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황동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현대문학에서 <200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가 나왔다. 선정위원은 김사인, 이남호, 이광호 제씨. 아직 겨우 16수 읽었다. 한 해를 이렇게 요약한다는 건 참 건방지지 않은가 싶기는 하지만 의외로 내 대신 살아준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 없어서 매번 고맙게 읽고 있는 시리즈다. 16 수 읽는 중에 남는 것,

 

고니 한 식구들이 눈발 위에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고니들의 길고 가느다란 발은 정말 까맣고

윤기 나는 나뭇가지 같다

(그들의 다리가 들어올려질 때는 일제히 오므라졌다

다시 내디딜 땐 그 세 발가락이 활짝 펴졌다)

아 아무것도 들어올리지 않는!

 

                                           -고형렬, '고니의 발을 보다' 부분

 

이다. 오므리며 들어올린 발에 아무것도 없다니, 오므려도 움킨 것이 아니니.... 아마도 꽤 오래 생각하게 생겼다. 

또 하나,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개조개는 무지 크고, 대개는 어물전에서나 보고, 재수 없으면 지나가다 얘가 쏘아대는 물총을 한 방 얻어 맞는 수가 있고,  최소한 하나에 천원 이상하는 얘를 사다가는 거의 다지다시피하여 된장찌개, 혹은 미역국을 끓여 온식구 둘러앉아 짭짭 먹어치우는 것. 뭐 때로는 구이도 해먹지만. 그런데 그렇게만 보인 게 아니라, 살아있나 보려고 건드려보는 그 조개의 발足(어떤 어부는 혀舌라고도 하고)을 보고,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니, 그게 최초의 궁리, 가장 오래하는 궁리래네. 에이, 눈앞이 흐릿해진다. 가엾고 애틋하다, 그들의 맨발. 다, 속까지 다 보이는 빙어가 된 것같다.


작년 이맘 때, 문태준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을 읽었다. 젊은 시인. 그러나 속은 꽤 늙은 사람. 내어놓는 시마다 잔잔하게 마음을 술렁이게 해서 한번 읽고 넘어간 것이 없었다. 올해 가장 좋은 시에 가장 많이 추천되기도 했다, 저 '맨발'. 새 봄에 읽고 지금 다시 읽는 나 또한 참 좋다. 참 뭉툭한 바늘, 그러나 아주 긴 바늘에 푸욱 찔린 것같다. 바깥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들... 다 저리 맨발일 것을... 우리 생애, 모든 걸음이 다 그렇게 맨발인 것을.

밤마다 입을 다무는 집 안에 그 맨발 따숩게 지져주는 구들이 있기를

세상 모든 집이 다 그리 따스하기를

맨발 보듬는 살 보드랍기를.


여기까지가 20 수 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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