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벽에 창세기를 묵상하면서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늙은 종에게 고향 땅에 가서 이삭의 배필을 택하도록 청했습니다. 주인의 영향을 받은 그는 메소보타미아의 우물가 근처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것만 채우기에 급급한 여인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리브가를 만났고, 하룻밤 유숙한 이후 리브가 일행은 곧장 이삭을 만나기 위해 떠납니다.


그때 이삭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처해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창24:61-63) 있었습니다. 이삭이 묵상한 장소를 성경은 ‘브엘라해로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나를 감찰하시는 전능자의 우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의 장소’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잃은 이삭의 마음만 헤아리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형편과 마음까지도 모두 살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본문 24절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이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한 사람을 보선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따라 충실하게 번역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이, 하나님, 당신이시여”’입니다. 하나님은 특정인의 마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까지 아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마음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임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자보다 그 집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듯이, 자동차를 만든 사람보다 그 자동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기에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4)


오늘은 한 해 동안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감사주일’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의 형편과 마음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과 힘든 일도, 심지어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쳐 온 그 모든 일들도, 우리 각자에게 필요함을 아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성숙한 감사의 고백 위에 하나님께서는 더 아름답고 선한 길로 우리를 친히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나의 형편과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브엘라해로이'의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앞길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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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세워(행1:21-26)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의 사도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들 12명의 사도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젤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가롯 유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늘 함께 하셨고, 그들과 따로 있을 때에 자신이 말한 비유들을 쉽게 설명해 주셨고, 그들이 세상에 나가 전도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에는 그들의 발을 직접 닦아 주셨고, 당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떡과 잔을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주님의 돈독한 사랑을 받았던 그들 12 사도들은 주님을 위한 사도의 직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본래 ‘사도’를 칭하는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들 12사도는 당연히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요, 주님의 뜻을 전하는 그 직무를 감당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 12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집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신하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웨이터로 자신들의 직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가롯 유다는 주님을 위한 집사나, 주님을 위한 신하나, 주님을 위한 웨이터로서 직무를 감당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마이 웨이(my way)를 향해 나아갔던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직무를 제 욕망과 출세를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의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최종국 인생은 목을 매 자결한 줄이 떨어져,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왔고, 온 몸이 피투성이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이요, 그의 몸은 ‘피밭’을 칭하는 공동묘지 위의 한 줌의 재로 사라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생명과 진리를 위한 길을 걷던 사람이 제 욕망을 좇아 자기 자신의 마이웨이를 걷는 자가 있다면, 그의 생명은 생명으로서 가치가 있을 수 없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유의하고자 하는 말씀은 자기 자신의 마이웨이를 걷다가 피밭이라는 공동묘지 위의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한 사람을 보선하는 장면입니다. 본문 21-22절 말씀은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선택하는 ‘그 기준’이 명시돼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서서,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보선하는 기준으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항상 함께 다녔던 사람이고, 다른 기준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실 때가지 늘 함께 동행했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로 믿음이 돈독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든 120명의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그 자리에 그들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예루살렘에는 마가의 다락방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거대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었고, 원형극장과 경기장이 시가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가의 다락방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요, 오히려 예루살렘 성안에 가득 차 있는 별천지 구경거리에 온갖 관심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에 비해 지금 120명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들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 기도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거리와는 달리 자신들만큼은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들의 손이 주님의 손이 되도록, 자신들의 발이 주님의 발이 되도록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 120명의 제자들은 다른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믿음이 출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기에도 충분한 자들이었음은 제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가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 120명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늘 함께 동행 했던 자들이라면, 이들 120명의 제자들이야말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최적격자라면, 이들 120명의 제자들도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로 선택되기에 충분한 자들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본문 22절은 “하나를 세우자”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12명의 사도들 가운데 가롯 유다 한 사람이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12명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함에서 ‘하나를 세우자’는 의견입니다. 