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 다빈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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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라산 들녘에서 그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
   지난 5월 29일은 사진작가 故 김영갑 선생의 추모 4주기였다. 『김영갑 1957~2005』는 2006년 사진작가 김영갑의 추모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사진집이다. 그는 1982년 처음 발을 디딘 제주에 매혹돼 1985년부터는 아예 제주에 눌러 앉아 사진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그는 오로지 제주만 사진에 담았다. 그는 몸이 점점 굳어가는 루게릭 병에 걸려서도 오직 사진만 생각했다. 그가 그토록 사진에 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제주도 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꼭꼭 숨어 있는 속살을 엿보려면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을 보고 느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한라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 빼어날 수 없다. 한라산의 속살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하와이나 발리, 아니 지구상의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낙원임을 인정할 것이다. 
   제주도의 역사는 바람과 싸워온 투쟁의 역사이기에 눈물과 한숨의 역사이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주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태풍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한라산은 일년 내내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크고 작은 바람은 온갖 생명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사람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본문 中)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제주의 자연을 사진에 담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보이지 않는 바람을 담으려고 애썼다. 그는 제주하면 절대 바람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제주에 정착하기 전 그는 바람처럼 떠돌아 다녔고, 제주에 정착하면서 그 바람을 쫓아 다녔다. 그가 20여년 동안 바람을 쫓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에는 자연의 장엄하고 오묘한 풍경과 함께 바람이 담겨 있다. 그 바람은 때론 두 눈을 감고 얼굴에 맞닿는 감촉을 느껴보고 싶을 정도로 싱그럽기도 하고, 또 때론 무언가를 붙잡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거칠기도 하다.

   내가 한라산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 대신 웃는다.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벌써 다른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기에 한라산 자락에서 이렇게 세월을 허비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라산 들녘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본다. 고요와 적막, 평화로움... 첩첩산중이나 무인도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 평화로움과는 다르다. 이곳에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평화로움이 있다. 이에 홀린 나는 20대, 30대, 40대를 중산간 들녘을 지키고 있다. (본문 中)


   그는 무려 20여년을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들녘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가 와도 중산간에 섰고, 눈이 와도 중산간에 섰다. 물론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자신의 몸이 점점 굳어가도 중산간에 서서 한라산을 느꼈다. 중산간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곳에서 사진 작업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날씨가 궂은 날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은 이곳을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지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는 이곳에서 한라산을 오롯이 혼자서만 느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모습을 담기 위해서 말이다.

