강도나,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떤이에게 어린 시절이 엄마의 따뜻한 품과, 학교에서 선생님을 사모했던 일, 아름답게 사색하던 일의 추억을 만들어 낸다면,

또 다른 어떤이에게 어린 시절은 매일 싸움박질이 벌어지는 길거리, 선생에게 대들면서 대거리 했던 일, 중학교 때에 담배를 피우면서 불만들을 토로하던 일들로 기억되기도 한다.

순수 소설이나 시, 영화 대신 여럿이 모여서 집에서 보던 야동을 기념비적인 문학으로, 또 문화체험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감성을 지니느냐도 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 같다. 길거리 문화에 익숙해 지거나, 아니면 아파트 문화에서 자라거나 혹은 ...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상황과도 결부되는 데, 내가 85~6년도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87년에 대학을 입학했다면, 지금과는 사뭇다른 정서를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특정 국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상황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는 거다.

69

제목부터 음란하지 않은가? 1969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래도 sex 체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딱 이정도 감성으로 무라카미류는 소설을 전개한다.

68혁명이 문화적으로 전세계를 흔들고 청춘에게 많은 꿈들을 현실로 만들라고 강요하던 시기.

어떤 시절이었을까???

주인공 야자키(겐 - 무라카미 류)은 혁명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바리케이트 봉쇄를 말하고, 니체를 이야기하고, 비틀즈를 이야기하고, 트로츠키, 마오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건 떠들어 대는 멘트들에 불과하다. 사실 겐은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닌데다가, 제목정도 알고서 너무 떠들어 대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낄 정도니....

야마다는 실제로 책을 엄청나게 읽지만, 야자키저럼 질러대지는 못한다. 오히려 소심하게 뒤에서 주도면밀하게 실수하지 않게끔 조정을 할 뿐.

그들은 여러가지 혁명적인(?) 행동을 기획하고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이념에 경도되어서도 아니었고, 거창한 행동강령을 지닌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즐겁게, 그리고 '천사'를 꼬시기 위해서 였다.

한편으로 비판할 수 있다. 고작 그런 찌질한 이유로 그런 일들을 벌이는 것의 무모함에 대해서. 하지만, 다시 물어보자. 그 동기가 과연 무시할 만큼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나는 꽤 길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전공투운동, 맑스주의, 60년대 안보투쟁의 교훈, 카뮈의 부조리소설, 자살과 프리섹스, 나치즘, 스탈린, 천황제와 종교, 학도출진, 비틀스, 니힐리즘에서 이웃 이발소 주인의 권태와 퇴폐에 이르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 그렇습니다, 사실은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말입니다, 라고 나 스스로 말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pp.159-160)

"아뇨, 그냥 여학생 시선을 끌고 싶어서 했을 뿐이에요,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p.161)

사실 지금의 나야 그렇게 변호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가능했겠는가??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그들을 변화시킨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p.269)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스 시리즈나, 무라카미 류의 69.

유쾌하게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유쾌하게 비추어 댄다. 그들은 '유쾌하기' 때문에 '멋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전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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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예수
류상태 지음 / 삼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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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갈등

생각해보면 나에게 유년기의 대부분의 기억은 교회로 환원된다. 내 친구들의 대부분이 교회친구들이고, 내가 어떤 사유를 함에 있어서 항상 켕기고 걸리적 거리는 모든 부유물의 시작은 교회에서 배운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철모르는 자신감인지, 혹은 영성에서 오는 에너지였는 지는 모르겠으나, 찬양단의 리더를 한 적도 있고, 학생회에서 간부를 한 적도 있었다.

담배를 피울 때, 술을 마실 때 같은 개인의 취향을 결정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사고를 함에 있어서까지 내가 믿는다고 기록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끝끝내 따라붙어왔고, 또한 지금도 일정부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관이 나에게 어떤 가능성으로 다가왔고, 또한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희망을 주었는 지에 대해서 항상 갈등했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대학을 다니면서 시작한 고민은 아니다. 보통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20살이 넘어가면서 고민을 많이 한다는 데, 내 고민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었다. 교회생활이 생활의 전체였을 때조차도 고민은 멈추지 않고 튀어나왔고, 그건 지금에서 생각해 보건데, 당연한 것이었다. 생활세계에서 내가 배운 '기독교적 가치'들은 실제 나를 옥죄는 억압에 불과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해서 내가 신앙을 청산하려 하려 했던 건 아니다. 난 오로지 유연한 사고와 가치관을 갖고 싶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 사고방식은 언제나 말썽거리가 되어왔다.

