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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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이 책상 가득 쌓여있지만, 도무지 제자리를 찾아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읽지 않은 책은 절대 책장에 꽂아두지 않는 나지만, 책상 위에서 서로 몸을 부대끼며 기우뚱거리는 책들을 마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임시로나마 자리를 찾아준다. 읽은 책보다는 읽지 않은 책들이 점점 위용을 떨쳐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생각해 본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책을 구입하는 속도보다는 책을 읽는 속도가 몇배는 빨랐다. 그러던 것이 점차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평행선을 그리다가 급기야 오늘에 와서는 책을 읽으면서도 쌓여만 가는 책의 높이를 보며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다.
난독증(難讀症). 시선은 텍스트에 고정되어 있지만, 좀처럼 가슴에 스며들지가 않는다. 요즘 나는 그렇게 어렵게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손에서 책을 떼어놓아도 될 것 같은데, 손에서 책이 떨어지면 영 불안해서 살 수는 없고 그러니 죽으나 사나 책만 붙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가족, 사랑, 죽음, 눈물이 공존하는 우리 문학에 식상해 있던 참이었다.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작품에 한창 불신을 가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번도 듣도보도 못한 작가인지라 '기대'라는 마음의 준비는 미처하지 못했다. 얼핏 넘겨본 책장에서 '난독(難讀)'이라는 단어가 보여 지금의 나랑 똑같네,라는 생각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기계적으로 읽는 탓인지 여간해서는 책을 읽고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나이지만, 오래전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면서 펑펑 운적이 있었다. 철부지 모모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어른들의 세계가 가슴 아팠고, 어른조차 견디기 힘든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모모가 너무나도 안스러웠다. 처음에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듯 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쏟아내고 만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정원』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한번 그때 느꼇던 감정들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동구네는 인왕산 허리 아래 산동네에 산다. 동구의 아버지는 3대 독자로 무역회사에 다니신다. 동구의 엄마는 마을에서 살림 솜씨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동구를 낳고 6년 동안 동생을 낳지 못했다. 3대 독자들 키워낸 동구의 할머니는 항상 육두문자를 달고 다니신다. 자신의 아들 밖에 모르는 할머니는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동구 엄마에게 쏟아냈으며, 4대 독자인 동구를 예뻐하면 동구를 낳은 며느리의 기가 드세질까봐 동구에게도 험한 말을 내뱉곤 한다.
그런 동구에게 드디어 예쁜 여동생이 생겼다. 동구처럼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 '영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동생은 동구가 10살이 될 때까지도 다 익히지 못한 한글을 3살 때부터 술술 읽어내기 시작한다. 이런 동생이 동구는 미울법도 한데, 얼마나 예뻐하는지 영주를 업고 다니느라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비록 자신은 천덕꾸러기에 바보 소리를 듣지만 천재 동생을 동네방네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3학년이 되도록 한글도 제대로 못쓰는 동구를 동구의 담임선생님은 다만 동구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동구는 지진아가 아닌 남들과 조금 다른 난독증이라는 것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아버지와 할머니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손찌검까지 당하던 동구는 자신을 조금 다를 뿐이라고 말하시는 선생님이 너무 좋다. 동구는 방과 후 선생님과 함께 하는 한글 공부도 즐겁고, 코 끝으로 다가오는 선생님의 향기 또한 좋다. 덕분에 동구는 가족 앞에서 멋지게 선생님의 편지를 읽어내는데 성공하며, 이날은 동구네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동구의 행복은 잠시였다. 동네 입구에 탱크가 들어선 후 그 예쁜 선생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선생님이 사라져버렸다. 천재 소리를 듣던 영주는 할머니의 감나무에 열린 감을 만져보려고 동구의 무등을 타다가 넘어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할머니의 육두문자가 동구 엄마의 가슴을 후려쳐도, 아무리 동구 아버지의 무심한 발길질이 동구 엄마를 휘갈겨도 묵묵히 참아내던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동구는 다시 난독의 시대를 맞이한다.

동구네 마을에는 유일하게 3층 집이 한채 있다. 동구는 그 3층집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꾸미지 않은 그 3층집의 정원을 좋아한다. 보통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지만, 일년에 한두번씩 대문 문이 열려있을 때 동구는 살짝 대문 안으로 들어간가 정원을 보곤 했다. 동구는 그런 정원이 갖고 싶었다.