바람, 들녘, 오름, 구름... 자연의 경외감을 느껴보라!
   이 사진집에 실려 있는 파노라마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그토록 제주도만 담으려 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 시원한 바람이 보이고, 눈 앞이 탁 트이는 푸른 들녘도 보인다. 해질녘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친 햇살도 보이고, 천지가 하얗게 변한 곳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햇살도 보인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며칠동안 눈비를 맞으며 버틴 그가 아니면 절대 담아낼 수 없는 풍경들이다. 다른 이들은 궂은 날씨를 피해 자리를옮겼지만 그는 제주의 눈과 비, 바람을 알았기 때문에, 이 궂은 날씨가 지나고나면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고 아쉬움이 남았다면, 아직 두모악 갤러리에 다녀오지 못했다면, 두모악 갤러리를 다녀와서 그 여운을 떨치지 못했다면 꼭 한번 보길 권한다. 그가 담아내고자 했던 자연의 경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9-68. 『김영갑 1957~2005』2009/06/01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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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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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약 800㎞의 순례길로,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과거 카톨릭 교도들이 순례를 위해 걸었던 이 길은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 길을 직접 순례하며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순례자』를 펴내기도 했다. 하루 평균 25㎞씩 35일을 꼬박 걸어야 하는 이 험난한 길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17년째 직업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저자 김희경은 2008년 4월 11일,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첫발을 디딘다. 그녀는 34일동안 카미노를 걸으며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 이유를 찾는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떠난 마틴은 혼자가 되는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길을 나섰다고 했다.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휴가를 보내게 된 마농은 새해를 맞으며 카미노를 혼자 걷겠다고 결심했단다.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애런은 행복을 가로막는 마음속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카미노를 걷는 이유를 모르는게 아닐까. '살아 있는 동안 하고 싶은 일 100가지' 리스트 중에서 세번째로 꼽지만 사실은 하고 싶은 이유를 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하는게 아닐까.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저자가 만났던 마농처럼 겁이 많은 사람이다. 말과 사람이 익숙한 국내는 잘 돌아다녀도 다른 나라로 나가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책 속의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친다. 새로운 곳을 둘러본다는 설레임만 가득할 뿐 두려움 같은 것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하다. 과연 이 험난한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경계한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이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때론 차 한잔의 호의를 베풀기도 하고, 배낭 메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혼자이고 싶을 땐 멀찍이 떨어져서 걷다가도 혼자 걷기 힘들 때는 길동무가 돼주기도 한다. 또 노란 화살표를 따라 그저 걷기만 하기 때문에 갈림길에서 피곤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속도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신의 속도에 맞춰 걸으면 며칠 후면 또다시 마주치게 된다. 마농처럼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도전해 볼만한 순례길이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세상엔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누구도 갈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고 믿는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완벽해 보이는 운명을 흉내 내려 안달하지 않고 나 자신의 불완전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카미노를 걸었다고 해서, 어떤 대단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달라지진 않는다. 우리는 다만 변화하기로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 대개의 변화는 늘 느리게, 알아차리기 힘들게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속도였다. 내 속도에 맞지 않을 다른 지름길을 꿈꾸던 백일몽에서 빠져나와, 느리더라도 단단하게 한걸음씩 발을 내디뎌야 했다. (p300)  


   카미노처럼 그저 노란 화살표만 따라 걷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도 얼마나 편할까. 그러나 그저 걷기만 하는 카미노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제대로 준비를 했을까,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런 저런 이유로 걱정이 많다. 그러나 길 위에서 불쑥 만난 사람들을 통해 도움도 얻고 즐거움도 나눌 수 있다. 화살표가 없어 불안한 우리 인생도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기면 되지 않을까.

09-72.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2009/05/31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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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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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러스한 입담으로 미국 역사와 영어를 버무리다!
   사실 미국 역사는 여러 역사 가운데 내가 가장 재미없어하는 역사이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본격적으로 나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몇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와 비교하면 상당히 심심하다.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유명한 빌 브라이슨은 이 심심한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라는 부제처럼 빌 브라이슨은 한 권의 책을 통해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를 이야기한다. 메이플라워호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작하기 이전의 역사에서부터 나라를 세우고 의식주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물론이고 영화, 스포츠 등의 오락과 하늘을 날아서 우주를 개척하는 이야기까지 없는 이야기가 없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로 꼽히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낭독하는데 겨우 2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총 1093개의 특허 출원을 한 발명왕 에디슨은 다른 사람이 개발한 영사기에 그저 이름만 붙이고 가로챘다.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할리우드는 에디슨의 모션 픽쳐스 페이턴트 컴퍼니에 대항하기 위해 소규모 영화사들이 뭉쳐 만든 것으로, 사실 할리우드를 구성하고 영화 산업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대부분은 미국인이 아니었다. 빨간 옷의 산타 할아버지는 코카콜라 광고에서 빨간 옷을 입고 나오면서 굳어진 이미지다. 이처럼 빌 브라이슨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미국인조차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다.
   그는 미국의 역사를 다루면서 그로부터 생겨난 영어들도 짚고 있다. 영어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바뀌게 된 것들, 대륙을 발견하고 땅을 개척하면서 짓게 된 지명들, 새로운 것이 생겨서 만들게 된 어휘 등을 역사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제는 미국의 국기로 당당히 자리잡은 야구는 19세기 성장기를 거치면서 방대한 어휘를 생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미국 영어에 대해 말한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만든 어휘들이 세월이 흘러 문화가 바뀌면서 민감하게 받아지는 경우도 있다. 한 예로, 1993년 메릴랜드는 주 표어가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행동은 남자답게, 말은 여성스럽게(Fatti maschii, parole femine)'라는 표어를 '행동은 강하게, 말은 부드럽게'로 번역을 바꾸기도 했다. 그는 이런 어휘를 새롭게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합리성, 정당성에 대한 감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자질"(p628)이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는 그는 기자 겸 여행작가로 다방면에 걸친 지식으로 다양한 글을 써왔다. 그동안 미국 역사가 재미없다고 생각해왔거나 영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번 기회에 그와 함께 영어 산책을 한번 나서보라.

