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역시 '우연'에 기대는 솜씨가 탁월하고, 역시 '우연'을 말하는 힘이 거세다.

 등장시킨 모든 작가들 그러니까 주인공 시드니 오어나 존 트로즈, 두 명의 실비아 모두 허구 속의 인물이란 걸 알면서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고 그들의 작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심는 힘을 오스터는 다시 발휘한다. 그러나 모두 가짜들. 그들은 다만 오스터가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탐구했는지 눈치채게 만드는 이상한 인물들. 그들에게 속아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역시나 특유의 환상적인 우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전작 <환상의 책>을 읽으며 나는 오스터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름지기 '창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작가'야말로 이렇게 캐릭터를 구현해내야 하는 것이다, 했었다. 모두 가짜여야 하고 게다가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덕으로 <뉴욕 3부작>을 읽게 되었고 실은 약간 지쳤다. 초기작이긴 해도, 그리고 뉴욕을 가보지 못한 시기였으므로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언뜻 멈춘 적이 있었다. 바로 주인공 퀸이 빨간 공책을 사가지고 나오던 그 부분.  

 그는 어느 것을 고를지 정할 셈으로 공책더미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맨 밑에 있는 빨간 공책을 사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그는 빨간 공책을 뽑아 내어 엄지로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기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빨간 공책이 왜 그렇게 마음을 끌었는지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공책은 가로 21, 세로 27센티미터쯤 되는 표준형 백 장짜리였다. 하지만 뭔가가 그에게 호소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의 어떤 유일무이한 운명이 그의 펜에서 나오는 말들을 잡아 두려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 느낌이 너무 강해 당황해 하면서 퀸은 그 빨간 공책을 옆구리에 끼고 금전등록기 쪽으로 걸어가 값을 치렀다.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中 

 나도 그런 노트가 있다. 그것도 다섯 권이나! 스프링이 달린 공책. 속지 위의 괘선이 마음에 든다면 더욱 좋다. 아주 좁은 칸으로 그어진 괘선 사이에 연필심을 붙이면 머리부터 가슴까지 엉망진창으로 뭉쳐 있던 실이 좁은 파이프 속을 지나가는 물길처럼 아주 빠르게 실타래를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그 속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다.

 아마도 다르겠지만 소설가 오어는 우연히 들어간 이상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파란공책을 사기에 이르고 그 공책에는 예언, 말하자면 신탁을 적어 넣게 된다. 마치 H. D. 쏘로우가 신이 나의 어깨를 들어 쓰게 한 것처럼 오어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기술하고 그걸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모든 작가들이 아마도 그런 신탁의 두려움이 자기 마음 속에 찰랑거리고 있음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으로 쓰여진 그대로 작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 아이를 가진 아버지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 쓰지 않으며 결혼한 여자는 불륜에 대해 쓰지 않으며 젊은이는 유서같은 글을 쓰지 않으며 늙어서는 어린 소녀와의 격정을 쓰지 않는다. 다만 그러려고 할 것이다. 때로 그것이 신탁이었음을 아주 일을 그르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니까. 일단 씨앗조차 뿌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 그리하여 아예 작가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 나도 그런 얘기를 써본 적이 있다.

 