더욱이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를 상기하여 그 전통성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들 120명 가운데에 ‘그 한 사람’이 선출된 것은 유독 그가 믿음이 출중하거나, 그가 재력자이거나, 그가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거나, 그가 뛰어난 학식을 자랑하고 있거나, 그의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12사도로 선택된 12사도들의 믿음과 인격과 형편과 처지를 살펴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16절에는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선택하셨는데, 그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16절 말씀에는 다른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롯 유다를 소개하시는 부분이 후반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롯 유다라”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다른 11명의 사도와 함께 마지막 12번째 사도로 선택된 가롯 유다를 밝히는데, 성경 기자는 머잖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 자임을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데오빌로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이미 이전에 경험한 일들을 되 뇌이면서 자신의 붓을 든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가롯 유다가 12사도에 선택되었지만 그가 머잖아 예수 그리스도를 팔게 될 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 것을 예수님 당신은 모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함께 하셨던 삼위일체의 제 2격 되시는 성자 하나님은 이미 가롯 유다가 자기 자신을 팔 자임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를 자기 자신의 품으로 품으시고, 12사도로 선택해 주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품 속에서 가롯 유다의 연약함과 유약함이 견고해 질 것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사도로 선택된 이후에는 그의 인격이 스승을 파는 배신자가 아니라 더욱더 주님을 위한 집사로, 주님을 위한 신하로, 주님을 위한 웨이터로 그 인격이 다듬어지길 바라고 바라셨던 까닭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없었던들 결코 주님은 그렇게 배신자가 될 가롯 유다를 당신의 품으로 품지 않았을 것이요, 그를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연약함과 유약함은 가롯 유다만 지녔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는 성미가 너무나 급한 불같은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매사에 실수만을 반복하던 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그들이 사마리아를 지나 갈 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요한과 야보고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하늘에서 불을 명하여 저들을 멸하라”(눅9:54)고 할 정도로 과격하고 엉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토록 과격한 성품을 지닌 자들이었기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우레의 아들’(마3:17)이란 별칭을 부여하셨던 것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분명코 세상 모든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요한과 야고보는 내다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대동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들에게 영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하나씩 내어 주도록 청탁하게 만들었던 자들입니다. 주님을 위한 집사, 주님을 위한 신하, 주님을 위한 웨이터와는 달리 완전히 이중인격자처럼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자들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는 동안에도 그들 제자들은, 잠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잠에 곯아떨어질 정도로 유약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던 인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불리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그 정도였으니, 이전의 세상 욕망을 누렸던 세리 마태나, 독립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셀롯인 시몬이나, 그 밖의 다른 제자들 역시 얼마나 연약한 성품의 소유자들이었을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많은 제자들을 제쳐 놓고, 심지어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 따라다녔던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든 120명의 제자들을 제쳐 놓고, 왜 하필 그들 12명을 사도로 선택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가롯 유다를 선택하셨던 관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유약함과 연약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주님께서 가롯 유다를 당신의 품으로 품으시고, 사도의 직무를 맡겨 주신 것처럼, 그들 11명의 사도들은 본문 속 120명의 제자들보다도 더 연약하고, 불 품 없고, 형편없는 과격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더 품으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시기 위해서, 사도의 직무를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다른 많은 제자들을 제쳐 놓고, 심지어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을 제쳐 놓고, 유독 12사도를 택해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어주셨던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잘 나서이거나, 그들이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똑똑해서이거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인격이 출중하거나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더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가롯 유다를 대신할 ‘한 사람을 세우자’고 제안하여, 그 한 사람으로 선출된 '맛디아' 역시 결코 '유스도'보다도 믿음이 출중하거나 인격이 훌륭하거나, 가진 게 많고, 배운 게 많아서 선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본문 속에서 선출된 그 한 사람 맛디아는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절대적인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주님을 위한 집사와 주님을 위한 신하와 주님을 위한 웨이터로 봉사하고 섬기던 ‘여러 사람들의 중의 상대적인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 한 사람으로 선출된 맛디아는 자신이 사도로 보선되었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없고, 특별한 존재로 인식할 것도 없고, 유별난 사람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120명의 사람들보다도, 심지어 자신과 경쟁하여 탈락된 유스도보다도 더 연약하고, 더 유약하기 짝이 없기에 주님께서 자신을 배려해서 사도로 세워주셨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자입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격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완숙하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아님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모난 성격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유독 우리를 당신의 사랑과 관심으로 품어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모습은 찬송가 310장의 ‘아 하나님의 은혜로’에 아주 자세하게 고백돼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저는 저 자신을 잘 압니다. 누구보다도 급한 성격의 소유자요, 조그마한 일 하나에도 밤을 지새우며 끙끙 앓는 유약하고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집안에 막내이기에 위로 형들과 누님의 도움을 받아 온 내가 어떻게 주님의 교회를 이끌며, 교우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을지는 생각할수록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주님의 교회를 이끌도록 목사로 세워주신 것은 주님의 은혜와 관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저는 잘 압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주님의 그 크신 관심이 없었던들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주님의 교회를 이끄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주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믿음으로 인함이요, 이토록 연약하고 볼품없는 저를 격려해 주고 믿어주고 지금껏 격려해 주는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인함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저 보다도, 오히려 세상의 한 복판에서 치열하게 주님의 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훨씬 더 훌륭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른 누구보다도 형편없는 우리 자신을 믿어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신 것, 그보다 더 큰 감격과 감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주님의 제자로 선택되었다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다.

