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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다시 쓰는 『로빈슨 크루소』
1703년 봄, 런던을 떠난 셀커크는 항해 도중 해적들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들소 사냥꾼에게 팔려 3년간 들소를 잡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이 한 뱃사람 셀커크는 선장과의 불화 때문에 항해 도중 기착한 태평양의 마스아티에라 섬에 홀로 남게 된다. 그는 4년 4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1711년 10월 14일 영국 선박 '듀크호'를 만나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섬에 최초로 머물렀던 사람은 셀커크가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1680년, 어떤 배가 깜빡 잊고 떠나는 바람에 홀로 남게 된 모스키토라는 이름의 인디언이 3년 2개월 11일 만에 구출된 적이 있었다.
다니엘 디포는 셀커크의 경험담을 토대로 『로빈슨 크루소』를 탄생시켰다. 다니엘 디포는 보다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로빈슨 크루소를 암초에 부딪혀 난파한 배의 유일한 생존자로 만들었으며, 태평양이 아닌 카리브 해의 어느 섬으로 무대를 옮겼다. 또 섬에서의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체류기간을 28년 2개월 10일로 설정했으며, '프라이데이'라는 아주 순종적인 주변 인물을 등장시켰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미 고전으로 자리잡은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두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뒤집어서 "다시 쓰기"를 시작한다.
"내가 볼 때 1719년에 나온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는 극도로 충격적인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 소설에는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어 있어요. 그는 단순히 빈 그릇일 뿐이지요. 진리는 오로지 로빈슨의 입에서만 나옵니다. 그가 백인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도는 방드르디가 중요한 역할을, 아니 심지어 끝에 가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소설을 써보자는 데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의 제목을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디포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문제점은 모든 것이 회고적인 시각에서 처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섬에 혼자 던져진 로빈슨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는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과거의 영국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즉 그는 난파한 배의 표류물을 주워 모아 섬 안에 작은 영국 식민지를 또 하나 만들어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빈슨은 오직 과거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죠. 나는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로빈슨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소설,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느낌 때문에 그의 건설 사업이, 이를테면 내부로부터 잠식되어 붕괴해 버리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는 방드르디가 불쑥 나타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는 그런 소설을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지 상태 위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예술, 새로운 유희, 새로운 에로티즘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소설 속에서 방드르디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까닭입니다. 그는 미래를 열고 기획하며 로빈슨으로 하여금 과거의 재구성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Tournier, "Tournier face aux lyceens", Magazine litteraire, No. 226, 20~21쪽)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방드르디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이야기가 나누어진다.
난파를 당해 태평양의 끝에 있는 섬에 홀로 머물게 된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힘들게 '탈출호'를 만들지만 혼자서는 '탈출호'를 바다로 끌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절망한 로빈슨은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죽은 누이동생의 환영을 보게 되고,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을 차린 그는 섬을 '스페란차(희망)'라 부르며 원시 상태의 섬을 문명이 깃든 섬으로 재건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총독이라 칭하며 헌장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섬을 다스린다. 완전히 세계로부터 고립된 그는 '스페란차'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스페란차'와 결합해 '만드라고라'라고 하는 딸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타자'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이 고독한 섬에 드디어 '방드르디'라는 타자가 출현한다. '방드르디'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로빈슨 크루소를 주인으로 모시며,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금요일에 만났다는 이유로 '방드르디(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와 함께 탈출호를 타고 스페란차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이미 탈출호는 다 망가져 있었다.
처음 얼마동안 방드르디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프라이데이처럼 로빈슨 크루소를 주인처럼 잘 모셨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처럼 문명에 길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방드르디는 그동안 로빈슨 크루소가 일궈 놓은 문명의 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개를 구하기 위해 논에 물을 빼는가 하면, 염소들을 모두 풀어주고 로빈슨 크루소가 아껴둔 담배를 몰래 피다가 화약에 불이 붙어 폭발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로빈슨 크루소는 다시 문명의 섬을 가꾸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이 방드르디의 원시적인 생활을 배워간다.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자른 로빈슨 크루소는 점점 방드르디의 모습을 닮아간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로빈슨 크루소에서 방드르디로 넘어가게 된다.
어느날 '화이트버드호'가 스페란차에 출현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동안의 섬 생활을 정리하고 귀환하고자 한다. '화이트버드호'의 선장을 통해 자신이 섬에 표류한 지 28년 2개월 19일이 지났으며, 그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이미 문명과 멀어져버린 로빈슨 크루소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냥 스페란차에 남기로 결심을 한다. 하지만 방드르디는 몰래 섬을 떠났고, 화이트버드호의 어린 소년이 스페란차에 남는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 소년에게 '죄디(목요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배워왔듯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타자'를 원했다. 어느날 방드르디가 왔을 때 그는 방드르디를 세상의 모든 타자로 대하며,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로빈슨 크루소는 스스로가 문명인이라 생각하며 원시인을 길들이려 했지만, 새롭게 출현한 '화이트버드호'에게는 그 또한 방드르디와 마찬가지로 원시인이었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디포가 살았던 18세기에는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그리 큰 문명의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가 살았던 20세기에는 하루가 다르게 문명이 변화하고 있었다. 28년 2개월 만에 섬을 벗어난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새로운 문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페란차에 머물기로 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결말은 투르니에의 '뒤집어 쓰기'가 아니라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한 '바로 쓰기'가 아닐까.
<밑줄긋기>
존재하지(ex-siste) 않는 것이 고집한다(in-siste). 존재하려고 고집한다. (···)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나 자신의 확신은 그 확신에 반대하는 만인의 생각과 맞서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로빈슨의 시체의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p.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