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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평점 :
동일성의 지옥을 살고 있는 우리들, 당신은 어떻게 탈출하시겠습니까?
편혜영의 세 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는 2008년부터 2009년 사이에 발표한 8편의 단편을 모은 것으로, 그녀는 이 소설집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소설창작과 병행해 왔던 직장생활을 그만뒀다고 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가운데 두 편은 이미 다른 수상집을 통해 만나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표제작인 「저녁의 구애」는 『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으며, 「통조림 공장」은 『2010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단편이다. 한 문학상 심사위원은 문학상 후보로 자주 오르내린다는 것은 조만간 그 작가가 문학상을 수상할 조짐이라고 했고, 박민규 작가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했다. 아마도 편혜영도 그런 경우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로테스크' 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그녀처럼 '그로테스크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많지 않아서 '그로테스크'는 마치 그녀의 전유물처럼 보여진다.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서는 이 '그로테스크'를 어떻게 보여줄까?

표제작인 「저녁의 구애」는 화가 프리스 쉬베리의 동명의 그림을 보고난 뒤 쓴 작품이다. 화가 프리스 쉬베리는 누군가에게 구애를 한 뒤 이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 속 남자는 사람들과 함께 가고 있는 그녀를 머뭇거리다가 불러내 구애 또한 머뭇거리며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 속에서 구애를 하는 남자 '김'은 죽음을 앞둔 친구의 어르신 장례식장에 세워둘 화환을 가져다주는 길이었다. 오래전에 그 어르신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뵈어야 할 것 같지만, '김'은 내켜하지 않는다. 그는 장례식장 근처를 배회하며 어르신이 임종했다는 친구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다. '김'은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서 여자에 전화를 걸어 배달이 끝나면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약속을 한다. 하지만 자꾸 걸려오는 여자의 전화가 짜증이 났던지 전화에 대고 이별 통보를 하는데, 마침 그때 자신과 꼭 닮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과 꼭 닮은 트럭을 몰고 가던 그 남자는 코너를 돌면서 속도를 줄이지 못했는지 사선으로 기울더니 가드레일을 받고 넘어져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다. 그는 이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구애를 한다. 자신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2010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두고 박민규의 「아침의 문」과 치열하게 경쟁했던 「통조림 공장」은 섬뜩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통조림 공장 사람들은 유학간 자식에게 보낼 음식이나 간직하고 싶은 물건 등을 통조림으로 밀봉하고, 때론 프로포즈를 할 때도 통조림에 반지를 넣어 건넨다. 공장장은 아이가 기르던 강아지가 죽자 죽은 강아지를 통조림에 넣고 밀봉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던 공장장이 어느날 사라지자 공장장 대신 공장장이 된 '박'은 공장장이 머물던 사택에서, 그가 먹던 통조림을 먹으며 생활한다. 공장장의 방에서 나온 통조림은 포장과 내용물이 다를 때가 많았다. 고등어 통조림인가 싶으면 꽁치가 나오고, 꽁치 통조림인가 싶으면 깻잎이 나왔다. '박'은 통조림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른채 두려운 마음으로 통조림을 하나씩 하나씩 따서 먹는다. 어쩌면 그 통조림 속에서 사라진 공장장의 사체가 발견될지도.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무엇을 집을지 모른다"고. '박'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렇다. 겉보기에는 눈 코 입 붙어있는 모양은 같아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참, 「저녁의 구애」에는 어묵 통조림이 등장한다. 지인이 얼마전 지진 때문에 난리였던 도시에서 사온 것이라고 해서 '김'은 화환 배달 때문에 그 도시에 갔을 때 이 통조림을 사보려 했지만 그 도시에서는 그런 통조림을 판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 통조림은 이 「통조림 공장」에서 공장장이 만들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줬을지도 모른다.
