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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인들의 익명성을 발견하다!
사물의 형상이 뚜렷하지 않을 걸 보면 비가 내리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손떨림 방지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찍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녀는 차들로 가득한 도로 위에 두 발을 모으고 서있다. 신호가 바뀌어서 횡단보도를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는 않지만 차들은 분명 엄청난 소리의 경적을 울려대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인가? 무슨 일이 있어서 도로 한가운데에 처연히 서 있는걸까? 보면 볼수록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표지다.
김영하 작가가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그동안 장편소설 『빛의 제국』, 『퀴즈쇼』 등을 읽으며 김영하표 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새로 발표한 작품이 소설집이라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원래 단편보다는 장편을 훨씬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여러 편의 장편소설에서 경쾌하고 빠른 전개로 현대인들의 감각을 사로 잡았던 그의 문체가 이번 소설집에서는 어떻게 발현됐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총 13편의 개성 넘치는 단편들로 구성돼 있으며, 각 단편들의 분량 또한 1장에서부터 일반적으로 우리가 단편이라 부르는 분량까지 아주 다양하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바로 남녀 간의 사랑 방식이다.
어느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회사까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다. 여느 때 같으면 그냥 뿌리쳤겠지만 수경은 그 남자의 사슴처럼 맑은 눈빛을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마주한 자리에서 남자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언급하며 자신을 「로봇」이라 소개한다. 수경은 '라고 치고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고, 남자를 로봇이라고 치고, 자신의 고향은 일본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준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빠지자 수경은 난생처름 원나잇스탠드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 이후로도 몇 번 그를 만나곤 했다. 어느날 그녀가 관계 도중 사랑한다고 외치자 잠든 그녀를 남겨두고 남자는 홀연히 사라진다. 이유는 '로봇'인 자신은 '로봇 3원칙'을 어길 수 없기 때문에 떠난다고 한다.
시간 강사인 한선은 예전 여자친구였던 수진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수진은 시원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수진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저 바쁘다며 나중에 연락한다고만 한다. 기다리다 지친 한선은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가고 잠시 이야기를 하자며 무작정 그녀를 차에 태운다. 그는 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를 향해 달려가고 그녀는 납치라며 온갖 액션을 취하며 그에게 돌아가자고 한다. 바닷가에 도착하고서야 입을 떼는 한선은 이게 바로 여행이라고 말한다.
'나'는 매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에 참여하기 위해 갔다가 3년 전에 그곳으로 이민을 간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그들은 1년에 한번씩 「밀회」를 갖게 되고, 헤어질 때마다 그녀는 늘 그게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 온 「마코토」를 짝사랑하는 '나'는 마토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지만 청순가련형의 라이벌에게 마코토를 보내야만 했다. 몇 년 뒤 우연히 일본에서 마코토를 만난 그녀는 일어나려는 그녀를 마코토가 잡아 당기는 줄 알고 그에게 키스를 하고 만다.
대형 백화점이 관할 구역인 형사 「조」는 시계 매장에서 근무하는 '정'을 좋아한다. 스스로를 타락한 형사라 여겼던 그는 시계 매장에서 명품 시계를 훔친 도둑을 따라가 수갑을 채우는 대신 장물인 명품 시계를 건네 받는다. 그리고는 그 시계를 평소 좋아했던 '정'의 집으로 보낸다. 출판평론가를 꿈꾸는 대학생 정독국은 「퀴즈쇼」에 나갔다가 중학교 동창인 '은이'를 만나게 된다. 어릴적 자신을 제외한 온가족을 연쇄살인으로 잃은 그녀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앞으로도 몇 십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아도 될만큼 풍족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혼자라는 공포를 늘 갖고 살아간다. 자신의 집으로 동국을 초대한 은이는 커다란 서재를 보여주며 자신과 함께 이 집에서 책도 읽고 인터넷도 하고 놀면서 지내자고 한다. 동국이 망설이자 그녀는 옷을 벗고 자신의 침실로 그를 이끈다.
그들의 사랑은 작가가 설치해 놓은 소설적 장치로 인해 덜 보편적으로 보이지만, 그 소설적 장치를 제외하고 나면 지금의 우리들이 시도하고 있는 사랑의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소설 속에서 언급했던 '원나잇스탠드'처럼 그들의 사랑은 즉흥적이고, 그 사랑에 다가가는 방식은 순수하지 않고 조금 삐뚤어져 있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우리는 더이상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할 수 없는 세대인걸까? (참고로 김영하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신비한 목소리 덕분에 가수가 됐지만 「악어」를 목격한 다음날 아침 목소리를 잃어버리자 사라져버린 가수, 평소 즐겨먹는 「아이스크림」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고 소비자센터에 신고하는 부부, 해변을 산책하다가 모래밭에 파묻힌 남자를 발견하고 백사장에서 촬영 중인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는 「바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커피숍에서 「오늘의 커피」를 마시다가 예전에 자신이 두들겨 패서 코뼈가 부러진 남자를 우연히 만나 그대로 얻어맞는 남자, 터미널에서 차비를 빌려달라는 여자에게 사진 한장을 찍고 그녀의 손바닥에 계좌번호를 적어주며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는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언제나 궁금증이 남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모르며, 처음부터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또 그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조차 모른다. 그저 궁금증을 자아내는 소설 속 이야기 같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을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점점 익명화 돼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흥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사랑도 바로 익명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어떤 이들은 대중문화와 가까운 그의 소설이 너무 가벼워서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 김영하의 뛰어난 감각이 아닐까 싶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우리가 가장 열광하고 있는 대중문화를 어찌 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10-083.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