내 마음의 동요를 불러 일으킨 것은 작가의 섬세함이었다.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자전적인 소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자연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3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듯 했다. 작가는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마치 어린 아이를 옆에 두고 글을 써내려가는 것처럼 어떻게 10살짜리 동구의 시각을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몸파는 창녀 일을 '엉덩이 빌려 주는 일'이라고 말했던 에밀 아자르의 모모가 그대로 떠올랐다.

동구가 난독을 경험했던 1979년에서 1981년은 동구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난독의 시대였다. 무엇하나 제대로 쓰여진 것이 없고, 쓰여진 것을 제대로 읽어보려고 하면 억압하는 시대.
어린 아이의 눈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어른들처럼 지식을 앞세워, 자신의 입장에맞게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표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그런 어린 동구의 눈을 통해 좀 더 객관적인 난독의 시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한 이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 준 이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이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신했던 한국 문학을 다시 손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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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
장장년.장영진 지음, 김숙향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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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연구를 하고 파헤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학문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역사는 무궁무진하고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엿본다는 것, 얼마나 매력적이가.

그 무궁무진한 역사 속에서 아직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고 숨겨진 비밀이 얼마나 많을까.

 

고고학의 발견, 명승지 이야기, 유적지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 사건의 진실, 천고의 수수께끼, 종교 역법, 과학기술의 빛, 문예의 정수, 귀퉁이의 역사 자료, 이러쿵저러쿵 등의 10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진 이 책은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를 끄집어 내어 이야기하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최근 근황까지 들려주고 있어서 특히 좋았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국, 스위스' 이야기였다.

국토 면적은 중국 북경의 두 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나라지만, 국제적인 위치도 높은 편이며 국민평균소득은 세계 1위의 부유한 나라이다. 특히 스위스인은 휴식과 휴가를 중시해서 영업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위법이며, 휴가는 꼭 챙긴다고 한다. 나처럼 매일 야근에 여행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같은 나라가 아닐런지.

 

참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덕분에 10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놓은 것이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두서가 없고 짜임새가 없다. 먼저 카테고리를 정해 놓고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이야기가 있으면 거기에 어울리는 카테고리를 그저 끼워 맞추어 놓은 느낌이다.

생각보다 '숨겨진 비밀'들도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최근 근황을 보탠 정도라고나 할까.  

또 책 자체는 마음에 든다. 두께는 있지만 가볍고 따뜻한 느낌의 종이를 써서 가볍게 손에 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붉은 빛이 감도는 사진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흑백이었으면 사진이 더 잘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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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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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소설 『1984』를 통해 지극히 통제된 미래 사회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1948년을 살았던 그가 그려낸 1984년의 미래 사회는 '텔레스코프'라는 장치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독재자 '빅 브라더'의 감시하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행동이나 사상 뿐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감시를 받으며 통제 당했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없으면 결국 그것의 실체마저 사라지듯이, 빅 브라더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까지 통제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말이 없었으며, '사랑'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곧 반역자가 되었다.

나는 『1984』를 읽고 얼마나 몸서리를 쳤는지 모른다. 비록 전체주의라는 사상이 세계를 움켜잡지는 못했지만, 비록 우리가 '텔레스코프'라는 장치를 통해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1984』 속 사회와 과연 다른점이 무엇인가.

 

깊은 주름과 어두운 표정, 무채색으로 그려진 노인의 얼굴 덕분에 '비룡소에서 나온 청소년 문학선'이라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표지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서 더 궁금증이 생겨버린 책, 『기억 전달자』.

조너스가 살고 있는 마을은 보통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이는, 아니 더 평화로워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 대해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조지 오웰의 『1984』 속 사회와  더 닮은 곳이라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이 마을은 지나친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과 그에 따른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년에 딱 50명만 낳도록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들은 자신의 원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아기를 원하는 부부에게 분양된다. 정말 말 그대로 '분양'이다. 게다가 건강하지 못한 아기는 그대로 '직위 해제' 되어 버린다. 이 아기들이 12살이 되면 앞으로의 자신의 '직위'를 부여 받는다. 똑똑한 아이는 의사나 변호사 등의 직위를 받아 교육을 받으며, 건강한 여자 아이는 산모 직위를 받아 3명의 아기를 낳고 육체 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주인공 조너스는 '기억 전달자'라는 매우 막중한 직위를 받게 된다.