이런 말썽은 나로 하여금 교회를 옮기게 만들었다. 유년기 전체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있는 母교회를 떠나서 유연하게 내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교회로 옮겼다. 하지만 전적으로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고,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렇다면 난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불편했는가?

일단 기독교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배타성이었고, 둘째 기독교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함이었고, 셋째 기독교인들의 이해하기 싫은 문화적인 보수성이었다.

매번 설교에서 나오는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말의 위선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그들은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세상에서 부유해서 천국열차티켓을 갖고 있는 '선민'으로서 떠 다니겠다는 이야기인가? 혹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표'를 강매하라는 이야기인가?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로??

혼자만의 공부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모든 기독교가 그런 것이었냐는 것(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해", 김진호 선생의 "반 신학의 미소" 등을 읽었다.)에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지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뿌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신학을 최소한의 수준에서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QT집 같은 쓰레기 같은 '프로파간다 모음집'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해야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 문제의식을 지우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독학으로 탐독한 적이 있었다. 절대자에 대해서 한정적인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끝끝내 남았다. 내가 접해왔던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신이 절대자라면, 그에게 어떠한 인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구약의 하나님 혹은 하느님은 분명 인격적인 신이다. 복수의 신이기도 하고, 또한 어떨 때는 유대 민족에게 환희를 주는 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절대자라면 그러한 방법으로 사유하면 안된다. 왜냐면, 절대자에게 '증오'가 있다면 또한 '사랑'이 있다면, 그건 결국 자신을 한정짓는 결계가 있다는 말이 되고 그건 절대자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은 유대인이 바라본 '신'에 대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그렇게 상대화시켜 놓지 않으면 결국 기독교라는 것은 '적'과 '아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네오콘의 논리가 전형적이다.). 믿는 선민들과 믿지 않는 악마의 자식들. 너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

그런 날 서있는 맹목적인 가치들이 무서웠다. '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만이 가능한, 또한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재단하는 판단만이 가능한 기독교. 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런 나에게 기독교가 원래 그런 종교라고 말한다면, 난 차라리 교회를 다닌다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류상태 - "당신들의 예수"

저자에게는 분노가 끓어넘친다.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제 글에서 분노가 묻어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제 안에 분노심이 들어 있다는 것, 또한 그것이 저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를 삭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 분노가 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한국 교회뿐 아니라 기독교가 태생적으로 지닌 독선과 배타를 폭로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pp.234-235)

그는 대광고 강의석 사건 이후 목사직을 내 던지고 야인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 와중에 새길교회에 머물기도 했었으나, 지금은 다시 야인이다.

야인으로 한발짝 물러나서 생각하는 사유는 맹렬하게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배타적인 신앙이 얼마나 폭력적인 지,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결과적으로 무서운 결론을 내는 지에 대해서 저자는 잘 보여준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떨고'라는 어느 스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자기가 믿고 섬기는 분의 머리 위에 어떻게 담뱃재를 떨 수 있는가.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말이며, 깨우침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열린 마음의 표현이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문구에 얽매이면, 그 말씀(문구) 너머에 있는 속 깊은 뜻을 놓칠 수 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뿐 아니라 그 분에게도 매이지 말며, 그분의 깨달음까지도 넘어서라는 말이 되겠다. 부처님마저도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 기독교인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예수님은 다르지 않은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본질상 신의 성품을 갖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기에 그분은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그분의 말씀이 담긴 성경 역시 한 점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이른바 성서무오류설인데, 성서를 그렇게 이해하는 한 기독교는 독선과 배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기독교와 견해를 달리하는 문화와 종교를 존중할 수 없고, 대화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채 끝없는 분쟁과 갈등을 양산하게 된다.(pp.67-68)

 공존하는 사유를 위해서 넘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 지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천국으로 인도받았다 생각하는 이들의 짓거리들을 생각해 보는 책이기도 하다. 십자군전쟁, 이라크 전쟁, 그리고 이랜드 사태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나갈 계획이 없다. 한 발도 뺄 생각이 없다.

 사유의 연속선상에 언제나, 또한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으로서의 기독교를 계속 생각할 계획이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 이제 그 100년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맹목적 신앙에서 유연한 통찰로. 배타적 신앙에서 상생의 상호배움으로.

 강원룡 목사님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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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직선 2007-11-29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교회 안에(그것도 작지 않은 교회) 있으면서 교회를 등질 생각은 아직 안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를 찾는 작업은 제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겠지만 제 이웃들과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감사합니다.

헨드릭스 2007-11-29 16:47   좋아요 0 | URL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하고싶은 걸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진보적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건지도요.. 하지만,, 뭔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게 많아서 다시 고민을 접곤 하죠. 이웃과 함께!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