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 되는 시간

 

예전처럼 주말마다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아요.

예전처럼 이파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어린 날에 모아둔 앨범들을 쌓아두고 밤새 음악을 주구장창 듣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밤을 새워 읽기에 빠져들지도 않아요.

예전처럼 늦은 밤의 현란한 네온사인을 올려다보며 친구들과 걷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나는 지내고 있어요.

무얼 하고 지내냐고 묻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밖에는 말할 없지만,

나는 지내고 있어요.

 

 김소연 『시옷의 세계 p.80 

 

 

 

이렇게도 지내고 있는 사람이 비단 그녀와 뿐이라고만 생각지 않아요.

아무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채도 지낼 있어요.

그러니 예의상 지내냐고 던지는 인사는 이제 하지 말아줘요.

더이상 대답할  있는게 없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파리의 선물 

 

금파리들의 세계에서는, 짝짓기하는 동안에 암컷이 수컷을 잡아 먹는다.

짝짓기의 격정이 암컷의 식욕을 불러일으키면서,

자기 옆에 있는 머리가 수컷의 머리일지라도 암컷에게는 그저 먹이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수컷은 교미는 하고 싶지만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싶지는 않다.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를테면, 타나토스 없는 에로스를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금파리의 수컷은 한 가지 책략을 찾아냈다.

먹이 한 조각을 <선물>로 가져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컷이 고기 조각을 하나 가져오면 암컷은 허기를 느낄 때 그것을 먹게 되고,

수컷은 아무런 위험 없이 교미를 할 수 있다.

이 파리들보다 훨씬 진화된 다른 집단에서는

수컷이 곤충 고기를 가져올 때 투명한 고치로 포장해서 가져온다. 

그러면 수컷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 수 있다.

 

또 어떤 수컷들은 선물의 질보다는 선물을 개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고,

포장된 먹이를 가져오되 두껍고 부피만 클 뿐 속은 텅 비어 있는 것을 가져온다.

암컷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이면 수컷은 이미 용무를 끝낸 뒤다.

 

수컷들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암컷들도 거기에 맞추어 자기들의 행동을 수정한다.

예컨대, 엠피스 속(屬)의 파리들의 경우에는,

암컷이 고치를 흔들어서 먹이가 들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또 대응책이 있다.

수컷은 암컷이 고치를 흔들어 볼 거라 예상하고, 선물 꾸러미에 제 똥을 담는다.

그것이 무게가 제법 나가기 때문에 암컷은 고깃덩어리로 잘못 알기가 십상이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p.314~315 ─

 

 

 

 

 

크리스마스에 뒤늦게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1회를 보고 있는데,

김수현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더라구요.

전지현이 하품을 폴폴 하며 듣던 그 강의,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은듯한 강의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봤더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 나온 것이더라구요.

어쩐지 곤충들의 세계를 참 맛깔나게 이야기한다고 했더니,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저씨의 작품이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사랑이 품고 있는 '함정'을 보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혹은 저 사랑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까? 하고 말이죠. 제 경우엔 부정적인 대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은 이 세상엔 별로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다면 기욤 뮈소의 10번째 소설 『내일』의 주인공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하버드대 철학교수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매튜. 학생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철학을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매튜의 강의를 좋아합니다. 게다가 깔끔하고 지적인 외모, 차분하고 묵직한 목소리, 매튜보다 더 대학교수라는 타이틀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것만 같은 이 사람, 그런데 직장과 달리 가정에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1년 전 심장 전문의였던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자 네 살 반짜리 딸을 혼자 키우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빚을 낸 주택대출금을 갚기 위해 3층에는 동성애자 세입자까지 들였습니다. 그런데도 낡은 노트북 하나 새 것으로 바꿀 여력이 안될 정도입니다.

   어느 날 그는 벼룩시장에서 중고 맥북을 하나 구입합니다. 분명 맥북을 판 주인은 포맷까지 했다고 하는데 중고 맥북에는 연인과 함께 찍은 여자의 사진과 이메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매너라는 걸 아는 매튜는 이전 주인의 이메일로 삭제하지 않은 사진이 아직 남아있다고 보냅니다.