'진'과 '서', 그리고 이제 막 백일이 된 아기는 「크림색 소파의 방」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가는 중이다. 이삿짐을 실은 차는 고속도로로, 아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는 '진'의 차는 국도로 달리고 있는데 와이퍼가 고장난다.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고장난 와이퍼로는 위험하다. 하지만 '진'은 지금까지 한번도 손수 차를 수리해 본적이 없다. 폐허가 된 주유소에서 술에 취한 청년들을 만난 그는, 호랑이 티셔츠를 입은 한 청년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의 대가를 지불한다. 그곳을 벗어나자 '진'은 멱살까지 잡히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것이 분했던지 그 청년들을 대마 흡연으로 경찰에 신고한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이번에는 차가 멈춰 서고 먼저 도착한 이삿짐 센터 직원은 어떻게 가구들을 배치할 것인지 쉴새없이 그에게 전화를 한다. '진'과 '서'가 크림색 소파를 선택한 이유는 이사갈 집을 보러 갔을 때 그 크림색 소파 위에서 아이들이 너무나도 편하게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크림색 소파는 너무 커서 이사갈 집 거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이야기는 점점 더 불안으로 몰고간다.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운영하던 구내 복사실을 이어받은 '그'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매일 「동일한 점심」을 먹으며, 매일 똑같은 시간에 퇴근한다. 하루쯤 어떤 사정에 의해서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들이 틀어질 수도 있는데 '그'는 그 반복된 일상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고 한다.
「토끼의 묘」에 등장하는 '그'도 마찬가지다. 선배 후임으로 다른 도시에 있는 지사에 파견 근무를 떠나게 된 그는 매일 똑같은 패턴으로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파견 근무가 끝나갈 즈음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들과 생활이 결국 자신을 추천했던 선배와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작가가 창작 생활과 병행해 왔던 직장 생활을 정리했다고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작가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꼈을 것이다. 「산책」 속 주인공이 직장 생활이나 아내와의 관계가 사용 설명서처럼 균일하게 돌아간다(p.126)고 한 것처럼 자신도 매일 똑같은 패턴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과 이미 그 시절을 먼저 지나간 이들과도 다를게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는 정체 불명의 자루를 D시의 B군 G읍에 있는 어떤 장소로 배달하는 업무를 맡은 두 남자 'K'와 'S'가 등장한다. 딱딱하면서도 물컹하고, 점점 이상한 냄새를 내뿜는 저 자루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상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다. 상사는 배달 심부름을 시키면서 'K'에게 관광버스 승차권'을 줬다. 승차 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티켓으로, 유사한 유형의 버스를 보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배달을 완료하고 복귀할 때 그 관광버스 승차권을 내밀고 관광버스에 올라탄다. 그 관광버스가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몰랐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결국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
잠깐이지만 사는 곳을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지사가 있는 작은 도시로 파견근무를 떠나게 된 '그'. 지사장의 어머니가 임대하고 있는 집을 계약한 '그'는 고민이다. 그 집에는 개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울만큼 커다란 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신한 아내는 개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 갇혀 있었으며 아내가 진통이 올 때마다 '그'는 조퇴를 하고 아내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결국 그는 개를 데리고 가까운 산으로 「산책」에 나선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보는 사람도 없자 그는 개에게 약이 묻은 고기를 먹이고 나무에 묶어 놓은채 산을 내려온다. 그 개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게다가 어둡기까지 해서 그는 산 속을 헤매게 되고 결국 어떤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그에게 달려드는 벌레를 죽이기 위해 라이터로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고, 정말 오랜만에 그 속에서 푹 잘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 충격적인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저녁의 구애」에서는 주인공을 꼭 닮은 한 남자가 화염에 휩싸였는데, 「산책」에서는 주인공 자신이 화염에 휩싸인다.
'그'는 감사 기간 동안 잠시 몸을 피해 중국으로 여행이나 다녀오라는 상사의 지시에 따라 중국에 와 있다. 늘 가이드가 따라 다녔지만 그날은 가이드와 다투고 혼자 중국 거리를 방황하게 됐는데, 그는 중국어라고는 전혀 모르며 자신이 묶고 있던 호텔의 주소 조차 몰랐다. 그래도 이곳 저곳 걸어다니다 보면 찾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이 골목 저 골목을 찾아 다니지만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 골목에서 결국 그는 길을 잃어버린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정글짐」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인간에게 지옥이다. (p.244)
평론가 김형중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동일성의 지옥'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매일 반복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하루쯤 틀어져도 아무 문제 없을텐데 「동일한 점심」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반복을 깨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 똑같기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리기는 더 쉽다. 만약 랜드마크나 특징있는 건물이 있었다면 「정글짐」의 주인공은 자신이 향하고 있는 길이 잘못된 곳이라는 걸 알았을테고, 목적지를 찾는 것도 좀 더 쉬웠을 것이다.
동일하다는 건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익숙함에서 안도 혹은 편안함을 느낄지는 몰라도 어쩌면 영원히 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가 글을 쓰는 것으로 그 동일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
2011/03/27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