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크랩의 파파 기도 - 전에는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기도
래리 크랩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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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영적인 호흡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얼레고 달래서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좇아 세상을 살아갈 힘을 구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실현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에 함축돼 있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물론 어린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미신처럼 숭배한다. 기도도 그 수준에 머물러 하나님께 간청만 하고 끝내버린다. 온통 자기 욕구를 아뢴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응답을 받으면 기뻐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면 못내 씁쓸해 한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한다. 그만큼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그로 인해 A를 구했을 때 A나 B나 C를 응답받아도, 또는 무응답을 받아도 감사하며 산다.

제자 하나가 기도에 관한 책을 보내왔다. 전주태평교회 시절의 중고등부 제자였는데 지금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섬기는 선생이다. 그가 보내 온 책은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였다. '파파'라고 하니 언뜻 생각하기를 '아빠'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아버지를 향한 기도가 파파 기도요, 무언가를 간청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기도인 까닭이다.

"파파 기도는 내 영혼에 하나님이 기쁘게 채워 주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며, 나의 내면 세계에 잔뜩 쌓아 놓은 쓰레기를 청소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분의 진실(reality)로 나를 채우시게 하는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부어 주신 거룩한 에너지와 지혜로써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도 파파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40쪽)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여백을 만드는 방법이란 나를 비우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달리 말해 내가 이루고픈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나를 내어 놓는 일이다. 그때 그 분이 내 속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그 힘과 지혜로 수평적인 삶도 잘 엮어나갈 수 있다. 이른바 '십자가의 도'를 이루는 기도가 그것이다. 크랩은 그와 같은 파파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을 네 단계로 제시한다.

"P: 자신을 꾸밈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라(Present).

A: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의주시하라(Attend).

P: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 놓으라(Purge).

A: 하나님을 당신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라(Approach)." (109쪽)

이 책 뒤쪽에서 크랩은 4분짜리 파파 기도를 실제적으로 소개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도할 수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게 기반이 되면 매 순간순간 파파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사항은 그것이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도 위에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1순위'로 올려드리는 기도여야 함을 강조한다.

사실 신앙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여러 이미지를 품고 있다. 바쁜 왕, 시계공, 자동판매기, 근엄한 아버지, 또는 잔인한 폭군과 같은 여러 유형들 말이다. 이른바 하나님은 세계 70억명을 다 둘러봐야 하는 바쁜 왕이거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뒤 잘 굴러가는지 지켜보는 시계공이거나, 뭔가 요구하면 뚝딱 쏟아줏는 분, 혹은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아버지, 어렸을 때 받은 상처 속에 각인돼 있는 잔인한 군주 등이 그 모습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와 같은 유형들 외에 몇 가지 모습을 더 제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친근한 아버지, 다시 말해 모든 것에 부족함 없으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해 가는 것 말이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이제부터라도 자동판매기를 연상하는 기도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과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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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라는 이름의 외계인 - 소통하지 못하는 십대와 부모를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김영아 지음 / 라이스메이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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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자살이 늘고 있다.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학원폭력이 가장 큰 이유로 떠오른다.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삥을 뜯기고, 과제물도 대신하고, 심한 모욕감과 폭력에 수치심과 좌절을 겪는 것 말이다. 그것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여러 요인들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무엇보다 경찰단속을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더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갖고 교육에 임하도록 당부한다. 더욱이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은 가차 없이 전학시킬 것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조치로 십대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 학원폭력만 근절시키면 그게 해결될 일일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바로 가정 안에서 풀어야 할 실마리가 그것이다. 배고픈 시절에 대학진학만을 목표로 했던 어른 세대와 지금의 십대가 겪는 감수성을 공감하는 게 그것이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데서부터 십대 자살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십대라는 이름의 외계인〉(라이스메이커)은 그런 점에서 십대의 감수성을 들여다보는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어른 세대가 바라보는 관점과 십대가 생각하는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그 틈을 빤히 엿볼 수 있고, 그들과의 간격을 좁힐 수 방안도 체득케 하는 책이다.