……그의 시체 위에는 볼품없는 푸른 색 두꺼운 비닐이 덮여 있었다. 여름 휴가철의 막바지였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여전히 자기 부각에 온힘을 부어대고 있었고 그 아래,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은 하드 아이스크림이나 생수통 아가리를 입에 물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썬글라스와 모자, 구명조끼 같은, 여름 해변에서는 희소가치를 잃는 물건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가리고 그 존재의 개별성을 흐리게 하는 오후의 해변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검은 그 해변에서 독특했고 더불어 그 주검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의 웅성거림 역시 다른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일 년에 한 번뿐인 보너스를 즐기러 온 휴양객들은 그의 주검 옆에 둘러서서 휴가 막판에 건진 이 횡재의 기쁨으로 가슴팍이 다 아팠다.
휴가 계획을 짜면서 들떴던 가슴이 무더운 여름 한 철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줄곧 눈과 코를 막아 가며 끔찍하게 더러운 이 휴양지에 대한 분노를 삭이려고 경주한 노력이 얼마였던가. 그래서였을까. 그들 주위에 한 개씩 두 개씩 늘어 가는 오물들은 오히려 그들의 아량처럼 보였다.
여기, 더럽기 짝이 없는 이 곳에 내가 있어 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 오물들은 또한 자신들을 해마다 배신해 왔던 여름 휴양지에 대한 최선의 보복이기도 했다. 개중에 어떤 사람이 그처럼, 그야말로 재수없게 자신의 육체를 하릴없이 해변에 오물로 헌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곧 돌아가 시작해야 할 일상을 가슴이 터질 정도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휴가의 클라이막스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해변에 누워 얼굴 위까지 푸른 비닐을 덮은 그도 그저 막연히 생각은 한 번쯤 해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주검을 둘러싸고 희미한 신음을 흘리고 또는 격렬한 입놀림으로 그의 죽음의 원인을 탐구했던 그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간 첫날을 어떤 식으로 시작하고 마감하는지.
새벽 전철에 시달리다 겨우 사무실에 도착하여 퉁퉁 부은 얼굴로 그의 주검이 함께 했던 그 휴가를 자기 생애 최고의 것이라 떠벌이고, 시체가 되어 떠내려 왔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조 하던 중에, 혹은 그가 아름다운 애인을 구출하려고 뛰어 들었다가 그만, 아니, 그것은 바로 복수였어,하는 식으로 왜곡되는 장면 장면을. 식당에서, 화장실에서, 도서실에서, 미장원에서, 해가 중천을 거쳐 건물들 뒤로 사라져 버릴 때까지 잠시도 다물어 있지 않을 그 수많은 입들. 그들의 얼굴에 지난 며칠 동안 해풍에 빼앗겼던 기름끼가 드디어 번지고 그 위에 하루의 피로도 덕지덕지 앉을 것이다. 그들의 옷 위로, 그들이 걷고 있는 보도 위로 떨어지는 밤.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의 웃음소리와 마누라의 두 다리, 그리고 혼곤함까지.
그는 상상해 보았을까?
그러나 어찌됐든 결국 그의 죽음이 그 누구에게인가 일생을 뒤바꿀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는 그도 우리도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누운 그를 가운데 둔 사람들. 둘러선 그들 중에는 그의 퉁퉁 부은 얼굴에서 파헤쳐진 눈알을 떠올린 엄청난 상상력의 소유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흙에서 썩어질 것. 노획의 행운을 잡은 물고기가 제 생명을 그 눈알로 하여금 윤기 있게 만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은밀히 치를 떤 사람도 그들 중에는 있었으리라. 한동안 갈치 같은 생선은 입에 대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가슴 한 구석에 옹골지게 다지고 있을 비위 약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한동안이 흐른 뒤 결국 허기라는 반찬 옆에 놓인 갈치구이에서 그의 파내어져 치밀한 소화를 거친 눈알을 더 이상 상기하지 않기로 다시금 옹골지게 다짐할 그 사람. 산다는 것을 때로는 무척 편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아주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인 그 사람……