  

   뉴욕의 한 식당에서 와인감정사로 일하는 엠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녀가 만나고 있는 남자는 유부남인데 아내와 정리를 하고 엠마에게 오겠다는 말만 벌써 몇 번째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질질 끌려 다녔는데,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엠마 앞으로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합니다. 자신이 구매한 맥북에서 사진을 발견했으니 보내주겠다는 이 남자, 하지만 엠마는 맥북을 판 적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엠마가 맥북 주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두 남녀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것도 이메일을 통해서, 게다가 두 남녀는 서로에게 끌리기까지 합니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서로에게 끌린 두 남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상대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합니다. 마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두 남녀처럼요. 물론 영화처럼 두 사람도 만나지 못합니다. 한껏 멋을 부리고 나갔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다니. 화가 난 상태로 서로에게 이메일을 보내는데, 상대는 또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오히려 큰소리입니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와 같은 이름의 식당이 또 있었던걸까요? 비밀은 바로 영화 《동감》입니다.

   두 사람은 분명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나지 못했던 이유는, 엠마는 2010년에 매튜는 2011년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년의 시간차를 뛰어 넘어 그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은 바로 노트북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1년 후에 엠마가 노트북을 판다는 것인데 무슨 일이 생긴걸까요? 매튜는 벼룩시장에서 노트북을 판 남자를 찾아가 물어봅니다. 아마도 이쯤은 다들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여름, 엠마가 자살로 죽자 엠마의 오빠가 부랴부랴 그녀의 물건을 정리한 것입니다.

   엠마가 이 사실을 믿게 하려고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 본 결과, 이미 매튜의 시간 속에서는 일어난 일이지만 엠마의 시간 속에서 바꿔버리면 매튜의 시간 속에서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때 매튜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직 아내가 죽기 전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엠마가 아내가 사고 현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한다면 아내를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난 당신과 내가 겪고 있는 시간의 뒤틀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지금 그런 일을 겪고 있는 당사자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굳이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시간 속에서 발을 헛디딘' 것이죠. 이제, 내게는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난 지금껏 그 어떤 인간도 잡지 못한 천운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바로 사랑의 부활이죠. 엠마,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 당신에게 케이트의 생사가 달려있어요. (p.178~179)

 

   일단, 줄거리 언급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초반에 진행되는 부분이라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고, 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이 정도는 시작이라고 여기시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두 가지 차원에서 소설을 씁니다. 첫 번째는 확실한 오락 차원입니다. 나는 독자들을 어떤 사건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하고 계속해서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매우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처럼 말이죠. 바로 이 부분이 내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측면일 겁니다. 두 번째는 주제의 차원으로, 나는 내 마음에 와 닿는, 내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주제들을 다룹니다. 이번 소설 『내일』에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커플의 모습과 속내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상대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오락적인 요소와 마음에 와 닿는 주제, 이 두가지 차원의 결합이 내 소설을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봅니다.

   나는 독자들에게 히치콕 식의 서스펜스, 곧 평범한 주인공들을 특별한 상황, 불가사의한 상황에 위치시키는 방법, 주인공이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경험을 하면서도 조금 지나고 나면 혹시 그 경험이 초자연적인 무엇은 아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일종의 잠복기 같은 순간을 제시하기를 좋아합니다. (p.8)

 

   한국에서 첫 소설 발표 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기욤 뮈소. 그의 소설의 특징은 영화와 같은 빠른 전개와 기막힌 반전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쓰는 소설들이 추리나 장르 분야였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가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연애 소설에 반전이라니. 이미 그를 겪어본 독자들은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결코 반전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말이죠.