"소위 '비행청소년'들이 하는 행동은 대개가 비슷하지만 그들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변수는 딱 하나다. 바로 '집', 즉 '가정'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더 이상 가정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느껴 집을 떠난다."(35쪽)

이 책에서 김영아는 십대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과 갈등의 문제를 '가정'에 두고 있다. 모든 질병도 그 근원이 있듯이 십대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가정 속에 있다는 뜻이다. 십대 아이들이 폭력에 기웃거리는 이유도 대부분 부모와 생긴 거리감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대리 만족하고 또 인정받으려고 삥을 뜯고 폭력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유독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다면, 혹 자신의 왜소함이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무엇을 그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얻으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그들과의 관계는 더욱 끈끈하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이지만, 아이는 그 관계에서조차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48쪽)

이는 내 아이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보고 느끼는 충격일 수 있다. 내 아이가 담배와 술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심하게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과 함께 돌아다닌다면 어떠할까? 부모라면 당연히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도 부모에게 받지 못하는 인정의 욕구 때문에서 비롯되는 일이라고 하니, 깊이 돌아봐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십대 아이들이 부모에게 바라는 관심이 어디 그 뿐이랴. 공부도, 장래 목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도 나와 있듯이, 울산에 살던 부모는 자기 아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그럴 듯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바람이지만, 녀석은 미용사가 되는 게 꿈이다. 부모가 바라는 꿈과 아이의 꿈이 달랐던 것이다. 그 간격을 좁힐 방안을 가정 안에서 찾는 게 십대 자살을 예방하는 또 하나의 최선책일 것이다.

이 책에도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눈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우고 익히는 게 아이들의 몫이지 않던가. 자녀는 분명 잘못을 저지르면서 배운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그렇다. 아이들의 잘못으로 인해 화가 날지라도 끊임없는 용서를 통해 부모는 자녀를 알고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울타리가 있는 가정, 그런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깃든 가정, 아이들의 문화와 감성에 눈높이를 맞추는 부모가 있을 때, 아이들이 비록 학교에서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더라도 그 과정들을 능히 견뎌내고 이겨내게 될 것이다. 그걸 지탱하는 힘이 가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십대 자살을 예방하는 근본 최선책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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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라곤의 기적 - 행복한 고용을 위한 성장 몬드라곤 시리즈 2
김성오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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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가 무척 코믹스럽다. 그렇다고 리얼리티가 없는 게 아니다. 흡인력이 강한 이유는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천하그룹이 본부장을 내세워 적자에 허덕이는 천하메디 공장을 폐쇄하고,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고, 경찰의 비호를 받고 공장안으로 투입된 용역업체 직원들의 모습이 실제를 방불케 한다.