……놀랍게도 다만 한 사람, 그의 죽음으로 인생 행로가 그때까지와는 약간 다르게 방향을 튼 사람이 그 오후의 해변에 있었다.
그날 해변에서는 참가할 시인의 위촉 문제로 다른 해 같지 않게 한없이 지연됐던 여름 시인 학교가 뒤늦게 열리고 있었다. 마침 백일장이 진행 중에 있었고, 그 시간, 백일장에 참가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나긴 시상 탐색의 여독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 때 사람들 무리와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파도가 발 밑의 모래를 훑고 돌아가고 그 남은 거품이 폭폭 꺼져 가며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저만치 아이들은 제 몸뚱어리보다 큰 고무 튜브에 안겨 소리를 지르고, 수영에 자신이 있는지 저기까지,하고 외치며 바다 깊숙한 곳을 향해 떠나는 남자도 보였다.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앉아 있는 여자의 빈 원고지 위에도, 물을 튕기며 즐거운 아이들의 고함 소리에도, 해변을 떠나 저기로 가고 있는 남자의 내젓는 두 팔에도 죽음의 예감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 여자가 안전한 해변의 경계를 알리는 흰 공을 거쳐 멀리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는 통통배로 시선을 옮기며 아주 상투적인 시상에 몸과 마음을 맡기려고 하고 있을 때 그 여자의 눈 앞에서, 그의, 생명이 떠나간 퉁퉁 불은 큰 손가락이 바닷물 위로 넘실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푸른 물, 다시 손가락, 규칙적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고. 또.
멀리서도 그 여자는 다가오는 그것이 주검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온몸으로 그 여자는 죽음의 의미에 종종 깃드는 분노를 느꼈고, 얼마 되지도 않는 지방질을 감싼 피부 전체가 한꺼번에 터져 버리는 듯한 심한 아픔을 견뎌야 했다. 그 여자는 소리를 질렀고 곧 목이 아팠다. 그 여자가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도 죽을 때까지 약간의 불편도 없이 말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은 그야말로 그녀가 속한 인간의 생물학적 신비의 영역이다.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말자, 우리.
햇볕에 그을려 눈의 흰자만 유독 청어등처럼 새파래 보이는 구명 대원들이 그의 주검을 들것에 실어가 버리고, 그의 주검과는 무관해진 휴양지의 웅성거림이 교미의 비유적 언어로 수치의 허물을 한 꺼풀 두 꺼풀 벗어 던지는 푸르스름한 저녁에, 해마다 한 번 있는 여름 시인 학교가 백일장의 당선작을 발표했다.
  
    오  늘

 