   빠르게 읽히는게 가장 큰 장점인 그의 소설을, 반대로 저는 꽤 천천히 읽는 편입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잠시 책을 덮어둔 채 혼자서 다음 이야기를 머리 속에 그려보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거야, 기막힌 반전이 있을거야, 이번에는 꼭 맞출거야, 다짐하며 읽어도 어김없이 어긋나 버립니다. 특히, 『내일』은 '감각적인 로맨틱 코미디와 히치콕 식 스릴러의 환상적인 결합!'이라는 타이틀처럼, 어느 작품보다 훨씬 더 그런 특징들이 돋보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기욤 뮈소의 반전에는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맨 처음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랑,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지켜낸 사랑은 과연 유효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단순히 자살로 죽을 운명이었던 엠마를 살리고, 엠마와 매튜가 사랑하며 잘 살았다는 내용의 소설이 아닙니다. 『내일』을 읽으면 사랑이 품고 있는 '함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멀리.

   아주 멀리. (p.381~3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1 - 더 깊고 풍부해진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만화 상상력 사전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수박 그림 / 별천지(열린책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로 만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원천!

   항상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소설로 독자들을 즐겁게 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나 『상상력 사전』을 보면 그의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들 속에는 『개미』, 『타나토노트』, 『뇌』, 『나무』, 『신』, 『제3인류』 등의 기초가 되었던 생각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을 좀 더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것이 바로 『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입니다. 총 3권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의 첫째권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처음에는 『만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나머지 두 권은 『상상력 사전』을 원작으로 한 것인데, 원작이 다소 부담스러운 두께의 책이었다면 만화는 좀 더 읽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상상력 사전』과 비교해 볼까요?

 

인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세 가지 사건

   인류는 세 차례에 걸쳐 자존심 상하는 일을 겪었다.

   첫 번째 사건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한 일이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기는커녕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으며, 태양 자체는 더 거대한 어떤 체계의 주변에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사건은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들고 나온 일이다. 그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넘어서는 존재이기는커녕 그저 다른 동물들에게서 나온 하나의 동물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 사건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선언이다. 인간은 예술을 창조하고 영토를 정복하고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하고, 철학의 체계를 세우거나 정치 제도를 만들면서, 그 모든 행위가 자아를 초월하는 고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성적인 파트너를 유혹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고 있을 뿐이다. (『상상력 사전』, p.12)

 

 

   『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은 네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김수박 만화가, 그리고 헐랭이와 이쁜이가 등장합니다. 어린 헐랭이와 이쁜이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습득하면서 성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만화가 김수박이 적절하게 개입합니다. 오직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목소리로만 들었던 『상상력 사전』이 그 어마어마한 두께까지 합세해 다소 단조로움이 있었다면 만화는 적절한 개입이 있어서 좀 더 흥미롭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원천이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보세요. 읽고나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주 작은 개미일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는 독자들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라틴 아메리카 현대 문학의 이단아, 혹은 시한폭탄이라 불리는 로베르토 볼라뇨는 2003년 여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는 간부전을 앓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죽기 직전에 부랴부랴 원고를 출력해 출판사로 넘겼습니다. 그가 그렇게 마무리한 작품이 바로 단편집 『참을 수 없는 가우초』입니다. 이 책에는 다섯 편의 단편과 두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그의 첫 번째 유작이자 문학적 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제작인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 보르헤스가 즐겼던 상호 텍스트적 글쓰기를 적극 차용한 단편소설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전직 변호사였던 페레다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 독서와 여행을 즐기다가 아르헨티나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자 팜파스로 떠납니다. 팜파스는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라틴 아메리카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목축 지대입니다. 과연 이곳에서 페레다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말을 사고 농장을 고치고 일을 잘 못하는 팜파스의 카우보이 '가우초' 2명을 일꾼을 들여 농장 생활을 시작합니다. 술을 마시고,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농장일은 가우초보다 훨씬 더 잘 합니다. 가끔씩 유명한 작가가 된 아들이 농장으로 내려오기도 합니다.