그것은 내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내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볼품없고 초라한 나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푸신 한량없는 사랑과 관심에 의한 일일 뿐입니다.


그런 고백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본문 속 ‘한 사람’으로 선택된 맛디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직무를 다하는 신실한 주님의 사도가 될 것이요, 그런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은 한걸음씩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힘으로 인함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으로 인함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허물 많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배경이나 우리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품어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위치에서나,

 겸손함과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시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직무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이 시대의 12사도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그와 같은 우리의 겸손한 직무를 통해

내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나의 삶터와 일터와 가정과 사회가

한 걸음씩 새롭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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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으로 올라가니(행1:12-14절)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좋은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바른 믿음을 지닌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교인들이 꽉꽉 찰지라도 예배 행위를 뺀 나머지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비록 교인 수가 적을망정 모든 교인들이 생명력을 지닌 채,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산다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통해 이 사회를 새롭게 하시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지니신 채 구름에 안겨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목격한 제자들은 휘황찬란하게 변한 주님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두 천사는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일러 주었습니다. 그 일은 성경 속 비유적인 해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역사로 다가올 것을 약속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하필 두 천사는 제자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아'하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만큼 주님과 함께 3년동안 동고동락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도 없었고, 제자들만큼 주님의 부활승천의 장면을 직접 바라본 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은연 중에 자기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것마냥 자기 교만과 자기 아집에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경계하도록, 자신들의 근본된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러 줬던 것입니다. 그만큼
갈릴리 출생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겸손하게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있었던 일을 본문 12절이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은 감람나무, 다시 말해 올리브 나무가 많은 감람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승천하신 주님을 보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확신한 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예전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세상 사람들을 도피하여 산 속에서 신선노름 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자신들이 두 발로 딛고 살아야 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14절은 그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어디에 모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했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소위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기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기도모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모임으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은 성령님의 임재를 바라는 낮고 낮은 심령을 지닌 ‘갈릴리 사람들의 모임’(행1:11, 행2:7)이었습니다. 그 모임은 자신들의 욕망이나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사교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임은 연약하고 볼품없는 자신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가 그 땅에 흘러 퍼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임이었습니다.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임이었기에, 오순절 날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재 하셨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그들의 모임 장소를 ‘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다락방’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페룬’(hypeeron)은 그 집의 가장 높은 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을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칭합니다. 그 집 주인의 이름이 마가라고 하기 때문에 붙인 호칭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처럼 그 집을 마가의 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는 그 집을 가리켜서‘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유인 즉 주님을 위해 그 집을 내어 놓은 사람은 마가가 아니라, 마가의 어머니였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관습상 여자의 이름보다는 남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관례였기에 흔히들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들의 기도모임을 1층 접견실이 아닌 2층 다락방에 두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고층 빌딩과 같은 집은 짓지는 않았습니다. 