09-67.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2009/05/24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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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양장) - 故 김영갑 선생 2주기 추모 특별 애장판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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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故 김영갑 선생의 4주기를 맞이하며!
   제주를 담은 사진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제주에 매혹되어 20년 동안 오로지 제주만 카메라에 담았다. 때마침 돌아오는 5월 29일은 사진 작가 김영갑 선생의 4주기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제주를 왔다갔다하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제주에 매혹돼 1985년부터는 아예 제주에 눌러 앉았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그는 오로지 제주만 카메라에 담았고 사진만 생각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참 맘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의 주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는 오직 사진만 생각했다. 돈이 생기면 필름과 인화지를 먼저 구입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들판에서 고구마나 나무 뿌리라도 캐먹으면 됐고, 추운 겨울도 전기 장판 하나면 충분했다. 잘 곳이 없으면 홀로 외로이 지내는 노인들을 찾아가 잠시 의탁하면 됐다. 물론 웨딩 사진을 찍어주고 사진관을 운영한다면 충분히 생활고를 피할 수 있었지만,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제주를 모두 담으려면 그럴 수가 없었다. 
   또 그는 오로지 제주만 사진에 담았다. 사람들은 그가 제주 토박이가 아니기 때문에 제주에 매력을 느끼고, 제주 사람들이 찍는 사진과는 다른 느낌의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자신이 사진에 표현하고 싶은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진 한장을 찍기 위해 며칠은 물론이고 몇달, 몇년을 기다리곤 한다. 그런 기다림 끝에 여느 사람들은 잡지 못한 자연의 웅장한 변화와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우리는 늘 보며 생활하기 때문에 무심히 스쳐 지납니다. 그런데 육지 사람들은 관심 있게 바라보지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새롭게 바라보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사진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제가 뭍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눈에 익숙해진 풍경들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죠." (p128)

사진을 향한 순수한 열정, 그것만이 삶의 이유였다!
   사진 생각만 하면 배고픔도 추위도 몰랐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카메라 셔터조차 누를 수 없게 됐다. 뜬금없이 손이 떨렸고, 가만히 누워있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십만 명 중 한두 명 정도 발병한다는 루게릭 병으로 그의 몸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 오로지 사진만 생각했는데, 더이상 사진조차 찍을 수 없게 된 그. 처음에는 전국 곳곳을 다니며 치료를 받았던 그도 완치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만의 사진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폐교를 개조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힘든 몸으로 직접 만들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몸을 더 망칠까봐, 애써 만든 갤러리에 찾는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02년 문을 열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다녀갔다. 그러나 그는 투병 6년만인 2005년 5월 29일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두모악 갤러리에 고이 잠들었다. 그가 고이 잠든 갤러리는 이제는 제주에 가면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이 됐고, 사진을 향한 그의 순수한 열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삶이 아니다. 나에게 허락된 하루를 절망 속에서 허무하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쓰러지는 그날까지 하루를 희망으로 채워가자. 내일이 불안하다고 오늘마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하루하루를 희망과 설렘으로 살아가자. 또다시 오늘이 시작되면 새로운 하루에 몰입하는 것이다. (p194)


