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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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그녀가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흔히 찍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 맛있는 음식을 담은 사진이 아닙니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에는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9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M이 떠난 후 잠에서 깨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햇살 속에서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이 복도 타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 나는 카메라를 가지러 갔다. 내가 했던 일을 M에게 말했을 때, 그 역시 이미 그런 욕구를 느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진 찍기를 계속했다. 섹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물질적인 표상을 보존해야만 했다. 어떤 것들은 관계 직후에 찍었고, 또 어떤 것들은 다음 날 아침에 찍기도 했다. 그 마지막 순간은 가장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몸에서 벗겨져 나간 것들은 그들이 쓰러져 장소에서 추락한 자세 그대로 밤을 보냈다. 그것은 이미 멀어진 축제의 허물이었고, 낮에 그것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시간을 체감하는 일이었다. 아니 에르노, 9~10쪽

   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 글을 써왔던 아니 에르노.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을 꺼내놓고, 그와 함께 글을 썼습니다. M과의 관계 후 남겨진 흔적들을 카메라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인위적으로 옷이나 신발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벗어놓은 그대로 찍습니다. 그렇게 찍은 40장의 사진 중 14장을 골라낸 뒤 각자의 글을 씁니다. 그 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 서로에게 공유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둘 사이에 규칙이 생겼다. 옷의 배치에 손대지 않을 것. 하이힐이나 티셔츠의 위치를 바꾼다는 것은 거짓을 조작하는 일이고 ─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기장 속 단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 우리 사랑 행위의 실재를 해치는 방식이었다. 아니 에르노, 10쪽

   사진 속 피사체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낡은 부츠, 하이힐, 청바지, 셔츠, 원피스, 속옷... 그러나 그것들의 무질서한 배열을 보고 있으면, 격렬했던 그들의 지난밤이 그려집니다. 침실도 아닌 현관 복도 앞에 흩어져 있는 옷들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신발끈을 풀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부츠 때문에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조급했을지.
   그들은 이렇게 내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일상적인 물건들만 사진 속에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더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상대방이 어떤 글을 썼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나는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가 또다시 분리되는 행위다. 가끔 두렵기도 하다. 글이라는 자신의 공간을 내놓은 일은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어떤 무의식적인 전략이 이미 실행되었을까. 단어와 문장을 견고하게, 꿈적이지 않는 문단을 만드는 것. 어린 시절 가끔 내 몸이 돌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방의 벽들이 끝없이 멀어졌던 것처럼 ─ 나중에 철학 수업 시간 이것이 조현병 증상이란 것을 배우게 됐는데, 놀라기는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에르노, 49쪽

   M을 만났을 때, 그녀는 유방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발을 쓰지 않은 머리도, 치료 때문에 기구를 끼고 있는 가슴도 M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녀는 "그가 암을 뛰어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70쪽)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 결핵이 그러했듯이 암도 로맨틱한 병이 되어야 한다고"(101쪽)도 말합니다. M과 함께했던 그 시절의 그녀는, 분명 로맨틱했습니다. 그녀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진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구현하는지는 알지만 용도는 알지 못한다. 마크 마리, 168쪽

   사진을 찍은 당사자도 모르겠다고 한 『사진의 용도』에 대한 의문점은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1940~)와 마크 마리(1962~)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이 이야기도 언젠가는 그녀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을까요? 사실 근황보다는 어떻게 만났는지가 더 궁금하긴 합니다만.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 조르주 바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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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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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
   파우스트는 괴테가 24세에 쓰기 시작해 죽기 직전인 82세에 완성한 인생작입니다. 이런 거대한 작품을 단 며칠만에 읽고 몇 자로 정리한다는 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다음을 위해 지금의 생각들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분명 몇 년 후 다시 읽게 되면 다른 생각들이 떠오를테니까요.)

   『파우스트』는 12,111행에 달하는 희곡으로 작품 전체의 서곡에 해당하는 「헌사」와 단장, 전속 시인, 어릿광대가 등장하는 「무대에서의 서연」, 그리고 주님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가 소개되는 「천상의 서곡」으로 시작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 내기를 할까요? 당신은 결국 그 자를 잃고 말 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내리리이다.

   주님 :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
   ─ 「천상의 서곡」, 23~24쪽

   주님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 '파우스트'를 두고 내기를 합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가 온갖 방법으로 유혹해 쾌락 혹은 타락의 길로 빠트리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 '파우스트'의 본성을 믿었기 때문에 파우스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떤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주님의 이런 방식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결국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한 인간의 삶에 개입하게 된 것이니까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허락하면서 말이죠.

