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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동물원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귀여운 곰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한편 있다. 할인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발랄한 20대인 현채는 멋진 로맨스를 꿈꾸지만, 항상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남자와 사랑은 모두 시시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도서관 화집에서 "이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시작입니다. 당신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귀여운 곰같이 사랑스럽답니다. 다음엔 이 책을 빌려보세요."라고 적힌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메모에 적힌대로 책을 빌려보기 시작하고, 그 메모는 계속되었다. 드디어 그녀가 꿈꾸던 로맨스가 찾아온 것이다. 우리에게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개봉되기 직전에 제목이 바뀌었다. 그러나 굳이 원제를 밝히지 않더라도 영화의 내용만으로도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어느 날, 내가 사랑하던 남자가 내게 너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 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난 싫증을 느꼈다. 답장이 없는 그에게 편지를 쓰는 데도 지쳤고, 내 침대 위에 걸린 그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일에도 신물이 났다." (p. 7)
스물다섯의 콩스탕스. 그녀는 로맹 가리와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러나 로맹 가리를 마음껏 사랑할 수도, 그의 작품을 마음껏 읽을 수도 없다. 그는 이미 자살한 작가였고, 그의 작품은 모두 서른한 권밖에 되지 않는다. 일년에 한 권씩, 그의 책을 아껴가며 읽더라도 여자의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가 없는 그 이후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달리 사랑할 남자도 없다. 그녀는 잠시 '외도'를 하기로 결심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 회원으로 등록한다. 그녀가 로맹 가리에게 너무 빠져 있었던 탓일까. 여러 권의 책을 빌려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책이 없다. 어떤 책들은 펼쳐보지도 않고 그냥 반납했을 정도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폴리냑의 『오렌지빛』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 좋은 책입니다. 그걸 당신에게 권합니다."
그렇잖아도 조언을 구하고 싶었는데, 도스또예프스끼라면 그녀가 좋아하는 로맹 가리와 같은 러시아 사람이 아닌가. 메모를 따라 읽은 『노름꾼』에서 그녀는 또다른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감히 시립도서관 소유의 책에 밑줄을 긋는 남자는 누구일까. 처음에는 그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연필로 밑줄을 그어 놓은 부분들은 모두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그어놓은 밑줄을 지우개로 지우기도 하고, 그녀의 마음을 밑줄로 그어 전하기도 한다.
설레임으로 가득한 대학 신입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이 책을 발견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시립도서관이나 동네에 있는 작은 도서대여점을 이용했던 나는 그렇게 많은 책이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책 냄새 폴폴나는 대학 도서관은 나에게 있어서 꿈의 공간이었다. 어릴적부터 내가 좋아했던 작품들은 대부분이 프랑스 소설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프랑스 소설 코너로 발을 옮겼는데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밑줄 긋는 남자』였다.
지금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서 읽으며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밑줄을 긋거나 표시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빌려있는 책에 밑줄을 긋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종종 책의 한 귀퉁이를 접거나 밑줄을 그어놓은 책을 만나게 되면 짜증이 났다. 혹은 낙서를 하거나 이물질이 끼어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냥 반납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밑줄 긋는 남자'는 달랐다. 그 남자 때문에 콩스탕스의 마음이 콩닥콩닥 뛰면 내 마음도 함께 뛰었다. 다음에는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혹시 이 도서관 안에도 '밑줄 긋는 남자'가 있지 않을까, 도서관 안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그때의 그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며칠전 이 책을 서점에서 구입해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찾아온 것은 두근거림이 아닌 무덤덤함과 실망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이 책의 진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때에만 발휘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콩스탕스보다 훨씬 어린, 갓 소녀에서 벗어난 학생이었다. 나 또한 그때는 현채처럼 로맨스를 꿈꾸었었다. 지금은 콩스탕스보다 나이가 많아졌고, 몇 번의 사랑을 거친 다음 더이상 로맨스를 꿈꾸지 않게 되었다. 혹여 도서관에서 '밑줄 긋는 남자'를 만나게 되더라도 살짝 썩소를 날려줄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고나 할까. 지금 나는 설레임으로 가득한 그때의 나를 상상하며 웃음을 머금을 수 밖에 없다. 언제 또다시 로맨스를 꿈꾸어 보겠는가.
사실 『밑줄 긋는 남자』는 나에게 '로맹 가리'라는 대작가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왜 그토록 콩스탕스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공감했다. 그녀는 31편이 적어서 다른 작가와의 '외도'를 결심했지만,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는 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작품이 몇 권 되지 않고, 그나마 출간된 책들도 이미 절판된 책이 많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2007/10/05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