   그는 외롭고 고달픈 길을 오직 사진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걸었다. 나는 감히 그를 사진과 제주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처럼 열정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그는 미친 사람이다. 무언가에 미쳐보지 못한 사람은 그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울컥한다. 그의 고달픈 삶이 떠올라서, 그의 열정이 느껴져서 울컥한다. 그리고 움츠려있던 용기가 울컥 솟아난다. 자연은 여전히 변화하고 있는데, 더이상 그의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문학평론가 안성수는 그가 "범인(凡人)들의 카메라로는 접근 불가능한 자연의 황홀경을 담는 신기(神技)의 깨달음"(p250)을 얻어 "자연의 영적 신비를 누설하여 신의 노여움"(p253)을 사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의 사진과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안성수의 평에 공감이 간다.

   본다는 행위에도 육감이 동원되어야 한다. 만져보고 느껴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쳐다보고 난 후 종합적인 감동이어야 한다. 일출과 일몰 사진을 통해 내가 감상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둥근 해가 떠오르고 넘어가는 과정의 풍경뿐만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그 감동까지 함께 나누고 싶다. (p135)


   이 책은 그가 투병 중이던 2004년에 초판이 나왔으며, 2007년 그의 2주기를 맞이해 특별 애장판이 나왔다. 1부 '섬에 홀려 사진에 미쳐'는 그가 10여년 전에 써둔 글로 사진과 제주에서의 생활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2부 '조금은 더 머물러도 좋을 세상'은 그가 투병 중에 쓴 글들로 그가 병과 함께 갤러리를 만드는 과정이 담겨 있다.

09-65. 『그 섬에 내가 있었네』2009/05/21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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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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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우리 가족인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하곤 한다. 왜 하필 나인가? 왜 하필 우리 가족인가? 『어머니를 돌보며』의 저자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는 7년 동안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경험한다.
   열일곱 권의 책과 수많은 기고문, 평론을 쓴 미국의 유명한 작가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는 어머니가 넘어졌다는 전화를 받고 부모님께 달려간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킨슨 병에 걸려 치매 증상을 보였고, 아버지가 함께 있었지만 어머니를 돌봐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환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았고 언제 심장마비를 일으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본 어머니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환각 증상까지 보이는 어머니를 아버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부모님 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간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육십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에게도 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녹내장 진단을 받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를 돌봐야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큰 좌절을 느꼈을까. 특히 치매 같은 경우에는 끝을 알 수 없고 병의 기복도 심한 편이라 더욱 신경이 쓰이는 병이다. 그녀는 "차라리, 어머니 상태가 나빠지더라도 그대로 있어 주면 좋겠어요. 좋았다가 금방 나빠지고 하니까 정말 미치겠어요."(p89)라며 이모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더이상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노인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보낸다. 그렇게 그녀는 7년 동안 집과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함께했다.

   만일 당신이 지금 5년 전의 나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짐들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 세상이 뒤집혀 마구 흔들리는 것 같을 것이다. 중력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지구에서 당장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카펫을 붙들고 누워 있는 순간, 이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지금 삶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그것은 엄청나게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가? (p277)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7년 동안 어머니를 돌보면서 그녀는 마치 폐허더미에 아래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또 치매를 통해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성찰하기도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기억인가? 이성적인 능력인가? 의지인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p44) 그녀의 질문은 치매라는 병뿐만이 아니라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는 안락사 문제까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아직 경험도 없고 그것을 실감할만큼 나이를 먹지 않은 탓일까. 이런 이야기를 다룬 책들을 보면 '또 억지스런 감동을 만들었군'하며 곱지않은 시선으로 먼저 보게 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책에는 그런 억지스러움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 간 글이 마음에 든다.

09-64. 『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2009/05/1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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