   다음으로 이어지는 「비극 제1부」에서는 회의에 빠진 파우스트가 등장합니다. 그는 학문을 통해서는 우주의 본질을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합니다.

   파우스트 :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신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움직일 수 있지만,
   내 모든 힘 위에 군림하는 신은
   바깥을 향해선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리하며 내겐 존재한다는 것이 짐이 되고,
   죽음이 바람직할 뿐, 인생이 역겹구나.
   「비극 제1부」 90쪽

   그때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파우스트에게 제안을 합니다. 이 세상에선 자신이 파우스트의 종이 되어 파우스트가 온갖 즐거움과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줄테니 저 세상에서는 반대로 파우스트가 자신의 종이 되어 똑같은 일을 해달라는 겁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회의에 빠진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 이 세상에선 내가 하인 노릇을 하며
   당신의 지시에 따라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그 대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땐,
   당신이 내게 같은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파우스트 : 저 세상 따위는 개의치 않네.
   자네가 우선 이 세상을 박살내 버린다면,
   다음에 어떤 세상이 생겨나든 무슨 상관이겠나.
   이 땅에서만 나의 기쁨이 샘솟고,
   이 태양만이 내 고뇌를 비춰줄 뿐일세.
   이것들과 우선 헤어질 수 있다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든 될 대로 되라지.
   미래에도 증오와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 세상에도 역시
   상하의 구분이 존재하는지,
   그런 이야길랑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네.
   「비극 제1부」 94쪽

   파우스트 : 이건 엄숙한 약속이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비극 제1부」 95쪽

   메피스토펠레스는 우선 파우스트에게 마녀의 약을 마시게 해 그를 청년으로 만들어 줍니다. 20대 청년이 된 파우스트는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 그레트헨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레트헨은 한 눈에 메피스토펠레스가 악마임을 알아보았고, 그레트헨의 순수함은 쾌락에 빠진 파우스트의 마음까지 정화시켜 줍니다. 이에 메피스토펠레스가 농간을 부려, 그레트헨은 어머니를 죽이고 파우스트는 그녀의 오빠를 죽이게 만듭니다. 파우스트는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을 구하러 가지만,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용서하며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때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녀가 심판받았다고 말하지만, 위로부터 들려온 목소리는 "구원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비극 제1부」는 그레트헨의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파우스트 : 무지개는 인간의 노력을 비춰주는 거울.
   그것을 보고 생각하면,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리라.
   인생이란 채색된 영상 속에서 파악된다는 사실을.
   「비극 제2부」 16쪽

   「비극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전 속 최고의 미녀인 헬레나와 사랑에 빠져 아들 오이포리온까지 낳지만, 오이포리온은 이카루스처럼 추락해 죽고 헬레나도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파우스트는 엄청난 땅과 재산을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는 늙은 노인들이 쉬고 있는 보리수 나무 그늘까지 욕심냅니다.

   파우스트 : 저 언덕 위의 노인들을 몰아내고
   보리수 그늘을 내 자리로 삼고 싶다.
   내가 갖지 못한 저 몇 그루 나무들이
  세계를 차지한 보람을 망치고 있구나.
   저곳에서 사면을 둘러보도록
   나뭇가지 위에 발판을 만들고 싶다.
   멀리까지 시야가 터지게 해서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바라보겠다.
   현명한 뜻으로 백성을 위해
   넓은 복지의 땅을 마련해 준
   인간 정신의 걸작품을
   한눈에 둘러보고 싶단 말이다.
  
   부유한 가운데 결핍을 느낀다는 건
   우리의 고통 중에 가장 혹독한 것이다.
   「비극 제2부」 348~349쪽

   백 살 가까이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실현시켜 준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순간의 쾌락은 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에게 땅을 마련해 주기 위해 드넓은 땅을 비옥한 땅으로 개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외칩니다. 오래전 메피스토펠레스와 자신이 한 계약을 매듭짓는 외침을 말입니다.

   파우스트 :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메피스토펠레스 : 어떤 쾌락도 행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줄곧 찾아 헤매더니,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
   내게는 억세게도 항거한 놈이지만,
   세월 앞엔 별수없이 백발이 되어 모래 위에 누웠구나
   시계는 멈추었다 ─
   「비극 제2부」 363~364쪽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죽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갖지 못합니다. 구원 받은 그레트헨이 파우스트도 구원해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와 맺은 계약만 마무리된 것이지 사실 주님과 맺은 내기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진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그렇게 유혹했는데도 결국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길로 가지 않았고, 주님은 살아있는 동안만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파우스트가 죽은 이후에 개입해 그를 구원해 준 것도 내기의 기본 룰을 어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쓴 작품이라 배경이나 메시지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지 못하고 다소 산만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대에서의 서연」에서 이미 단장의 입을 통해 살짝 주지시켜 준 부분이기도 합니다.

