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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뮌헨의 슈바빙 이야기. 최하림인가가 쓴 전혜린의 평전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삼십이 넘어서야 읽었다.
그녀가 번역한 책은 몇 개 읽었으나 전혜린 그 자신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복에 겨워서, 세상에 어린 자식을 남기고 자살을 해 버리다니, 그것도 겨우 나이 서른을 넘긴 주제에. 이것이 이유였다. 당시 나는 유복한 가정의 아이가 지적인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특별하게 자란 것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다른 애들처럼 전혜린에 부화뇌동 않기로 혼자 결심하고 전혜린을 외면한 채로 이십대를 건넜다. 그래서 삼십이 넘어서야 전혜린 평전을 집어들었고 결국 이유야 어찌됐든 이십대에 전혜린을 읽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그때 읽었더라면 나는 내 환경을 저주했을 것이고 끔찍하게 건방졌을 것이고 불가피하게도 자살을 생각하고 실천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치기나 객기 같은 것은 대개 당면한 개체에게만은 절대적이니까. 그러나 이즈음 나는 그때 전혜린을 읽었더라면 지금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훨렁훨렁, 이십대를 그토록 허무하게 술이나 마셔대며 보내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아주 허망한 것만도 아니니, 젊은이는 1960년대나 1980년대나, 뮌헨의 슈바빙에서나 서울의 신촌에서나, 반항적이고 저항적이고 그지없이 가난했다. 담배연기와 맥주냄새, 소주냄새로 가득찬 술집에서 몇 년이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걸치고 제대로 빗지도 않은 머리를 마주대고 앉아서 과연 술만 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름만 슈바빙이 아니었을 뿐. 슈바빙이라는 이름을 단 장소는 오히려 종로에 있었다.
종로의 슈바빙. 그저 시끄럽고 얄팍한 술집에 지나지 않았던 그 슈바빙은 전혜린의 슈바빙. 그러나 그녀의 슈바빙은 그때 내가 상상하고 코웃음치던 종로의 그 슈바빙이 아니다. 허수경이 독일에 가 있는 이유도 이런 촉발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슈바빙에 가보고 싶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는 참이다. 전혜린은 왜 자살했을까. 그 자살로 아직까지 그 둘렀던 머플러 하나도 소장자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전혜린이 죽은 이유를 곰곰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이유였단 말인가.
이 책에 그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그래도 자살자들은 자기 생을 걸 만큼 진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스스로는 어쩌지 못한다는 우울증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그 심정을 살아있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고도 하고. 그러하니 이 책을 통해 본 것은 당시 이만한 '여성'이 없었을 거라는 것. 나아가 그래서 그토록 많은 청년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라는 점. 거기에 동년배 여성들의 막연한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 또한 추가! 그리고 그녀가 들려 주는 해외 소식이란 당시엔 목을 빼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 것이라는 것 때문에라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대에 그녀가 살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실, 이 전혜린과 닮은 지금의 '여성'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뭇남성들의 그녀에 대한 애정에서도 느꼈던 바이지만 여자인 나로서도 그녀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전혜린도 그 시대, 그런 인물 중 하나였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매혹적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를 알고 있다는 것이 생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을 느낀지 오래이니 전혜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
기형도와 더불어 일찍 죽어 버린 자들의 후광이 이 도시를 감싸고 짙은 회색 안개처럼 흐르고 있다. 여간해서 젊은이들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 짙은 안개. 일찍 죽은 자는 오래 살아가는 자에게 언제나 반성의 시간을 손에 쥐어 주고, 더구나 손에 닿을 수 없는 자리에 면면히, 당당하게 서서 살아있는 자보다 언제나 더 위대한 손짓을 한다. 저 맑고 깊고 신비하기까지 한 손짓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