바다가 그를 죽였다
바다가
그를
죽였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로 꾹꾹 눌러서 그렇게 쓴 사람은 그 여자였다. 그것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당선을 꿈꾸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시를 보면서 항상 느껴 왔던 자신감도 그 날엔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물에 불은 시체의 손가락만이 들고 있던 흰 종이 위에 그려졌고 그것이 그런 글자들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자기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 여자가 그토록 담담했던 이유. 그 여자는 그 때, 이를테면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바람도 파도도 없는 그 바다 위. 그 여자가 언제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 여자 자신도. 그 시체는 그 여자의 심장을 화석으로 만들었고 제대로 뛰지도 않는 심장을 그 여자는 그대로 부여 안고 있었다. 기실 시인이라는 이름은 그의 주검이 준 충격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고 당시 그 여자에게는 그 충격의 갈무리만도 역부족이었다.
어찌 됐건 그의 죽음은 그 여자를 말 그대로 시인이 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감탄했고, 그들 모두가 그 시체가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가 재현해낸 것을 고도의 예술적 형상화가 창출한 시적 상징인 것으로 인식했다. 그 여자는 해변의 저녁놀 속에서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당연한 것이라 인정한 시인이란 이름의 상품을 받았다.
그날, 여름 시인 학교가 형식적인 폐교식을 마치고 해변의 주점에서 밤늦도록 거나한 졸업 연회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시인의 탄생. 속으로 그 여자는 부르짖었다. 위대한 시인의 탄생쯤에는 항상 붙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여자가 꿈 속에서조차 목말라 하던 시인이라는 이름을, 시인이라는 꿈같은 삶을 하필이면 다른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했다는 이 사실을 그 여자는 비극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다시는 바다를 찾지 않겠다.
한 인간의 죽음이 있고서야 새로운 시인 하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우주적 섭리의 비정함이 가슴에 사무쳐 와서 특별히 그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과 책임감을 두 어깨에 짊어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작가의 처녀작은 분명 그 작가의 일생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그 작품의 내용과 유사한 종말을 맞이한다는, 신비성마저 띤 항간의 일설을 갑작스럽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비극은 문학으로 족해. 그 여자는 이제 그야말로 처녀작을 의식해야 하는 예술가인 것이다.
해변으로 내려올 때와는 아주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 여자는 여름 시인 학교가 대절한 관광 버스에 올라 창가에 팔꿈치를 얹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운명 속에 든 무엇이었고,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시로 인해 가치 있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무래도 그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해변에 나타난 의문의 시체에 묻혀 버릴 것만 같은 불안도 한편에는 생겨났다.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관한 얘기보다는 그의 처절한 주검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 얘기라면 자리까지 옮기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 시가 순전히 그의 주검이 선물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결정한 채 축하 인사를 해 오는 사람들이 싫었고, 이번 당선작은 해변의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판정 기준이 왜곡된 상황에서 선정된 것이므로 그 여자를 공정한 당선자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수근거리는 의자 뒤쪽 한 무리의 사람들은 더욱 싫었다.
그 여자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검은 증오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작별인사를 해야 했을 때, 그 여자는 같이 시인 학교에 참가했던 시인 지망생들의 얼굴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오늘 이전의 일은 모두 잊어 버리도록 하자. 어찌됐건 나는 이제 시인이다. 모두 잊기로 하자. 그 손가락을 잊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사람이 어쩌다 그 바다에서 떠오르게 되었는지, 왜 그가 거기서 그렇게 끄집어내져야 했는지, 아니 그가 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실제로 경험을 했으니 그의 생애를 소설로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다. 훨씬 리얼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그 여자는 소설가도 넘보고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그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마저 북을 치듯 가슴을 두드렸으므로 새 희망이 부풀어 올라 여자는 몸까지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더 나간다면 그 여자는 르뽀 작가까지 넘볼 것 같다. 하기야 오히려 그 쪽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 창작 과정에 깃들 그 많은 불안을 피하고 동시에 그 미래 또한 확고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재능이 거기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여자의 시가 어쩌면 그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투시일른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편, 그 여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주하게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자기 몸에서 온기가 빠져 나가는 바람에 시인이 된 욕심 많은 그 여자를 평생토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주검은 그 여자와는 아주 다른 경로로 해서 살아 있던 그의 거처인 서울로 옮겨졌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바다가 그를 죽였다
바다가
그를
죽였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로 꾹꾹 눌러서 그렇게 쓴 사람은 그 여자였다. 그것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 여자는 당선을 꿈꾸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시를 보면서 항상 느껴 왔던 자신감도 그 날엔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물에 불은 시체의 손가락만이 들고 있던 흰 종이 위에 그려졌고 그것이 그런 글자들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자기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 여자가 그토록 담담했던 이유. 그 여자는 그 때, 이를테면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바람도 파도도 없는 그 바다 위. 그 여자가 언제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 여자 자신도. 그 시체는 그 여자의 심장을 화석으로 만들었고 제대로 뛰지도 않는 심장을 그 여자는 그대로 부여 안고 있었다. 기실 시인이라는 이름은 그의 주검이 준 충격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고 당시 그 여자에게는 그 충격의 갈무리만도 역부족이었다.