   단장 : 우리 독일 무대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으니
   오늘은 배경이건 소도구건
   마음대로 사용해 보자고.
   (…) 천국에서 현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기까지.
   「무대에서의 서연」 17~18쪽

   아무리 괴테의 인생작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썼을 때의 괴테의 나이와 상황을 생각한다면, 또 비슷한 시기와 상황을 지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연결시켜 본다면 새겨두고픈 문장들도 많습니다.
   괴테가 그랬듯이, 『파우스트』를 읽는 우리들도 단 며칠동안 단숨에 읽어버릴 것이 아닌,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들여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 여인 : 내 이름은 결핍이에요.
   둘째 여인 : 나는 죄악이라고 해요.
   셋째 여인 : 내 이름은 근심이에요.
   넷째 여인 : 나는 곤궁이라고 하고요.
   셋이 함께 : 문이 닫혀서 들어갈 수 없군요.
   안에는 부자(富者)가 살고 있어서 들어가기 싫네요.
   근심 : 언니들은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서도 안 돼요.
   근심인 나는 열쇠구멍으로 살짝 들어가지만요.
   「비극 제2부」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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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뒷북소녀 >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 것인가.

11년전 11월 15일엔 참 부지런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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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1-15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땐 ‘알라딘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저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남기고 계셨군요. ^^
 
 전출처 : 뒷북소녀 >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이선 프롬,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용기

알라딘서재에 새로 생긴 기능인가?
11년 전 오늘, 내가 쓴 리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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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앙마 2018-11-16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 요거 어찌 하는 거임? ㅋㅋㅋㅋ

뒷북소녀 2018-11-16 18:13   좋아요 0 | URL
요거 페북처럼 예전에 제가 쓴 날짜되니까 자동으로 뜨더라구요. 북플 어플에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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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과는 싸우지 말자!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 뿐!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시학』에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비극'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세 명의 그리스 비극 작가를 소개합니다. 아이스퀼로스(BC525~BC456), 에우리피데스(BC484~BC406), 소포클레스(BC496~BC406)가 바로 그들인데, 그 중에서도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을 가장 완벽한 비극이라고 극찬합니다.
   소포클레스는 123편의 작품을 썼고, 비극 경연대회에서 무려 18회나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2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작품은 겨우 7편 밖에 남지 않게 됐습니다.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는 현존하는 그의 모든 비극(다른 세계문학전집에는 실리지 않았던)이 실려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천병희 선생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그 이후 그의 자식들에게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행 중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 「오이디푸스 왕」은 선왕을 죽인 살해범을 찾기 위해 부른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로부터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다시 전해 듣습니다. 원래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자랐지만, 포이보스(아폰론)로부터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자식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며,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60쪽) 신탁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오이디푸스는 사악한 신탁이 이뤄지지 않도록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가 또다시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언급하였고, 심지어 선왕을 죽인 것은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합니다.
   선왕의 왕비이자 현재 오이디푸스의 왕비이기도 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위로하기 위해 그 옛날 자신들에게 내려진 신탁을 피하기 위해 선왕인 라이오스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신탁은 아들이 라이오스를 죽이게 될거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들을 버려 신탁을 피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서 운명은 빗겨나가지 않았습니다. 선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버린 아들이 바로 오이디푸스였고, 선왕을 죽인 살해범도 오이디푸스였으며, 선왕의 왕비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취해 자식들을 낳은 사람도 오이디푸스였습니다. 이에 좌절한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찔러 스스로 눈을 멀게 만듭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 크레온에게 자신의 불쌍하고 가여운 두 딸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부탁합니다. 아들도 둘이나 있었지만 아들들은 어디로 가든 제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거라며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착한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함께 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눈과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메네가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두 아들의 소식을 전합니다. 에우리피데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데, 그들을 말리고 테바이를 이 재앙에서 구해낼 수 있는 건 아버지 오이디푸스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그리워하기 보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는 두 아들을 원망합니다.
   마침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도 오이디푸스를 테바이로 데려가기 위해 나타납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의 속셈을 꿰뚫고 있습니다. "자네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은, 나를 집에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라, 국경 가까운 곳에 데려다놓음으로써 자네 도시가 이 나라로부터 재앙을 피하려는 것이네."(187쪽) 이렇게 말하며 돌아가길 거부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오라버니들의 임박한 살육을 막기 위해 테바이로 돌아간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그러나 두 오라비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죽음은 애도하되, 다른 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매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죽음으로 다스리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굴하지 않고 크레온 몰래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어찌됐든 폴뤼네이케스도 안티고네의 소중한 오라비니까요. 화가 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죽이려 하고, 안티고네를 사랑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와 함께 죽으려 합니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뤼디케 또한 죽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시작된 비극은, 이렇게 비극에 비극을 또 낳습니다.

