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91년 『여섯번째 사요코』로 데뷔한 온다 리쿠는 불과 2년 전에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지금은 총 19권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은 훨씬 많다고 하니, 올해로 데뷔 17년째인 그녀는 분명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최근 출간된 네 편의 작품 (『구형의 계절』, 『불안한 동화』, 『도서실의 바다』,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면 앞도 뒤도 보지 않고 그냥 사버린다. 그만큼 그녀는 나에게 특별한 작가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졌다. 과연 나는 이 작가에 대해서 얼마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보통 한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고 나면 그 작가가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알기 때문에 다음에 읽는 작품은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예외였다. 그녀의 작품을 열 권 이상 읽고 났을 때, 나는 그녀를 잘 아는 독자라고 자신하며 읽었던 책에서 그만 좌절하고 말았다. 방심했던 탓일까? 한 50페이지 정도를 읽었음에도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아 마음을 다잡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만 했다. 덕분에 지금은 결코 만만한 마음가짐으로 그녀의 작품을 시작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도입부의 부적응은 어쩔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을 꺼린다.
내내 한 사람의 시점에 갇히는 것이 잘 맞지 않는다." (온다 리쿠의 인터뷰 중에서)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 소설을 배울 때면 항상 가장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 있었다. '이 소설의 시점은 무엇인가?'. 보통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던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고, 특이하게 2인칭 시점이 한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즉 대개는 시점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었고, 어쩌다가 시점이 변화하는 부분이 등장하면 반드시 시험 문제로 출제되곤 했었다.
온다 리쿠는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시점의 다각화'를 여러 작품에서 시도하고 있다. 『삼월은 붉은 구렁』, 『라이온 하트』,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등은 다양한 사건과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시점을 바꾸고 있다. 앞서 나열한 작품들이 시도였다면 『유지니아』는 그런 시도들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덕분에 오랫동안 시점이 고정되어 있는 작품을 배우면서 익숙해져 버린 독자들은 그녀의 이런 작품들을 읽을 때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온다 리쿠가 시점의 다각화를 시도하는 이유?
『유지니아』는 오래전에 일어난 대량 독살 사건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중에는 이 사건을 소설로 출판한 작가도 있고, 그 작가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 할 때 옆에서 도와주었던 후배도 있다. 그 작가와 후배가 증언한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논픽션? 난 그 말 싫어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주장해도, 사람이 쓴 것 중에 논픽션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저 눈에 보이는 픽션이 있을 뿐이죠. 눈에 보이는 것조차 거짓말을 해요. 귀에 들리는 것도, 손에 만져지는 것도. 존재하는 허구와 존재하지 않는 허구, 그 정도 차이라고 생각해요." (p. 23)

"사실은 어떤 한 방향에서 본 주관에 불과합니다." (p. 82)
 
그렇다.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누군가의 눈을 통해 본 것일테고, 똑같은 사실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온다 리쿠가 시점을 다각화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지니아』에는 결론이 없다. 사건도 있고,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범인은 자살했지만 진범은 따로 있다고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진범을 지목하지만 확실하게 그녀가 진범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도 보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증언하고 있다. 진실은 무엇일까?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아직 내 머릿속에는 <The End>라는 자막이 올라가지 않았다.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모든 것을 오픈하고 보여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복선과 단서는 던져주되 그 이후의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있다. 때론 확실한 결말이 궁금하기는 하고 결말이 없어 허무하기도 하지만,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결론을 상상하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온다 리쿠는 독자들에게 상상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아직 읽지 않은 그녀의 최근작들은 나에게 어떤 긴장감과 상상의 즐거움을 선사해줄지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2007/10/0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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