어찌 됐건 그의 죽음은 그 여자를 말 그대로 시인이 되게 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감탄했고, 그들 모두가 그 시체가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가 재현해낸 것을 고도의 예술적 형상화가 창출한 시적 상징인 것으로 인식했다. 그 여자는 해변의 저녁놀 속에서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당연한 것이라 인정한 시인이란 이름의 상품을 받았다.
그날, 여름 시인 학교가 형식적인 폐교식을 마치고 해변의 주점에서 밤늦도록 거나한 졸업 연회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는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꼈다.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시인의 탄생. 속으로 그 여자는 부르짖었다. 위대한 시인의 탄생쯤에는 항상 붙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여자가 꿈 속에서조차 목말라 하던 시인이라는 이름을, 시인이라는 꿈같은 삶을 하필이면 다른 인간의 죽음에서 시작했다는 이 사실을 그 여자는 비극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다시는 바다를 찾지 않겠다.
한 인간의 죽음이 있고서야 새로운 시인 하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우주적 섭리의 비정함이 가슴에 사무쳐 와서 특별히 그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과 책임감을 두 어깨에 짊어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작가의 처녀작은 분명 그 작가의 일생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그 작품의 내용과 유사한 종말을 맞이한다는, 신비성마저 띤 항간의 일설을 갑작스럽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비극은 문학으로 족해. 그 여자는 이제 그야말로 처녀작을 의식해야 하는 예술가인 것이다.
해변으로 내려올 때와는 아주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 여자는 여름 시인 학교가 대절한 관광 버스에 올라 창가에 팔꿈치를 얹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운명 속에 든 무엇이었고, 그의 죽음은 그 여자의 시로 인해 가치 있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무래도 그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해변에 나타난 의문의 시체에 묻혀 버릴 것만 같은 불안도 한편에는 생겨났다.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은 그 여자의 시에 관한 얘기보다는 그의 처절한 주검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 얘기라면 자리까지 옮기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 시가 순전히 그의 주검이 선물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결정한 채 축하 인사를 해 오는 사람들이 싫었고, 이번 당선작은 해변의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판정 기준이 왜곡된 상황에서 선정된 것이므로 그 여자를 공정한 당선자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수근거리는 의자 뒤쪽 한 무리의 사람들은 더욱 싫었다.
그 여자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검은 증오의 대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작별인사를 해야 했을 때, 그 여자는 같이 시인 학교에 참가했던 시인 지망생들의 얼굴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오늘 이전의 일은 모두 잊어 버리도록 하자. 어찌됐건 나는 이제 시인이다. 모두 잊기로 하자. 그 손가락을 잊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사람이 어쩌다 그 바다에서 떠오르게 되었는지, 왜 그가 거기서 그렇게 끄집어내져야 했는지, 아니 그가 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실제로 경험을 했으니 그의 생애를 소설로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다. 훨씬 리얼하게 쓸 수 있을 거야.
그 여자는 소설가도 넘보고 있었던가 보다. 그리고 그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마저 북을 치듯 가슴을 두드렸으므로 새 희망이 부풀어 올라 여자는 몸까지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더 나간다면 그 여자는 르뽀 작가까지 넘볼 것 같다. 하기야 오히려 그 쪽 방면으로 나가는 것이 창작 과정에 깃들 그 많은 불안을 피하고 동시에 그 미래 또한 확고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재능이 거기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여자의 시가 어쩌면 그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투시일른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편, 그 여자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분주하게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자기 몸에서 온기가 빠져 나가는 바람에 시인이 된 욕심 많은 그 여자를 평생토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의 주검은 그 여자와는 아주 다른 경로로 해서 살아 있던 그의 거처인 서울로 옮겨졌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내 글이야 허접하기 짝이 없으나 아무래도 나는 <신탁의 밤>을 덮으면서 내가 쓴 이 '항간의 일설' 을 떠올리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내가 특별히 사랑하게 되는 공책을 살 수 있고, 그 공책에 신이 불러주는 그대로 어떤 글을 옮겨 적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독 그 공책이 사랑스러웠으므로, 내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이 거기에 자리잡고 제맘대로 진화해 버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의 일생, 혹은 나의 轉機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란, 글쓰기란 그만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 앞의 오스터가 우연을 예언으로 대치시키는 기술은 어쩐지 좀 섬세하지 못했다. 그 갑작스러움도 그랬고 내팽개친 보언이 그렇고 유령의 성처럼 나타나는 장의 문구점도 그렇다. 좀 길어야 했다. <환상의 책>이나 <달의 궁전>만큼 좀더 피터지는 백지와의 전쟁을 치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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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서 <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가 나왔다. 선정위원은 김사인, 이남호, 이광호 제씨. 아직 겨우 16수 읽었다. 한 해를 이렇게 요약한다는 건 참 건방지지 않은가 싶기는 하지만 의외로 내 대신 살아준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어서 매번 고맙게 읽고 있는 시리즈다. 16 수 읽는 중에 남는 것,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발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일제히 오므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고형렬, '고니의 발을 보다' 부분

