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친구라면서 왜 죽게 내버려뒀니?
얼마전 중학생 때부터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한 고등학생이 유서를 써놓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서에는 학교 폭력을 없애 달라는 내용과 함께 그동안 숨진 학생을 괴롭혔던 학생들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숨진 학생이 학교 폭력에 시달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분명 숨진 학생은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때 절망할까? 아니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데,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때 절망할까?" (p.27)
이 사건이 떠올랐을 때, 정말 우연찮게도 이 사건과 비슷한 내용을 다룬 『십자가』를 읽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소설 속 이야기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쉽게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소설 『십자가』는 왕따에 시달리던 중학생 후지슌이 유서를 남겨 놓고 자살을 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 유서에는 친구 네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2명은 후지슌을 괴롭힌 친구, 1명은 후지슌의 절친, 나머지 1명은 후지슌이 짝사랑한 친구입니다.
"사나다 유. 나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유 짱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
미시마 다케히로, 네모토 신야. 영원히 용서 못 해. 끝까지 저주할 거야. 지옥으로 가라!
나카가와 사유리, 귀찮게 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 늘 행복하기를 바랄게." (p.12)
후지슌을 괴롭힌 친구이든 절친이든, 후지슌이 짝사랑한 친구이든 유서에 이름이 등장한 네 명은 후지슌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등에 짊어진 채, 그 이후의 인생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p.12)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중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친구는 누구일까요? 아주 간단하게 생각한다면 후지슌을 괴롭힌 친구들이 되겠죠. 하지만 절친이었던 사나다 유 또한 그 십자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친이라면서 후지슌이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때 그저 지켜보기만 했으니까요. 후지슌이 죽음을 결심할만큼 힘들어 했지만, 가장 친했던 사나다에게 조차 말할 수 없었고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지슌의 가족들은 사나다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나다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사실 초등학생 때까지는 꽤 친했지만 그 이후로는 친한 사이라고 말할 정도로 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유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유리는 생일 선물을 주고 싶다는 후지슌의 마음을 거절했고 후지슌이 죽은 날은 사유리에게 거절 당한 날, 바로 사유리의 생일이었습니다. 일방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들이 좋아한 친구라고 잘해줬던 후지슌의 어머니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너희는 평생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죽게 내버려둔 죄를 등에 지고 살아가는 수 밖에 없어." (p.56)
흔히 하는 이야기 중에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잊혀지고 퇴색되기 마련입니다. 왕따를 당하던 같은 반 친구의 자살이 당시에는 충격적이었을지 몰라도 학년이 바뀌고 졸업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 이내 잊혀지고 맙니다. 같은 반 친구들 뿐아니라 이 사건을 기사로 읽었던 사람들, 이 사건의 기사를 썼던 사람들까지 마찬가지기입니다. 하지만 사나다와 사유리는 20년이 지나도록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재판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것보다 더 오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후지슌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갈 때, 반대로 사나다는 후지슌과의 기억을 되새기며 기록을 하기 시작합니다. 기록을 하면서 사나다는 후지슌을 더 또렷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죄가 안 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는 법에 없으니까." (p.265)
이 책에는 소설을 읽은 어린 친구들이 남긴 감상평이 실려 있습니다. 이 친구들이 남긴 감상평처럼, 더 많은 친구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결국 학교 폭력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학교나 부모, 외부 단체들의 개입이 아닌 그들 스스로 느끼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사람을 비난하는 말에 두 가지가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은 혼다씨였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지.
당연히 굉장히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대로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야."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다르다고 했다.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p.74~75)
2013. 03. 17.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