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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세를 등에 업은 흔해빠진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펴내는 연예인들이 부쩍 많다. 특히, 예전처럼 여행이나 요리, 뷰티 등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에세이가 아닌 연예인들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소설들이 출간돼 시선을 끈다. 이적, 타블로, 구혜선에 이어 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펴냈다. 사실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출간 소식을 들으면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기에 편승해 한 몫 챙기려는 장사 속이 아닐까 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잘가요, 언덕』은 배우 차인표가 1997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로, 위안부로 끌려갔던 '훈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도 아니고, 흔해빠진 로맨스나 판타지도 아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민감한 소재를 들고 나왔다. 일단, 소재 선정은 만족! 그렇다면 그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소설로 풀어낼까?
잘가요, 잘 가세요!
백두산 자락의 호랑이 마을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봉긋 솟아 있다. 호랑이 마을 사람들이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이 언덕에서 "잘 가요. 잘 가세요"를 외치며 작별을 했다. 그래서 '잘가요 언덕'이 됐다. 마을 뒤쪽에는 호랑이 산이 있는데, 아주 오랜 옛날부터 호랑이와 마을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신하들을 데려와 사냥을 하기 시작한 날부터 호랑이는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이 호랑이들을 잡으러 전국에서 포수들이 몰려 들었다.
1931년 가을, '잘가요 언덕'을 넘어 두 사람이 마을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백호에게 아내와 갓난아이를 잃은 황포수와 용이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잠잠했던 호랑이들이 그들로 인해 또다시 횡포를 부릴까봐 반갑지 않다. 황포수는 백호만 잡겠다고, 백호가 없으면 마을의 근심거리인 육발이라도 잡아주고 가겠다고 한다. 촌장 할아버지는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그들이 안스러웠는지 손녀 순이를 시켜 밥을 챙겨준다. 용이는 그런 순이가 좋고, 순이도 철없는 마을 아이들과는 다른 용이가 좋다. 또, 호랑이를 잡으러 간 아버지가 죽자 고아가 돼 이 마을에서 혼자 자라고 있던 훌쩍이도 용이가 좋다.
몇 달 후, 호랑이 산으로 들어간 황포수와 용이는 백호 대신 육발이를 잡아 온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용맹함을 칭찬하며 그들을 반긴다. 그러나 엄대를 비롯한 마을 아이들은 용이가 싫다. 부모님이 그들을 나무라면서 용이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황포수 부자가 움막을 비웠을 때, 엄대와 아이들은 움막에서 총을 훔쳐 호랑이 산으로 간다. 결국 아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황포수 부자는 마을을 떠나게 된다. 떠나는 그들을 아쉬워했던 이는 순이와 훌쩍이 뿐이다.
그로부터 7년, 19살 아가씨가 된 순이는 마을을 지나가던 부부가 두고 간 샘물이를 보살피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때 가즈오 장교가 이끄는 일본 747부대가 마을로 온다. 다행히 747부대는 마을 사람들과 잘 지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절도 잠시! 위안부 차출을 목적으로 한 700부대가 순이를 끌고 간다. 이를 막으려던 훌쩍이는 총을 맞아 죽고, 샘물이는 몸이 불편한 촌장 할아버지에게 맡겨진다.
이때 용이가 다시 호랑이마을에 나타난다. 순이의 소식을 들은 용이는 순이를 구하러 온 것이다. 순이를 구하러 나선 것은 용이뿐만이 아니다. 마을에서 주둔하며 순이를 알게 된 가즈오 장교도 순이를 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아쉽게도 용이와 가즈오 장교 모두 순이를 구하지는 못한다. 용이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가즈오 장교는 총을 맞아 죽는다.
필리핀의 한 작은 마을에서 70년만에 쑤니 할머니가 발견된다. 89살이 된 쑤니 할머니는 70년만에 고향을 방문하지만, 마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다행히 그곳에서 쑤니 할머니는 자신을 알아보는 할머니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방법!
작가 차인표는 '일본군 위안부' 라는 민감한 문제를 정겨운 고향의 모습과 순박한 사람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평화로운 마을에 들이닥친 일본군의 잔인함은 호랑이마을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과연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용서할 수 있을까?
"용이야, 넌 힘들 땐 어떻게 했니?"
"그냥 …… 참았어."
"용이야, 이제 그만 백호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
"난 네가 백호를 용서해 주면, 엄마별을 볼 수 있게 될 것 같아."
"모르겠어. 용서를 …… 어떻게 하는 건지. 빌지도 않은 용서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용서는 백호가 용서를 빌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엄마별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별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엄마가 너무 소중하니까." (p.177~179)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용서를 구하기는 커녕 당사자들이 빨리 사라져 더이상 자신들의 잘못을 꺼내는 일이 없길 바란다. 용서조차 구하지 않는 그들을, 작가는 그냥 용서하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용서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당한 고통으로 평생 발 뻗고 잘 수 없었던 할머니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의 원수인 백호를 죽이기 위해 복수를 키웠던 용이처럼 평생 힘들어해야 할테니까.
물론 용서도 구하지 않는 그들을 용서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를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더 늦기전에 그들 또한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작가가 할머니들의 고통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작가 또한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이야기를 쓰면서 그 생각이 바꼈다고 한다.
작가는 이 한 편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무려 10여년을 보냈다. 그의 문장을 읽어보면 그 10여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야기의 주무대가 되는 백두산 자락의 호랑이마을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을만큼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독성이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을만큼 잘 읽힌다. 읽기 전에는 홍보성 멘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가로서의 그의 행보가 궁금해진다'는 이어령의 추천글이 이해가 된다.
09-40. 『잘 가요, 언덕』2009/03/31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