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 독서, 누구 마음대로 '필독'이니!
요즘 다른 사람들이 읽은 독서 리스트를 엿보는 재미에 빠져 있습니다. 그녀가 쓴 소설은 한 권도 읽지 않았지만 다양한 독서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어 준 백영옥 작가, 기대 이상의 글솜씨를 보여줬던 서민 교수에 이어 이번에는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문유석 판사의 리스트를 엿봅니다.
이전에 나왔던 그의 저작들은 (읽어보지 않아서)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쾌락독서』에서 그가 펼치는 글솜씨는 상당히 서툽니다. 책답지 않은 (SNS 글쓰기 같은) 혹은 판사답지 않은 (10대들 같은) 문장을 구사해서 간혹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솔직해서 이해하며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일부러 지난 날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지금 생각나는 그대로 썼을 뿐. 그래서 설명이 부족한 책들도 더러 있지만, 그런 설명(정보)들은 인터넷서점에서 충분히 검색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이 책을 펴는데 '판사'라는 직업 덕분에 일종의 어드밴티지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책을 계속 낼 수 있었고, 과분한 관심을 받기도 했던 이유의 70퍼센트 이상은 판사라는 직업이 주는 의외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량진 만홧가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고시생 시절의 내가 『개인주의자 선언』을 써서 출판사에 가져갔다면 뭐라고 했을까? 네네, 선언 많이 하시고요, 응원합니다. 파이팅!
그걸 생각하면 죄송함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교보문고 한가운데서 삼보일배를 할 수도 없고 '앞으로는 더 잘 쓰라는 채찍질로 알고 아마추어적인 글쓰기는 더이상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드릴 수도 없다. 애초에 나는 말이나 노새도 아닐뿐더러 SM 취미도 없기 때문에 채찍은 그다지……죄송. 그게 아니라 뻔뻔한 얘기지만 나는 완성도에 상관없이 내 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179~180쪽
그의 글이 어떻든, 그가 어떤 어드밴티지를 받았든, 책을 본 사람들의 책망을 걱정하면서도 이 글을 쓴 이유는 무엇보다도 책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미있어서 책을 읽고, 재미있어서 글을 씁니다. 세상에, 재미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죠. 그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부터 원본으로 봐야 보물임을 알 수 있는 『춘향전』, 『아라비안나이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만 소개합니다. 그에게는 꼭 읽어야 하는 '필독 도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책들만 있을 뿐이죠.
신나게 '책 수다'를 떨어야 한다고 하는 그. 그럼, 그의 '책 수다'를 살짝 들어볼까요?
어릴 적에는 나도 욱하며 어떻게든 마주 비꼬아주거나 반박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걸리버 여행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
① 험담이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경우 : 그래도 감사할 일이다. 내가 놓치고 있는 포인트를 결과적으로 알려준 것이니 면전에서는 싱긋 웃어주고 돌아서서는 잘 생각하여 내게 득 되는 쪽으로 참고하자.
② 일리는커녕 택도 없는 험담에 불과한 경우 : 그냥 싱긋 웃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배우면 된다. 안타깝지만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열등감, 시기심, 콤플렉스, 공격성, 또는 그냥 멍청함이 넘쳐난다. 더불어 살아야지 어쩌겠니.
③ 일리도 없을뿐더러 악의적이며 내게 실제 피해를 끼치는 경우 : ……본때를 보여준다.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32~33쪽
김연수의 상 받은 유명한 작품들보다 이런 소소하고 귀여운 문장들이 더 내 취향이다.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첫 작품 「벚꽃 새해」는 단편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글인데, 어느 한 부분을 오려낼 도리가 없으니 한번 읽어들 보시라.
나는 왠지 김연수 하면 동시에 김영하가 같이 떠오른다. 아까 '고양잇과의 글'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김연수가 수줍고 순둥순둥한 고양이 느낌이 강하다면 김영하는 성격 나쁘고 까칠한 고양이 같아서 매력 있다. 김영하의 글은 감성 과잉이라고는 '1도 없는' 쌀쌀맞음과 감탄스러울 정도의 이지적인 매력이 특징이다. 특히 뭔가의 핵심을 논리적이고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대치동에서 학원 강사를 했으면 일타 강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알쓸신잡〉을 봐도 내로라하는 말발의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유려하게 이야기하는 건 김영하더라. 55~56쪽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252~253쪽
여기, 독방에 갇힌 무기수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찮게 한 영문학 교수를 만나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게 된다. 이후 십 년간 이어진 수업의 결과, 무기수는 삶의 구원을 얻는다.
실로 놀라운 이 얘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라는 책의 줄거리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25세이던 1983년, 시카고 소재 쿡카운티 단기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삼아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봉사는 2010년까지 약 삼십 년간 여러 교도소로 이어졌다. 196쪽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 『속죄』는 키라 나이틀리, 제임스 매커보이 주연의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진실, 오해, 속죄, 문학의 본질 등 여러 실타래를 촘촘히 짜넣은 작품이지만 직업병은 어쩔 수 없어 나는 재판의 오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며 읽었었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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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들을 소개하면서 반대의 이야기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무엇이 별로라고 얘기하는 건 '그러는 너는!' 등등의 소란스러운 반응을 감수해야 하는 일"(72쪽)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독서 리스트를 공개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소개하면서 자신의 취향이 아닌 책들은 소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쭈뼛쭈뼛 고백합니다. 가벼운 문장들은 제 취향이 아니라고 (SNS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들은 가능하면 책에는 쓰지 않았으면, 나중에 이 말들이 유행이 지나가고 이 책을 펼쳤을 때 어쩌려고), 이 책 역시 제 취향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대신 읽고 싶은 책들은 장바구니 가득 담고 갑니다.
간접경험은 당연히 직접경험만큼의 깊이는 없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깊이 이해해본 적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남들의 삶을 읽기라도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