앞으로 그걸 풀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될까? 드라마 전개상 천하그룹이 언론의 포화를 맞고 사원 유방과 공장장은 신제품을 개발하여 기사회생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지 않을까. 그리하여 유방은 부사장직에 초고속 승진하고, 공장장은 다른 자리에 앉는 반전 말이다. 헌데 실제 기업경영에서는 드라마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그룹대표와 이사회의 안건대로 밀어붙이는 게 기업의 생리인 까닭이다.
만약 적자 계열사에 대한 처리 해법을 노동자들에게 부여한다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에서는 퇴직금과 세 달치 월급을 주겠다는 본부장 말에 몇 몇 노조원들이 투쟁을 포기했다. 그런데 노조원들이 퇴직금과 밀린 월급을 출자금으로 내서 회사를 인수하여 되살려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굳이 적자 계열사를 따지지 않더라도 잘 나가는 회사를 노동자들이 경영하면 안 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경영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전문 경영인을 선임하여 경영진을 짜고 그들을 관리·감독하기만 하면 된다. 기술적으로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궁금한 게 있으면 외부의 경영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면 된다. 조언해 줄 사람은 많다. 하다 못해 몬드라곤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된다."(246쪽)
이는 김성오의 〈몬드라곤의 기적〉(2012·역사비평사)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노동자들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몬드라곤의 실례를 들어, 한국의 기업가운데 노사관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타협과 대화를 가장 잘 시도하고 있다는 현대자동차를 비교 분석하면서 내 놓은 사안이다. 가상의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현대자동차 노조원들도 충분히 기업경영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성오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5년간 '노동자기업인수지원센터'의 대표로 일하며 부도 기업의 노동자 인수를 자문했던 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기업경영과 참여야말로 우리나라가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것만이 질 좋은 고용을 위한 참된 성장의 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효율성이 있을까? 그가 하는 말에 따르면,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에서 민주적 조직문화로 바뀔 수 있고, 재벌 2세들의 기업승계를 위한 비자금 불법상속도 사라질 가능성이 크고, 노사간의 단체협상도 필요하지 않기에 노동생산성은 훨씬 향상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물론 약점도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약점은 의사결정과정이 길고 복잡해 질 수 있고, 노동자들이 일하랴 경영공부하랴 정신없이 바쁠 수 있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노동자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진다면 기업을 인수하기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난제에 봉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난제를 감수하고서라도 5만여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직접 경영에 참여한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그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서도 기업의 성장 몫만큼 1만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세워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만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고, 신규 고용창출에서도 대주주들보다 월등하게 앞설 수 있다고 내다보는 것이다.
"몬드라곤의 원칙과 가치는 200여 년 지속되어온 협동조합운동의 일반 원칙, 특히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몬드라곤은 단지 그 원칙을 고수하는 데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출범 이후 50여 년 넘는 기간 동안 몬드라곤은 자신만의 독특한 원칙과 가치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유럽 전역이,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양극화의 심화와 고용 악화라는 공동의 문제를 떠안게 되면서 몬드라곤은 이 문제의 해결에 집중했다. 몬드라곤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중심에 두지 않고 언제나 미래의 조합원들을 중시하는 희생과 헌신의 태도를 보여주었다."(109쪽)
바로 이것이 1940년대 초반 스페인의 작은 도시에서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에 의해 소규모 노동자생산협동조합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해외에까지 생산 공장을 갖추고, 유통과 지식과 교육부문까지 포괄하는 기업집단으로 발전한 몬드라곤의 기업 이념인 것이다. 그만큼 몬드라곤은 여러 위기와 개혁의 여파 속에서도 그 원칙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년 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개정판으로 나온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의 연속선상에서 출간한 것으로,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몬드라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협동조합의 원칙과 이념을 지켜내고 있는 비결을 담아내고 있고, 한국에서도 더 큰 경제발전과 공정한 부의 분배가 가능한지를 모색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도 나온 바 있듯이, 몬드라곤 신화의 중심에는 1940년대의 호세 신부가 자리하고 있다면 1960년대 한국의 원주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해 수감되었다가 출감한 지학순 신부와 장일순 생명사상가가 있다는 점이다. 그들 두 사람이 밑바탕 되어, 현재 원주는 협동과 연대의 원리에 의한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꿈꾸고 있다. 진정 그 방향을 원한다면 노동자들이 기업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길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건 좌파의 관점이기 이전에 행복한 고용과 참된 성장을 위한 선지자적인 관점일 것이다. 그것이 세계 모든 기업들이 방문하고 또 본받으려고 애쓰는 몬드라곤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화두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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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라 - 황광우와 함께 읽는 동서양 인문고전 40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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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존재 자체가 가벼워지고 있다. 지식도, 정보도, 문화도 인터넷과 스마트폰 하나로 가볍게 해결한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불리는 성경도 점점 더 스마트하게 읽힌다. 세상에 비난을 받을지언정 제 욕망에 따라 철새처럼 가볍게 날라 다닌다. 시대변화에 잘 대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얄팍함만 난무한다면 결국은 그 존재 자체를 가볍게 하고 만다.

세월이 흘러도 묵직한 고전이 빛나는 이유도 그것이다. 고전은 스스로 남다른 혜안을 제시하지만 모두가 보편적인 가치를 제공한다. 비록 동양과 서양고전이 다른 견해차를 보일지라도 그 근본은 인류의 역사와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도덕을 떠받치는 주춧돌과 같다. 그것이 버티고 서 있는 한 그 어떤 외투를 갈아입어도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는다.

