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때론 제목만으로도 읽는 이를 설레게하는 책이 있다. 책 읽어주는 남자라. 물론 책은 조용히 혼자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책 읽는 것마저 피곤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 누군가의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침대에서 잠드는 일, 생각만해도 멋지지 않은가.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나란히 누워 있기...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이 멋진 일을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소개한다. 아쉽게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감염에 걸린 미하엘은 길을 가다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였고, 우연히 이를 지켜본 한 여인이 소년을 도와준다. 며칠 후, 미하엘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그녀를 다시 찾는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 서른여설 살이며 전차 차장 일을 한다. 미하엘은 외출하기 위해 스타킹을 신고 있는 한나의 몸짓을 보고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미하엘의 첫 사랑은 시작됐다. 그녀로 인해 활기를 찾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미하엘은 매일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나누기, 나란히 누워 있기.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사라졌다. 미하엘은 자신이 그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8년 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된 미하엘은 법정에서 우연히 한나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나치 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하면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죽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미하엘은 한나가 그동안 꼭꼭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된다. 그 비밀만 이야기한다면 한나는 주범에서 단순 가담자로 처벌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나는 종신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비밀을 지키려 하고, 미하엘 또한 그 비밀을 알리려 하지 않는다. 

   다시 세월은 흐르고, 미하엘은 이혼 후 혼자 살게 된다. 법학자로서 일은 하고 있지만 일상은 시들시들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다시 책을 펼쳐든 미하엘은 소리내어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한나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미하엘은 카세트테이프에 자신의 책 읽는 목소리를 녹음해 그녀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이 일은 그녀가 수감된지 8년째부터 시작해서 18년형으로 사면 받을 때까지 꼬박 10년동안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한나는 스스로 글을 읽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됐지만, 미하엘은 그저 카세트테이프만 보낸다.
   드디어 그녀의 석방 날, 미하엘은 그녀의 출소 소식 대신 자살 소식을 듣는다. 

혼자 짊어지게 해서 미안해요, 대신 책을 읽어줄게요! 

   "사형집행인은 누구의 명령에 따라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는거요. 그는 자신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는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자신한테 방해가 되거나 그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하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요." (p163)  

   한나가 종신형을 감수하면서까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비밀은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이었다. 글도 모르는 그녀가 어떻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만 밝혔다면 그녀는 종신형을 받지 않아도 됐다. 죄의식보다 수치심이 더 컸던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다. 그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감시원 일을 했고,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고, 달리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저는 …… 제 말은 ……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습니까?" (p119) 그래서 그녀는 재판장에게 되묻는다. 

   전후 세대인 미하엘은 전범이자 그들의 부모 세대인 그녀를 비난하지도 못하고, 도와주지도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한나, 즉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p183)이었기 때문이다. 나치 시절, 그들이 행했던 일들은 어느 한 개인을 처벌한다고 해서 면죄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닌 전 세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운명이자 십자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나에게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한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 것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사실 한나에게 손가락질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한나에게 한 손가락질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선택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녀를 선택할 당시에는 그녀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하려고 해보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를 사랑할 때의 그 순진무구한 상태 속으로 나를 위치시켜보려고 했다. (p182) 

   한나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워서 그토록 꼭꼭 숨겨뒀던 비밀을 드러내면서 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책을 펼쳐놓고 미하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글을 배웠고, 미하엘에게 공들여 편지까지 썼다. 그랬던 그녀가 석방을 앞두고 자살한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미하엘의 책 읽어주는 행위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글을 모르는 그녀는 미하엘의 졸업식 모습이 담긴 신문까지 힘들게 오려서 간직하고 있었는데, 미하엘은 죄책감 이상으로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까.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제목에 반해 이 책을 처음 읽었고,  조만간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동명의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새 옷으로 갈아입은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울림은 여전했다. 미하엘과 한나의 끝을 알고 읽었는데도 한나의 자살 소식에 가슴이 철컥거렸다. 한나 역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은 이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졌다고 한다. 소설에서 느꼈던 울림을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09-21.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2009/02/26 by 뒷북소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우아 2009-03-0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에서도 뒷북소녀님을 만났네요.. 더구나 이주의 리뷰까지.. 축하드립니다^^

뒷북소녀 2009-03-09 17:44   좋아요 0 | URL
어머, 전 뽑혔는지도 몰랐어요. 오우아님, 감사합니다. :)

다윗 2009-03-09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소녀님, 이주의 리뷰 축하드립니다. ^^

뒷북소녀 2009-03-09 17: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다윗님도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