이 마을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도 아픔도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기억 전달자' 덕분이다. '기억 전달자'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혼자서만 간직하며 감당해 내야만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가족과 사랑의 기억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끔찍한 전쟁의 기억까지 모두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 보이지만 그는 빛깔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사과는 빨갛게 보이고, 하늘은 파랗게 볼 수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기억 뿐만이 아니라 언어도 통제를 받는다. 항상 바른말을 사용해야지 '사랑'과 같은 말을 사용하면 바로 '대국민 사과'를 해야한다. 날씨 또한 통제를 받는 것 중에 하나이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하얀 눈이나 비온뒤 보이는 일곱빛깔의 무지개를 볼 수가 없다. 항상 맑음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될지 어릴적부터 정해지는 사회, 그래서 취업 걱정도 없고 인구 문제도 없고 서로 간의 경쟁도 없다. 평화로움은 넘치지만, 단조로움 또한 항상 뒤따른다.

기억 전달자가 기억과 함께 동반하는 '고통' 을 괴로워 한 것이 아니라 혼자서만 기억하고 있다는 '고독' 때문에 괴로웠던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부딪치고 경쟁하며 사는 것이 더 재미난 일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마음껏 꿈꿀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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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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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8일이 넘어가는 늦은 밤.

 

나는 우리 문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용돈이 넉넉치 않던 고등학교 시절, 책을 읽기 위해 주로 내가 이용한 곳은 당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책대여점이었다. 대형 수퍼마켓 매장이 있던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 동네 책대여점은 구립도서관의 문학 코너보다도 더 넓었다. 책대여점의 특성상 주로 흥미 위주의 문학책이 대부분이었고, 커다란 한쪽 벽면을 우리 문학책들이 채우고 있었다. 한 3년 드나들다 보니 우리 문학책들로 가득한 그 벽면에서 내가 더이상 읽을 책들이 없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책대여점을 떠나면서부터 내 마음 한켠에는 우리 문학에 대한 불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사랑, 이별, 죽음... 눈물을 우러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작가가 죽은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 선배가 등장한다. 죽은지 30년은 안되었어도, 아직 죽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문학과 멀어지기 시작했었다.

얼마전 선물로 받은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덮으면서 내가 얼마나 근시안적인 책읽기를 해왔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하병무의 『남자의 향기』와 같은 책들이 대세였는데, 출판계에도 당연히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작 파악했어야 했다.

2007년 7월 8일이 넘어가는 늦은 밤, 나는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기 시작했다.

 

2007년 7월 9일 월요일.

 

31살, 편집회사의 편집 디자이너, 아직 미혼, 전세금을 깔고 서울에서 혼자 생활. 주인공 오은수의 프로필이다. 회사에서 중노동에 혹사당해도, 상사로부터 부당함을 당해도 꿋꿋히 참고 일하는 대한민국의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직장인인 그녀에게 세 남자가 등장한다.

태오, 그녀보다 6살이 어린 그는 어릴적부터 영화만이 오직 그의 꿈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지만, 32살의 평범한 여자에게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상대이다. 김영수, 37살의 작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그는 나 여기 있소!하고 손을 들지 않는다면 도통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프로필에 비하면 그는 과분한 상대이다. 유준, 그녀의 오랜 친구이며 비록 폐인 생활을 하는 백수이지만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사람이다. 평범한 그녀에게는 평범한 선택이 딱이다. 온전히 그녀의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선택은 김영수였다. 그런 그녀가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나이는 많지만 평범한 커리어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던 그녀가 일탈을 단행한 것이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평범함과 단조로움에 너무 숨이 막혀서일까.

은수가 사직서를 내던 날, 나 또한 사직서를 냈다. 은수에게서 용기를 얻었던 것일까?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 (p. 71)

 

2007년 7월 12일 목요일.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전혀 달콤하지 않다. 모양없이 지어놓은 네모반듯한 회색빛 건물들, 은수처럼 우산이라도 들고 날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련만. 날아 오른다고 해도 도무지 내가 안착할 곳이 없다는 것. 떠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이 도시는 나에게 좌절과 실망만 줄 뿐이다.

은수에게 서울은 어떤 도시였을까. 정말 제목처럼 달콤한 도시였을까? 그녀는 아무 맛도 없다고 했다.

떠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도시에다가 지원을 했다. 경쟁률은 이 도시의 공무원을 뽑는 것만큼 세다. 모두들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휴우, 은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얼른 책을 펼쳐 보았다.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면접을 보러 간 회사로부터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게다가 결혼하기로 약속한 김영수는 종적을 감추었다. 안돼, 안된단 말이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그녀와 나를 동일시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시키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내 기대와는 다른 결말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바라던 은수의 삶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서러움의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2007년 7월 13일 금요일.