 

이다. 오므리며 들어올린 발에 아무것도 없다니, 오므려도 움킨 것이 아니니.... 아마도 꽤 오래 생각하게 생겼다. 

또 하나,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개조개는 무지 크고, 대개는 어물전에서나 보고, 재수 없으면 지나가다 얘가 쏘아대는 물총을 한 방 얻어 맞는 수가 있고,  최소한 하나에 천원 이상하는 얘를 사다가는 거의 다지다시피하여 된장찌개, 혹은 미역국을 끓여 온식구 둘러앉아 짭짭 먹어치우는 것. 뭐 때로는 구이도 해먹지만. 그런데 그렇게만 보인 게 아니라, 살아있나 보려고 건드려보는 그 조개의 발足(어떤 어부는 혀舌라고도 하고)을 보고,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니, 그게 최초의 궁리, 가장 오래하는 궁리래네. 에이, 눈앞이 흐릿해진다. 가엾고 애틋하다, 그들의 맨발. 다, 속까지 다 보이는 빙어가 된 것같다.


작년 이맘 때, 문태준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읽었다. 젊은 시인. 그러나 속은 꽤 늙은 사람. 내어놓는 시마다 잔잔하게 마음을 술렁이게 해서 한번 읽고 넘어간 것이 없었다. 올해 가장 좋은 시에 가장 많이 추천되기도 했다, 저 '맨발'. 새 봄에 읽고 지금 다시 읽는 나 또한 참 좋다. 참 뭉툭한 바늘, 그러나 아주 긴 바늘에 푸욱 찔린 것같다. 바깥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들... 다 저리 맨발일 것을... 우리 생애, 모든 걸음이 다 그렇게 맨발인 것을.

밤마다 입을 다무는 집 안에 그 맨발 따숩게 지져주는 구들이 있기를

세상 모든 집이 다 그리 따스하기를

맨발 보듬는 살 보드랍기를.


여기까지가 20 수 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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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 솔출판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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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2년에 출간된 책을 98년에 사서 건들 읽었다.

실은 장기와 관련된 책을 읽고 싶어서 책방을 뒤지다가 발견한 책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하면 '설국'의 감동을 입은 지 오래되고 뿐만 아니라,

그게 참 오래도 가는 것이어서 '명인'을 발견했을 때는 상당히 반가웠다.

그러나 이 책은 바둑관전기 쯤으로

바둑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그 속에서 재미를 찾기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소설을 읽듯이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나가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대개 좋은 소설가의 이러한 책들은 오히려 그의 소설보다 한번쯤 더 읽어야 한다.

그때에서야 속에 든 문장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인데,

물론 번역문장이라 그 좋고 나쁨을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는 것쯤은 이미 나도 알고 있지만,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독특하고 그 전개의 방향이 예외없이 신선한 것은

오히려 번역된 이국의 글에서 자주 느낄 수 있었으므로

다시 읽고 있는 '명인'도 그런 측면에서 상당히 재미난 책이 될 것 같다.

바둑을 모르니 뒤에 첨부된 기보를 읽을 수 없고

하여, 손에 땀을 쥐었다는 신경림씨의 말씀도 저 하늘의 태양일 뿐.

그러나 지금까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날씨 이야기만도 읽기에는 즐겁다.

 

현재로서는 어쩌지 못하고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생각을 했다.

저물어 가는 한 시대의 뒷모습이 여지없이 아련하게, 애틋하게 그려진다.

하여, '명인'의 뒤는 '사양'이로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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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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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단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은 것이 전부인데 그걸로 전부인 이유는 그를 읽기가 그다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오래되서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데 다만 그 작품, 리얼리티보다는 독자의 플렉시빌리티에 전적으로 기대는 당시의 소설적 경향의 서장 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와 다른 일반 독자들은 왜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일까. 그때 서양그림 속의 마라로 시작되는 소설을 읽으며 이 소재나 감각은 바로 하루키로구나, 했던 기억이 조금 난다. 그래, 그랬지, 그때. 그러나 그의 대중적 인기도를 생각하면 읽어 볼까 하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음을 고백한다. 김영하는 영향력이 있는 작가다.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 를 읽으며 가족에 대한 환상을 생각하긴 했는데. 이런 가족도 물론 있겠지, 했는데. 어째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어쨌거나 야심있고 성실하고 믿음직한 오빠는 가족의 근간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읽으며 오히려 나는 그런 오빠가 없는 가족 생각이 더 나서 슬펐다. 더구나 그런 오빠들에게 기대어야 하는 이 가부장적 남성사회를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설이니까. 더구나 유약한 남자, 글쟁이가 생각한 이야기니까 뭐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지, 했다. 이런 류의 현실은 소설 속보다 훨씬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서러운 법이다.