   팜파스 생활이 길어지자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3년만에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는 페레다, 그는 그곳에서 생각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남아서 정의의 챔피언이 될까 아니면 팜파스로 돌아갈까. 팜파스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돌아가서 뭔가 쓸 만한 일을 해볼까, 글쎄, 토끼로 뭘 하지, 사람들과 뭘 하지, 불평 없이 날 받아 주고 또 날 참아 주는 그 가여운 사람들과 말이야." (p.50) 도시는 그에게 그 어떤 해답도 주지 않지만 날이 밝자 페레다는 결심합니다. 다시 팜파스로 돌아 가기로.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팜파스 중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물어봤다. 아르헨티나는 소설이야, 그러니 가짜거나 최소한 거짓이란 말이지, 그가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둑놈과 눈꼴사나운 놈들의 땅이야, 지옥이나 다름없지. 거기선 여자만이 가치 있는 사람들이야. 아주 드물긴 하지만 작가들도 그렇긴 하지. 반대로 팜파스는 영원해. 무한한 묘지는 인간이 찾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지. 무한한 묘지가 상상이 돼, 이 친구들아? 그들에게 물었다. 가우초들은 미소를 띠며 솔직히 그런 걸 상상하긴 어렵다면서 묘지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 봐야 결국 유한한 존재라고 했다. 내가 말한 묘지란 영원성을 그대로 복제한 것일세, 페레다가 대답했다. (p.34)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호 텍스트적인 글쓰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닙니다. 게다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텍스트를 차용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낯선 작가들이 많으니까요. 쉽게 읽히지 않는 건 비단 이 소설 뿐만이 아닙니다. 로베르토 볼라뇨 또한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한듯 합니다. 「짐」을 보면 "시인으로서 기발한 뭔가를 찾아서 그걸 쉬운 말로 표현"(p.11)하려고 하는 짐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에세이 「크툴루 신화」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습니다.

 

   누군가 대답해 줬으면 하는 수사적인 질문이 있는데, 페레스 레베르테나 바스케스 피게로아 혹은 다른 성공한 작가들, 예를 들어 무뇨스 몰리나나 데 프라다라는 성을 지닌 젊은 작가의 작품이 그리도 잘 팔립니까? 그저 재밌고 명쾌해서 그런 겁니까? 독자를 붕 띄우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건가요? 대답할 사람 없나요?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아무도 대답하지 마시길. 누구도 친구를 잃는 일은 없으셔야죠. 그러니 그냥 내가 답하지요. 그들의 작품이 그저 재밌고 명쾌해서 잘 팔리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렇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의 책이 팔리고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대중이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는 독자들은, 물론 모든 독자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읽는 소비자가 그렇다는 것인데, 그들의 소설과 단편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비평가 콘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젊어서 그렇게 직관했을 겁니다. 가르시아 로르카가 어느 남창과 현관에 숨어들며 말했듯이, 대중은 결코, 결단코,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중은 왜 착각하지 않을까요? 대중은 이해하니까요. (p.156~157)

 

   로베르토 볼라뇨 스스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발한 상상력을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테지만, 모든 작가들이 인기에 연연하며 쉽게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안타까워하고 고민했습니다. 몇몇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문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없이 오직 돈과 인기만 쫓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말입니다.

 

   카네티는 그의 저술에서 20세기 최고의 작가 카프카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처음 피를 토한 날 이후로 그 무엇도 자신과 글쓰기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글쓰기와 떨어질 수 없다는 말로 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는 카프카가 여행과 섹스, 책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이며, 그럼에도 뭔가를 찾아서 그 길에 들어서고 길을 잃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 뭔가가 책이든, 몸짓이든, 잃어버린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그 어떤 것이 됐든, 그걸 찾아서 말입니다. 운이 따르면 늘 거기에 있었던 것, 바로 새로운 것을 찾을지도 모르지요. (p.152)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에 대한 고민과 그것에 온힘을 쏟았던 로베르토 볼라뇨, 그동안은 작품들을 통해 작가로서의 면목을 보여줬다면 『참을 수 없는 가우초』를 통해서는 자신 또한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