단층집이거나 높아야 2층이었습니다. 1층은 남자들이 기거하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삼았고, 2층은 여인들이 머물며 일하는 공간(the highest part of the house, the upper rooms or story where the women resided)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120명 정도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1층 접견실에서 모여야 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은 그 모임 장소를 1층이라 하지 않고 2층‘다락방’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2층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머물던 장소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뗄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락방과 관련하여, 신약시대보다 앞선 구약 시대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생명과 관련된 생생한 역사를 증언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은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이란 동네에서 행한 일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 동네에 갔을 때에 그는 한 여인의 집 다락방에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집 주인의 어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자신의 가슴에 품고, 자신이 기거하던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그 다락방의 침상에 아이를 누인 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줄 것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 아이는 살아나게 됩니다. 바로 그 집의 다락방에서 죽은 아이가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야 선지자의 후계자였던 엘리사 역시 그와 동일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이란 동네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한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다락방을 지었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게 됩니다. 본래 그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난 후에 그 아들이 갑자기 죽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안고, 아들의 시신을 엘리사가 기거하던 다락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돌아 온 엘리사의 기도로 인해 그 아이가 다락방에서 살아납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다락방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신 자가 있다면 그곳은 죽음과 절망의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의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 장소가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진리의 말씀을 유훈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 당신 자신의 몸을 보여주시면서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그렇듯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받들어 그곳 마가의 다락방에서, 낮고 낮은 마음으로, 비고 비인 마음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르밧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과 수넴 동네 한 여인의 다락방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머잖아 그곳 마가의 다락방은 오순절 날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곳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는 생생한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마가의 다락방이 지닌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의 모임이 무엇을 위한 모임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 생생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위한 모임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교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는 모임이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이는 장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곳이 크고 화려한 공간이든, 비좁고 볼품없는 장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1층이든, 아니면 마가의 다락방처럼 2층이든, 그도 아니면 지하나 3층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는 모임의 장소가 어떤 곳이든지 간에,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나누고 받드는 통로가 되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공간에만 임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심령이 낮고 낮은 자들을 통해서만, 그 마음이 비고 비인 자들을 통해서만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모임을 갖든, 우리 마음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모인다면, 그곳이 바로 오늘의 마가의 다락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존 번연은 자신이 쓴 《천로역정》 중 목동의 노래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는 쓰러질 염려가 없고,

낮은 자는 교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나니

겸손하자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이곳을 낮고 낮은 마음으로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으로 삼으십시다. 진정으로 순결한 영혼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십시다. 아니 우리가 거하는 그 어떤 곳이든 그곳을 마가의 다락방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때에 진리와 생명 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 하시사,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죽음과 절망을 몰아내는 생명의 참된 원천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교회가 참된 마가의 다락방이 되길 원합니다.