요즘처럼 경제가 암울한 때에도 고전은 귀한 버팀목이 된다. 작금의 경제는 단순한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에 춤추듯 소인배들은 정권의 시녀역할을 자처하며 불나방 춤을 춘다. 하지만 진정으로 존경받는 인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군자의 모습이다. 난세에 난 영웅들과 혁명가들은 모두 그 속에서 배태된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고난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 디딤돌이었다.

황광우의 〈철학하라〉는 고전의 깊이를 통해 존재의 무거움을 다시금 생각토록 하는 책이다. 불확실성이 판을 치는 시대에 진정으로 흔들리지 않고 깊은 안목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혜안은 고전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는 길 밖에 없다는 뜻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의 노리개 감으로 전락하는 소인배들이 들끓는 시대에 진정한 군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일깨워 준다.

"사람들은 권위를 숭배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뱉어 놓은 말을 쉽게 믿어 버린다. 그런데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푸르른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의 나무'라는 말처럼 현실은 끊임없이 이론의 변화를 요구한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길 싫어하는 사람은 훌륭한 신앙인은 될 수 있어도 세계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인간은 될 수 없다."(서문)

바로 이것이 그가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철학하고 사유하기를 바라는 이유다. 아무리 위대한 소크라테스와 공자와 석가모니가 한 말이라도 각 개인 스스로가 그 말을 되짚어보고 곱씹어 보지 않는 한 그들의 삶을 몸소 체득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말이 힘이 있는 이유는 단순한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삶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까닭이다. 그걸 위해 독자들 스스로가 동서양 고전으로 철학하고 사유하길 원하는 것이다.

황광우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 그는 우선 이 책을 통해 동서양 고전 40선을 선정하여, 동양편에서는 자아와 정체성에 관한 심연을 드러내고, 서양편에서는 정치·경제·철학·심리·법·과학 등 외부세계에 대한 지평을 넓혀준다. 물론 초보자들도 각각의 고전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각 장마다 개괄적인 안내를 빠트리지 않고 있다. 나 같은 고전에 대한 초짜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부분이 그것이다.

"어떤 나라도 영원히 강할 수 없고, 또 영원히 약할 수도 없다. 강함과 약함은 그 나라의 법을 받드는 자에게 달려 있다. 그가 강하고 곧으면 그 나라는 강해지지만 그 사람이 그렇지 못하여 법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못하면 그 나라는 약해진다. 《한비자》〈유도(有度〉"(168쪽)

이는 강력한 지도자가 강대한 나라를 만들기를 원했던 한비자(韓非子)의 원문을 직접 인용한 글귀다. 한비자는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부여한 것도 아니고, 그가 군자라서 주어진 것도 아니라, 단지 '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왕권을 쥔 이라고 내다본 이였다고 한다. 그는 왕에게 필요한 것은 포괄적인 법치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다시 말해 누가 봐도 명확하고 분명한 법 적용을 행사하는 지도자란 뜻이다. 그런데 그걸 요구한 한비자에게 진시황은 죄를 묻고 사약을 보내 자살케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흐름이 대명천지 21세기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을 쓴 황광우도 실은 19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 옥살이한 인물이었으니, 그 어찌 한비자의 원문을 읽으며 땅을 치고 하늘을 향해 분노하지 않았으랴? 하지만 옥중에서 고전과 씨름하고 성경으로 사색한 고뇌의 편린(片鱗)들은 그의 존재감을 더 무겁게 드러내게 한 주춧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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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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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분교였다가 지금은 폐교가 된 백련초등학교. 그곳은 어린 시절 내가 배우고 자란 초등학교였다. 지금은 학교 운동장도 좁디 좁은 논밭과 같지만 그때는 월드컵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체육대회 때가 되면 왜 그렇게 운동장이 길던지, 이어달리기를 해도 좀체 끝나지 않았고, 기마전을 해도 적벽대전을 방불케 하는 광활한 대지였다.

그곳에서 함께 배운 아이들 이름이 떠오른다. 기현이, 상운이, 행용이, 성수, 길배, 인갑이, 치권이. 또 정순이, 영금이. 다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 운동장에서 배우고 자랐다. 학교 운동장 아래는 논두렁길이 나 있었고, 학교 옆 동산에는 대낮에도 무서운 묘지와 비석들이 서 있었다.

