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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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 허에게

내 치즈는 있었을까
치즈 말고 다른 것은 없었을까
가끔 내 치즈가 작아 보였던 것은 왜일까
치즈 너머 빵이 보였던 건 착시였나

이름 한번 고약하다 치즈
애써 웃음짓기 위해 치즈
거짓된 순간을 확정 짓는 치즈

도대체 무엇을 알아들었는가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 나가 버린 시간
화산같은 소화를 통해 배설된 치즈

새로운 치즈의 방을 찾기 위하여
그대들 두려움을 이기고
새 치즈를 그리며
달려가는 길에
언뜻 하이에나의 그림자를 보거든
잠깐만 서서 생각을 해 보시게나
나 혹시 치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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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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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모든 사물은 정형적이고 한가롭다. 그러나 가까이 가 보면 거리감이 담지하고 있는 환영에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 누구에게나 자기들의 눈 앞에 있는 현실이란 것은 한가하지 않은 법이다.(p.82)

-호수 위의 백조라는 거지.

-희극의 묘를 알고 있는 작가. <새의 선물>이 그랬다.

아주 가끔 세상은 엄정하고 공이로운 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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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 여자 - 윤대녕 장편소설
윤대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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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오수의 잠결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어두운 계단 모서리에 지친 다리를 끌고 잠시 앉아 있다 일어나는 순간, 우리들의 기억은 한낫 낡은 실처럼 쉽게 끊어져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낯선 골목 모퉁이를 막 돌아 나올 때, 술에 취해 심야버스에서 혼자 잠들어 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난데없이 이별의 말을 듣게 되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p.208)

필립 글래스(미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미니멀리즘의 대가)의 <FREEZING>
 (폴 사이먼, 수잔 베가 등이 공동 작업한 음반 <Liquid Days>)

당신에게 만약
이름이 없다면
역사가 없다면
책이 없다면
가족이 없다면
당신이 만약
벌거벗긴 채 잔디 위에 누어 있다면
그럼 당신은 누구라고 해야지?
난 정말 모르겠다고 했어.

아마 좀 차가워질 거라고 했지

난 지금 얼어 가고 있어
얼어 가고 있어

                                    p.126~127

1.어디서 많이 봤어.

모든 이미지는 익숙하다. 하다못해 이계진 아나운서까지.
반쥴도, 무과수제과도, 오하시도, 인랑도, 화양연화도....
리얼함.
요즘의 소설들. 하루끼로부터 시작된 문화적code들의 습격

2.통신

-미아리 통신
-은어낚시통신
-사슴벌레통신
-비트와 바이트를 사랑하는 사람.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처럼, 그 맨 얼굴을 들이대는 것처럼 부상했다가 허황되게 스러지고 그것이 무슨 인생의 비의인 양 떠받들어 지는 그간의 행보를 멈추지 않을 것인가. 혹시 이것이 그 문학성의 원천이란 말인가? 그저 부웅 떠있었던 듯한, 이도 저도 없이 분위기에 익숙하게 전신을 맡겨 버리면 그만인 소설. 혼자 불도 켜지 않고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안녕~, 빠이~, 즐통~으로 오프가 되면 밀려오는 먹먹함을 소설을 읽으며 주워먹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3.조직

-사슴벌레 판매 루트
언제나 조직이 배후에 있다. 안정감을 얻고자 한다면 조직의 세포가 되면 되고, 그것이 어쨌거나 불온한 음모라면 피해 다니며, 불안에 떨며, 인간 심리의 모든 영역을 파헤치며, 그것이 인간의 자유라고 은근히 수긍을 강요하며, 지난하고 지루한 반항을 그려 내는 것이다. 역시 읽는 사람도 지겹다.

4.시간

-2시간 안에 읽어 치울 수 있다.
제2의 박범신을 보는 듯한. 이러다 윤도 어느 날 <빛의 걸음걸이>에, <은어낚시통신>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절필하고야 말까?

5.없는 것은 없는 거야

-이성호와 서하숙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지 못한.
-기억은 만들어 쌓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렇지만 잃어 버리고 찾지 못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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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보이 SF 걸작선 1
데이몬 나이트 외 지음, 앨리스 터너 엮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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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스물네편의 SF단편이 실려 있다. 여름이면 이런 류의 책을 잊지 않고 읽는데 역시 여름나기로는 그만이다. '마니아를 위한 SF걸작선'을 읽다가 어찌나 머리가 아프든지 던져 버리고 든 책이 이 책이다. 번역이 매끄럽질 않아서 비문투성이인 책을 보다가 깔끔한 번역의 이 책을 읽다 보니 우호호~, 기분이 좋아졌다. 