말미에 수록된 소설들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들어 있다. 그 설명을 읽으며 작가가 한 얘기가 그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글쎄, 나는 잘쓴 소설이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이 소설집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막연히 낚싯대를 걸어놓고 물리기를 기다렸다는 소설집. 그래서였을까? 뚜렷하게 환기되는 형상이나 분위기나 낱말이나 인물이 없어서 좀 아쉬웠다. 한 개의 부각된 사건이 있으나 왜 이런 것들을 눙치고 숨기는 버릇이 들고 만 것인지 우리 현대단편의 모호함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 명확하지 않은 단편이야말로 신춘문예의 악폐. 뭐 그리 심오하다고 자꾸 바닥에 침몰시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제목은 이상하게도 일본 소설 <아버지가 사라졌다>를 연상시켜서 은근히 기대를 했었는데. 그만한 신실하고 조밀한 묘사를 보는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소설을 쓴 그 노역에는 별 세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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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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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의 슈바빙 이야기. 최하림인가가 쓴 전혜린의 평전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삼십이 넘어서야 읽었다.

그녀가 번역한 책은 몇 개 읽었으나 전혜린 그 자신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복에 겨워서, 세상에 어린 자식을 남기고 자살을 해 버리다니, 그것도 겨우 나이 서른을 넘긴 주제에. 이것이 이유였다. 당시 나는 유복한 가정의 아이가 지적인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특별하게 자란 것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다른 애들처럼 전혜린에 부화뇌동 않기로 혼자 결심하고 전혜린을 외면한 채로 이십대를 건넜다. 그래서 삼십이 넘어서야 전혜린 평전을 집어들었고 결국 이유야 어찌됐든 이십대에 전혜린을 읽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그때 읽었더라면 나는 내 환경을 저주했을 것이고 끔찍하게 건방졌을 것이고 불가피하게도 자살을 생각하고 실천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치기나 객기 같은 것은 대개 당면한 개체에게만은 절대적이니까. 그러나 이즈음 나는 그때 전혜린을 읽었더라면 지금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훨렁훨렁, 이십대를 그토록 허무하게 술이나 마셔대며 보내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아주 허망한 것만도 아니니, 젊은이는 1960년대나 1980년대나, 뮌헨의 슈바빙에서나 서울의 신촌에서나, 반항적이고 저항적이고 그지없이 가난했다. 담배연기와 맥주냄새, 소주냄새로 가득찬 술집에서 몇 년이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걸치고  제대로 빗지도 않은 머리를 마주대고 앉아서 과연 술만 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름만 슈바빙이 아니었을 뿐. 슈바빙이라는 이름을 단 장소는 오히려 종로에 있었다. 

종로의 슈바빙. 그저 시끄럽고 얄팍한 술집에 지나지 않았던 그 슈바빙은 전혜린의 슈바빙. 그러나 그녀의 슈바빙은 그때 내가 상상하고 코웃음치던 종로의 그 슈바빙이 아니다. 허수경이 독일에 가 있는 이유도 이런 촉발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슈바빙에 가보고 싶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는 참이다. 전혜린은 왜 자살했을까. 그 자살로 아직까지 그 둘렀던 머플러 하나도 소장자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전혜린이 죽은 이유를 곰곰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이유였단 말인가.

이 책에 그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그래도 자살자들은 자기 생을 걸 만큼 진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스스로는 어쩌지 못한다는 우울증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그 심정을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고도 하고. 그러하니 이 책을 통해 본 것은 당시 이만한 '여성'이 없었을 거라는 것. 나아가 그래서 그토록 많은 청년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라는 점. 거기에 동년배 여성들의 막연한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 또한 추가! 그리고 그녀가 들려 주는 해외 소식이란 당시엔 목을 빼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라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대에 그녀가 살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실, 이 전혜린과 닮은 지금의 '여성'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뭇남성들의 그녀에 대한 애정에서도 느꼈던 바이지만 여자인 나로서도 그녀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전혜린도 그 시대, 그런 인물 중 하나였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매혹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이 생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을 느낀지 오래이니 전혜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

기형도와 더불어 일찍 죽어 버린 자들의 후광이 이 도시를 감싸고 짙은 회색 안개처럼 흐르고 있다. 여간해서 젊은이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짙은 안개. 일찍 죽은 자는 오래 살아가는 자에게 언제나 반성의 시간을 손에 쥐어 주고, 더구나 손에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면면히, 당당하게 서서 살아있는 자보다 언제나 더 위대한 손짓을 한다. 저 맑고 깊고 신비하기까지 한 손짓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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