그 옛날 사르밧 과부의 다락방처럼,

수넴 여인의 다락방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바라보는

참된 심령의 소유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속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을 좇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곳들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낮고 낮은 마음, 비고 비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는

이 시대의 마가의 다락방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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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행1:8-1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이끌고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예수님의 의도를 알기 위함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죄가 있음을 알았기에 돌을 놔두고 돌아갔습니다.(요8:1-11)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적 속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두 가지 모순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간음이란 남자나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자는 아무런 까닭 없이 보내고 여인만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엔 불륜을 저지른 여자만 처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자의 불륜에 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하고, 여자의 불륜에 대해서는 한없이 심판적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중인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범한 두 번째 모순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간음 자체의 행위에만 무게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죄의 결과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본래의 마음입니다. 이른바 궁수의 화살이 과녁을 맞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정조준 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죄를 범했다는 것은 간음 자체의 현장보다 그녀의 그릇된 마음 상태가 이미 죄를 범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들 모두도 숙연해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죄 된 마음의 상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준수하는 것도 크나큰 모순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성경 말씀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고난을 알리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7:14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작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빈민들이 사는 갈릴리 동네에서 사역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실 때에는 십자가에서 대못이 박힌 채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 모든 말씀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행전의 오늘 말씀은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다가, 이제 곧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성령의 능력으로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예언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구름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너무나도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주님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여기서 주님을 위해, 모세를 위해,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고 사시지요?” 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완전 신선처럼 용모가 변한 주님을 보고서, 도무지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아예 산 속에서 장막 셋을 짓고 편안하게 신선노름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꼭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의 힘을 입어, 예루살렘은 물론이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으로 사명을 다해야 했지만, 그런데도 제자들은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만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흰 옷 입은 두 사람은 다음 구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제자들이 하늘 본향의 보좌로 올라가시는 그 장면에만 집착하고 있을 때에,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너희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과 책임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본향의 보좌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하늘로 간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면 이 땅에 재림할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초림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야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야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병듦과 탄식을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말 구유에 태어나지 않고 왕실의 보금자리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갈릴리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을 상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과도 관계를 가졌고, 세리 삭개오의 집에도 들어가 먹고 마셨고, 유대의 고위직 관인인 니고데모와도 진리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듯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를 망라하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그 초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과 진리를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든 모든 직업은 신성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로서 섬기는 직업만이 신성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그 직업과 일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 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 선교지가 때로는 가정이 될 수 있고, 일터가 될 수 있고, 직장이 될 수 있고,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정과 일터와 직장과 학교를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며 사는지는 중요합니다. 우리에 주어진 세상의 일을 오직 주님의 증인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주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진리와 생명으로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라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지는 않습니다. 오직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신 문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물론 그 날과 그 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도 모르고, 성령님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아신다(마24:36)고 말씀합니다.

이상과 같은 말씀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성으로 입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의 본향인 천국이 그곳입니다.

요즘 들어 자칭 재림주라고 떠드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제주나 재림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결코 구세주도, 그리고 재림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미 마리아의 몸 속에서 태어나셨고, 그 분만이 이 땅에 재림의 주로 하늘에서부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 그 누구도 재림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림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 하나님도 알 수 없는 노릇이요, 오직 성부 하나님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며 신실하게 사는 자라면, 하나님인 영역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실한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를 하고 있는데, 그 당부는 곧 이 시대를 향한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씀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하나님의 뜻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역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매일같이 가지 삶으로 증인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자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삶에서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굳이 그가 재림의 때를 알려고 하지 않더라도, 재림의 날에 자연스럽게 초청을 받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은 문자 그대로 사실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스스로 구세주나 재림주라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누가 재림의 때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어머니의 배속을 통해 태어난 자들은 결코 구세주도, 그리고 재림주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단 사설에 현혹되어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가정과 자식들을 내 팽개치고 그 삶을 탕진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도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재림이라 하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 육신의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 살기를 바라는 이단, 사이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기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 있는 날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신성하게 여기십시다. 내게 주어진 세상의 일을 통해 욕망과 쾌락을 좇기보다 오직 땅끝의 증인으로 사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십시다. 그때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우리의 코끝에 있는 호흡을 앗아가신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코 끝에 있는 호흡이 멈추는 그 날은 우리가 소망하던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그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님의 재림은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자칭 구세주로, 스스로 재림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신화와 꼬임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로삼아 진리와 생명을 분별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일을 통해 참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재림하실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며, 기대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재림 하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온 교우들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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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1:9-11)