  
필연(必然)과는 싸우지 말자꾸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63쪽

  
「아이아스」는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중 맨 처음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둘러싼 아이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죽자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에 대해 그리스 장군들 사이에서 투표가 벌어지는데, 투표 결과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아이아스가 아닌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주어졌습니다. 이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아이아스가 늦은 밤 그리스 장군들을 습격해 그들을 죽이려 하지만, 아테나 여신의 힘으로 막히게 됩니다. 아테나 여신은 아이아스가 미쳐 장군들 대신 가축들을 도륙하게 만드는데, 정신이 돌아온 아이아스는 부끄러움을 느껴 헥토르에게 선물로 받은 헥토르의 칼로 자살합니다. 지략이 뛰어난 아니 얄미운 오뒷세우스는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아이아스가 죽고나자 그를 매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가멤논에게 청합니다.
   사실 아이아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뒷세우스는 지략은 뛰어나지만 결투에서는 약했으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머리로 싸움을 하는 오뒷세우스보다는 무공이 뛰어난 아이아스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더 잘 어울리고 필요했을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오뒷세우스는 그리스 장군들 뿐아니라 아테나 여신의 보살핌까지 한 몸에 받고 있어서, 독자인 저도 얄미운 건 사실입니다.


   「아이아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 역시 『일리아스』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트로이로 전쟁을 떠났던 아가멤논은 돌아와서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됩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일부러 자신이 죽었다는 전갈을 집으로 보냅니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머니와 아이기스토스를 원망하고 있던 엘렉트라는 마지막 남은 희망인 오레스테스 마저 죽었다고 하자 혼자서 그 두 사람을 죽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때 오레스테스가 나타나 복수를 시작합니다.
   사실 정부와 함께 남편을 죽인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도 약간의 사정이 있었는데, 그 사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리스 명궁
「필록테테스」는 트로이 전쟁 때 트로이로 향하던 중 독사에 물려 무인도인 렘노스 섬에버려져, 헤라클레스에게 물려받은 활로 사냥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활이 없으면 트로이아가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는 예언을 듣고, 오뒷세우스는 네옵톨레모스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필록테테스의 환심을 산 후 필록테테스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네옵톨레모스는 오뒷세우스만큼 간악하지 못해서 사실을 고백하고, 필록테테스는 헤라클레스의 혼백에게 계시를 받고 트로이아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오뒷세우스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결국 최후까지 남는 사람은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명장은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행운과 불행은 돌고 돈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고통의 바깥에 있는 자는 위험을 보아야 하며,
   잘나가는 자일수록 인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방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파멸이 닥치지 않도록.

  
「필록테테스」 439쪽

  
「트라키스 여인들」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여성들을 짓밟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가 죽자 그의 부인도 노예가 되었듯이, 전쟁이 터지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는 힘이 없습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긴 자의 뜻대로 이리저리로 끌려다녀야 합니다.
   아버지 에우뤼토스가 헤라클레스와의 싸움에서 지자 그의 딸 이올레도 포로가 되어 헤라클레스의 집으로 끌려옵니다. 다른 포로들과 겉모습이 남달랐던 이올레를 본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처음에는 연민을 느꼈지만, 남편 헤라클레스가 이올레를 얻기 위해 일부러 싸움을 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 그녀는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켄타우로스가 알려준 방법대로 켄타우로스의 피가 묻은 옷을 남편에게 입히는데, 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옷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극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이를 알게 된 데이아네이라는 자살하고,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레스는 아들에게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켜 달라고 합니다. 이 와중에도 헤라클레스는 이올레를 걱정하며 아들에게 부탁하니, 남자는 정말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소포클레스의 7편의 비극에는 모두 신탁이 등장합니다. 오이디푸스처럼 그 신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신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신탁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예정되어 있는 삶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는 운명론자였을까요? 만약 운명을 믿는다면, 이것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믿는다면 삶은 참 편할겁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혹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운명이 정해져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그 운명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니, 그 운명을 따를수도, 맞서 싸울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다가 알게 된 운명 따위에 집착하며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뿐입니다. 이것이 소포클레스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지요.

   「아이아스」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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