플레이보이誌는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림이 더 많은 잡지이나, 독자의 사회적 위신을 고려해서 글자도 넣는 덕분에 실리게 된 글들 중에 이런 보석들이 들어 있다. 실린 지면과는 상이하게 야하지 않은 점이 단점이기도 하겠으나, 읽고나서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들인 고로 강추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룬 것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 찾는 호사가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텍스트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개 SF는 아동용으로 생각돼서 작가들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데, 이런 잡지가 있어서 성인용SF도 쓸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 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읽다가 집어치웠다. 이 책과 비슷한 부류. 그러나 수준은 이만 못하다. 그저 베스트셀러작가의 것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많이 팔리는 게 역시나, 하게 만든다. 

읽다보면, 이 책, 사람의 상상 공간이 이렇게 넓구나, 하게 한다.  

이 여름에 다시 한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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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가방 -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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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라...... 글을 배운다는 것은 허공을 통과하는 연속적인 말소리의 분할과 편집을 통해, 달아나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번역해 붙들어 놓는 법을 배우는 일이고, 나아가 그 번역의 편차를 묵인하거나 무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글을 못 배운 사람을 까막눈이라 하지만 글을 배우면서 이러한 사각형의 틀 밖에 대해서 까막눈에 가까워진다. 그 틀 안에 들지 않는, 작업대 위에 올려 놓으면 자꾸만 미끄러져 시야를 벗어나는, 뭐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사물들과 이미지의 세계는 우리에게 블랙홀이 된다.(p. 9)

; 한글을 깨우치는데 힘겨운 아이들이 있다. 특별히, 상대적으로 기호(symbol)에 약한 아이들 얘기인데, 그 아이들은 아마도 이 분별력이 제 힘을 발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분절된 틈새를 느끼거나 보거나 듣는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이들에게 분절의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은 어쩌면 비극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사각형의 세상을 무리없이 살아가려면, 존재와 존재의, 사물과 사물의 틈새를 바라볼 수 있는 풍요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 그러나 기호란 익혀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한 아이들을 위한 동화의 모티브로, 위의 부분은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 이 풍성한 세계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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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고 명료한 세계의 합리성, 혹은 안정성.        블랙홀에 빠지는 모험. ^^;

-집은 모든 길의 출발점이고 도착점이다. 그것은 生家에서 시작해서 무덤으로 끝나는 두 개의 점들 사이에 놓이는 간이역들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아나는 길들, 그 흘러가는 선 위에 정지된 점을 찍어두는 일과 같다. 그래야 우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할 수 있고,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다.

........

여행은 이러한 집을 떠나서 길에 몸을 맡기는 것이지만, 그 길의 시적과 끝에는 언제나 집이 있다. 여행자는 돌아오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에서도 이 점은 다르지 않다. 집을 아예 버리고 떠나는 家出조차도. 새 삶을 위한 새로운 집으로의 도착이 전제되어 있다.(p. 82~83)

; 좀처럼 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이 사람. 조각가다. 아마 책 뒷표지에서 위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선뜻 들지 않았으리라. 이미 알고 있던 바도 있지만, 한동안 잡지사기자였던 이력이 드러나는 글솜씨다. 그러나, 자꾸 본말전도에 빠지고마는 그의 글쓰기는 중간중간 읽는 흐름을 끊었다. '식탁'은 '다리'를 소외시키고자 생긴 것이 아니며, '의자'역시 그러하고(허리를 위해서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소리는 위협하기 위해 쓰이기 보다는(효과가 있지만) 장난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우리 주위의 사물들.  대개는 네발짐승이 직립함으로써 생긴 기제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이의 말들이 사물의 뒷면에 대한 것들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사람의 손에서 바닥으로 막 떨어진 손수건은 방금 자신을 붙들고 있던 손가락들의 흔적과 가볍고 부드러운 천조각으로서의 자신의 본성 사이에서 결정을 못한 채 망설이다가 일시에 멈춘 모습을 보여 준다. 손수건에게 주어졌던 그 찰나의 자유가 그것에 유일무이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어떤 형태를 불어 넣는다. 아, 사물들이란 어쩌면 하나같이 이토록 우리를 떠날 궁리들만 하는 것일까. 잠시만 손 밖으로 미끄러져도 그놈들은 제가 하고 싶은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가능만 하다면 눈에 안 띄는 구석으로 은신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아무리 사물들에게 정을 들여도 허사일 뿐, 그들은 언제라도 우리를 떠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p. 189)

;과연 그렇다. 놀란 것은 이 이가 잃어버린 우산을 이야기했을 때다. 그 기억은 내게 있어도 어찌나 명료한지, 혹시 내 우산이 그가 잃어버렸다는 그 우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마주침은 가끔 독서 중 일어나는 경험인데,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우주가 신비해진다. 

-구겨져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 속에는 명료하게 파악되는 어떤 내적 질서가 없다. 그 안에는 우연히 포착된 허공, 빈 공간 말고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다.(p. 189)

;이것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을 도판으로 본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작품이다. 조각이나 그림을 볼 때, 이런 부대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또한 누림의 영역이 한발짝 더 펼쳐지는 것 같아서 책을 읽는 재미가 배가된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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