 

무려 반나절 동안 2차 면접이 진행되었고, 탈락자들에게만 저녁 때까지 따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다니던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팀장을 뒤로하고 과감하게 짐을 싸들고 나와버렸다. 나에게 이런 결단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서 2시간 동안 휴대전화만 바라보았다. 전화벨이 울리기라도 하면 깜짝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결국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데, 왜 이렇게 두려운걸까. 은수의 마지막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그랬듯이 나 또한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이 도시는 나에게 어떤 맛을 보여주게 될까.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눈앞의 미래조차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매혹적 특권이다.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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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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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8일이 넘어가는 늦은 밤.

 

나는 우리 문학을 신뢰하지 않았다. 용돈이 넉넉치 않던 고등학교 시절, 책을 읽기 위해 주로 내가 이용한 곳은 당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책대여점이었다. 대형 수퍼마켓 매장이 있던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 동네 책대여점은 구립도서관의 문학 코너보다도 더 넓었다. 책대여점의 특성상 주로 흥미 위주의 문학책이 대부분이었고, 커다란 한쪽 벽면을 우리 문학책들이 채우고 있었다. 한 3년 드나들다 보니 우리 문학책들로 가득한 그 벽면에서 내가 더이상 읽을 책들이 없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책대여점을 떠나면서부터 내 마음 한켠에는 우리 문학에 대한 불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사랑, 이별, 죽음... 눈물을 우러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작가가 죽은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책은 읽지 않는 선배가 등장한다. 죽은지 30년은 안되었어도, 아직 죽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문학과 멀어지기 시작했었다.

얼마전 선물로 받은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덮으면서 내가 얼마나 근시안적인 책읽기를 해왔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하병무의 『남자의 향기』와 같은 책들이 대세였는데, 출판계에도 당연히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작 파악했어야 했다.

2007년 7월 8일이 넘어가는 늦은 밤, 나는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기 시작했다.

 

2007년 7월 9일 월요일.

 

31살, 편집회사의 편집 디자이너, 아직 미혼, 전세금을 깔고 서울에서 혼자 생활. 주인공 오은수의 프로필이다. 회사에서 중노동에 혹사당해도, 상사로부터 부당함을 당해도 꿋꿋히 참고 일하는 대한민국의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직장인인 그녀에게 세 남자가 등장한다.

태오, 그녀보다 6살이 어린 그는 어릴적부터 영화만이 오직 그의 꿈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지만, 32살의 평범한 여자에게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상대이다. 김영수, 37살의 작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그는 나 여기 있소!하고 손을 들지 않는다면 도통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프로필에 비하면 그는 과분한 상대이다. 유준, 그녀의 오랜 친구이며 비록 폐인 생활을 하는 백수이지만 먹고 살 걱정은 없는 사람이다. 평범한 그녀에게는 평범한 선택이 딱이다. 온전히 그녀의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선택은 김영수였다. 그런 그녀가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나이는 많지만 평범한 커리어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던 그녀가 일탈을 단행한 것이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평범함과 단조로움에 너무 숨이 막혀서일까.

은수가 사직서를 내던 날, 나 또한 사직서를 냈다. 은수에게서 용기를 얻었던 것일까?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 (p. 71)

 

2007년 7월 12일 목요일.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전혀 달콤하지 않다. 모양없이 지어놓은 네모반듯한 회색빛 건물들, 은수처럼 우산이라도 들고 날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련만. 날아 오른다고 해도 도무지 내가 안착할 곳이 없다는 것. 떠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이 도시는 나에게 좌절과 실망만 줄 뿐이다.

은수에게 서울은 어떤 도시였을까. 정말 제목처럼 달콤한 도시였을까? 그녀는 아무 맛도 없다고 했다.

떠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도시에다가 지원을 했다. 경쟁률은 이 도시의 공무원을 뽑는 것만큼 세다. 모두들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휴우, 은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얼른 책을 펼쳐 보았다.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면접을 보러 간 회사로부터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게다가 결혼하기로 약속한 김영수는 종적을 감추었다. 안돼, 안된단 말이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그녀와 나를 동일시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시키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내 기대와는 다른 결말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바라던 은수의 삶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서러움의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2007년 7월 13일 금요일.

 

무려 반나절 동안 2차 면접이 진행되었고, 탈락자들에게만 저녁 때까지 따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다니던 사무실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팀장을 뒤로하고 과감하게 짐을 싸들고 나와버렸다. 나에게 이런 결단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서 2시간 동안 휴대전화만 바라보았다. 전화벨이 울리기라도 하면 깜짝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결국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데, 왜 이렇게 두려운걸까. 은수의 마지막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그랬듯이 나 또한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이 도시는 나에게 어떤 맛을 보여주게 될까.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눈앞의 미래조차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매혹적 특권이다.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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