 

지난주에 어떤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화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분으로부터 기도를 받고 일을 시작하고 있는데, 지금은 영 개운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일을 그만두고 싶고, 또 다시 기도를 받아보고 싶어서 기도를 받아봤는데, 이번에는 처음 기도해 준 것과 다르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해 준 그 분에게 화를 냈는데, 그것이 성령해방죄는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전화내용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제게 전화를 건 분이 흔히 말하는 예언기도를 받았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혹 예언기도를 받아 본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뭔가 황홀하고, 앞날이 확 트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흔히 예언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점쟁이처럼 앞을 내다본다는 뜻의 ‘미리 豫(예)’자를 쓰는 ‘豫言’(예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은행에 돈을 ‘맡기다’ 할 때의 ‘맡길 預(예)’자를 쓰는 ‘預言’(예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점쟁이처럼 미리 앞을 내다본다는 예자의 예언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는 자입니다. 신약이 있기 전 구약의 시대는 예언의 시대여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쓰여 있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영감의 말씀으로 우리의 앞날을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좇아 사는데, 어찌 우리의 앞날에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이 술술 풀리고 날마다 행복한 일만 쌓이다가도 불현듯 불행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불행은 하나님께서 그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너무 행복에 겨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까봐, 하나님께서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기에 허락하시는 고난이라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야말로 참된 예언가가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장차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이룰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자신을 포함한 조상들이 받았던 과거의 그 복을, 자식들이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 야곱이 한 축복은 축복인 동시에 구약시대의 예언이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축복 바로 그 예언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었을까요? 단지 야곱의 입에서 나온 그 혀끝의 말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야곱이 무턱대고 아들들의 미래를 예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 열 두 아들들이 살아 온 과거에 기초해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말씀이 창세기 49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은 ‘그들 각 사람, 그 아들들의 분량대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 열두 아들들의 삶의 자세와 태도를 두고서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을 보고서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예언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불변하는 미래를 확정짓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예언은 고정된 운명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미래는 고정 불변의 미래가 아니라 열려있는 미래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나의 앞날이 달라질 수 있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엉터리로 살아 온 사람에게 아름다운 현재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의 삶을 최선으로 준비하는 자에게 복된 미래가 열리지 않을 수 없는 같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그 예언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예언이었습니다. 이른바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씨가 말라버린다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그런 저주가 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창세기 34장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한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때 시므온과 레위가 자신의 여동생인 디나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자신들처럼 할례를 받으라고 히위 족속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히위 족속은 그 말을 믿고 할례를 행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시므온과 레위가 다 쓸어버렸습니다.

야곱은 그 때의 사건을 기억하고서 시므온과 레위가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짐을 당할 것이라고, 그 족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시므온은 야곱의 예언 그대로 유다 지파에 흡수되고 맙니다.

그러나 레위는 어떠할까요? 레위는 시므온의 경우와는 달리 결코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레위 자손은 여호와 하나님께 온갖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황금 송아지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맞서서 모세의 편에 앞장을 섭니다. 그만큼 레위는 야곱의 예언을 받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실한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됩니다. 그야말로 레위를 향한 야곱의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일입니다.