백련초등학교에서 잊지 못할 게 있다면 우리들을 동무처럼 대해 준 선생님들이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내게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 문성화 선생님이 바로 그 분이다. 그 분은 무척이나 잘 생겼다. 미남형이라 여학생들에게는 인기 짱이었다. 나도 그 분이 잘 생겨 내심 질투심도 났지만 내 노래 솜씨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셨다. 더욱이 꾀꼬리처럼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예쁜 혜련이 누나와 함께 학교를 대표해서 듀엣으로 졸업식을 부르게 한 건 더 가슴에 남는 추억이다.

탁동철 선생님과 아이들의 산골학교 이야기 묶음집인 〈달려라, 탁샘〉(양철북 펴냄)도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그 선생님은 아버지가 졸업한 학교를 다녔고, 이제는 그 모교에서 아들딸들과 함께 공부하고 씨름하고, 산과 들판을 누비고, 운동장 구석에 작은 논도 만들어 모도 심고, 심지어 닭장도 짓고 토끼도 키우며 아이들과 동무가 되어 살고 있다.

"손바닥만 한 논에서 하는 모심기지만 흉내는 다 낸다. 작대기 두 개에 끈을 묶어 만든 못줄을 두 아이가 양쪽에서 잡아 줄을 맞추고, 다른 아이들은 허리 숙여 모를 심었다. 교장 선생님이 보시고는 거 되지도 않을 걸 뭣하러 하냐고 했다. '안 되어도 좋아요. 살아 있는 모를 구경만 해도 그게 어디에요.' 5학년 아름이는 벌써 '선생님, 우리 나중에 이걸로 떡 해 먹어요.' 한다. 논두렁을 만들고 콩도 심었다. 일기장을 보니 모를 심는 날이 5월 31일이었다."(67쪽)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가장 바쁠 때가 모내기를 할 때라는 것 말이다. 경운기가 나오지 않던 그 시절에 나도 손모내기를 직접 했다. 그때만 되면 아이들이 학교를 빼 먹고 부모님들을 도와 직접 모내기를 도와야만 했다. 물론 힘이야 들지만 학교를 빼 먹는다는 건 그 시절엔 재미난 일이었다. 더욱이 배불리 먹었던 모내기 밥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데 탁동철 선생님은 거기에다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니 모내기 할 때 학교에 나오지 않는 녀석이 있으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 녀석의 논으로 모내기를 직접 하러 가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줄을 띄우고 한 줄에 한 뼘씩 모를 심는 모습은 흡사 이웃집 아저씨의 품앗이 하는 모습일터다. 물론 선생님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정겨운 동무로 어울린다.

탁동철 선생님이 머문 학교들은 명문이거나 도심에 있는 초등학교가 아니다.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그 흔한 시골 초등학교다. 가난하고, 배운 게 덜하고, 자주 싸움을 하는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학교다. 탁동철 선생님은 그 속에 공부하다 삐친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연극을 해서 아이들 잘못을 돌이켜보게 하고, 또 학교 급식문제에 관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며 길을 찾기도 한다.

요즘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하나만 낳아서 기른다. 교육비가 그만큼 만만치 않는 탓이다. 그런데 시골도 그런 흐름을 타고 있으니, 그 많던 시골 학교들이 다들 폐교가 될지 모른다. 이 책에서 '닭장'이란 시를 쓴 차정현이랑 '메뚜기 선수'를 쓴 다솔이, '거름 나르는 아저씨'를 쓴 유정이, '잡탕 떡볶이'를 슨 희영이도 먼 훗날 자기들이 배우고 자란 '오색초등학교'랑 '공수전분교'랑 '상평초등학교'를 바라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나 어릴 적 배우고 자랐던 백련초등학교처럼 녀석들도 그런 감회를 떠올리지 않을까? 왜 그 시절에 그토록 코피 터지며 친구들과 싸워댔는지, 왜 그토록 여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는지, 왜 그토록 친구 물건을 탐하며 살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함께 뒹굴며 자기 삶을 나누어 준 멋진 탁동철 선생님을 사무치도록 떠올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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