그처럼 구약시대의 예언은 불변하는 미래를 예견하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설혹 축복된 예언을 받았어도 그가 바르고 신실하게 응답하지 않으면 저주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저주를 받았어도 신실한 삶으로 응답해 나간다면 그 이후가 참된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입술에 떨어지는 예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당사자의 신실한 삶의 결과에 따른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이나 신비로운 것에 도취되어,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신앙인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 자신을 하늘에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 살도록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좇는 사도행전의 오늘 본문을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환히 엿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낸 주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승천해야 할 때가 되셨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세례를 통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때의 ‘권능’이란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을 위해 손수 대야에 물을 떠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권능’이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어린 아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모두 받아주셨던 ‘사랑의 권능’이요, 자신을 향해 비수를 꽂은 가롯 유대를 비롯해 모든 바리새인과 사두개 대적자들을 향해서도 모두 품어주셨던 ‘포용의 권능’이요, 온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뜨린 ‘평화의 권능’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권능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을, 다시 말해 이 세상 한복을 땅 끝으로 삼아 참된 증인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을 끝으로 당신은 본래의 본향인 하늘 보좌로 올려져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늘승천 사건이야말로 당신 자신에 대한 명예회복의 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어 보좌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들 성자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 만 천하에 드러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 역시 이 땅에서 주님의 증인되는 그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증인의 삶이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서 평가받을 것이요, 명예회복의 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목격하는 그 장면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10-11절 상반부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우리말 ‘쳐다보느냐?’로 번역된 헬라어 ‘엠블레포’(emblepo)는 ‘온 마음을 다해 응시하다’, ‘넋이 나간 채 뚫어져라 쳐다보다’는 의미입니다. 이른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배우가 넋이 나간 채 어떠한 생각에 몰두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도 우리 자신이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면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어와도 좀체 들리지 않고,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는 변화산상에서 엿보인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산상에서 휘황찬란하게 변화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장면을 본 베드로는 완전히 황홀감에 도취되어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씀합니다.

‘이 산에다 주님을 위해, 모세를 위해, 그리고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으며 평생 살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마17:4)

이를테면 산 아래로 내려가 세상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괜히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그냥 이 산속에서 살자는 의미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하루 동안 세상 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뜻하지 않게 이 사람에게 치이고 또 저 사람에게 치여서 심령이 상할 대로 상했는데, 그런데 교회에 나와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다 뭔가 붕붕 뜨는 것 같은 은혜의 파도 속에 젖어드는 그 황홀감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죄악과 다툼으로 얼룩진 악마의 소굴 같고, 교회는 천국 같아서 좀체 세상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넋이 나간 베드로를 향해 산 위에서 살자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세상을 등진 채 무릉도원 같은 그 산 속에서 뜬 구름 잡으며 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품고 세상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받들어 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속 천사들도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황홀한 하늘에 넋이 나가 있어야 할 게 아니라 너희들의 세상 속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어법 같은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요3:16)고 말씀하고 있고, 그래서 죄악과 다툼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지만 멸망시키지 않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셨다”(요3: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면, 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은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이 세상을 품고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모두가 천국이요, 세상은 모두가 지옥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금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인 욕망을 구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할 때에 그 가치를 드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을 우리의 최고 정점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최고 목적의 지점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우리가 바닥에서 살더라도 하늘을 보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두 발을 내딛고,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지만,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골3:1)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는 날 우리의 영혼이 입성해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저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아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이 세상 사람들을 그 누구보다 지혜롭고 선하게 사랑하지만,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에는 우리가 가야 할 본향으로 입성해야 할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끝점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통변 같은 일들, 병을 고치는 기적 같은 일들에 현혹되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들이 황홀하고 멋지기는 하지만 주님의 날이 도래하는 그날 그 모든 것들은 폐하게 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신비스럽고 황홀한 것에만 붙잡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팽개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적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예언과 신비를 찾아다니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십시다.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오늘의 일, 내가 준비해야 할 내일의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십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정한 가장 합당한 때에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사랑하는 하나님

세상이 혼탁하고 경제가 어렵고 숨이 확확 막힐 지경입니다.

앞날의 걱정 때문에 예언이나 신비로운 것에 현혹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신비롭고 황홀한 것에 매달린 채 세상에서의 책임과 의무에 등진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일에 말씀과 성실로 다하여

참된 미래를 열어가는 참된 예언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언젠가 우리를 부르실 그 때가 분명 있을 것이오니

이 세상을 끝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벗어나,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지혜로운 자들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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