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아와 새튼이 - 한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 이야기
문국진 지음 / 알마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그만큼 완전범죄는 없다는 뜻일 것이다. 살인죄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처럼 지능범들이 다양하게 활개치긴 하지만 범인들은 모두 자취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설령 범인이 남기지 않더라도 살해당한 피해자가 그걸 남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국 최초 법의학자인 문국진의 <지상아와 새튼이>는 그 면면을 속속들이 파헤쳐준다. 각각의 살해사건을 자살로 꾸며내고 또 위장하지만 사건 현장을 감식하면 모두들 타살임이 드러난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물론 그 중심에 경찰도 있고, 검찰도 나서지만, 결정적인 사건의 실마리는 법의관들의 감식결과에 있음을 알려준다.

일례로 일본 동북지방의 작은 공장에서 일어났던 여자 청년의 살해사건이라든지, 조그마한 항구의 다방에서 영업하던 미모의 한 마담에 살해된 현장이라든지, 임신한 여자 청년을 강물에 밀어뜨리고서 마치 강물로 뛰어든 것처럼 꾸민 일이라든지, 여비서의 임신 사실을 알고 '아비산'이 든 주스를 마시게 하여 독살시킨 뒤 시체를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져버린 일 등, 다양한 살해사건 현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사건도 몇 몇 알려준다. 농촌의 삼형제에 관한 이야기인데, 큰 형이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첫째와 둘째와 셋째 아이들이 각각 다른 혈액형을 보유한 것이다. 이른바 큰 형 밑의 둘째와 셋째와 함께 형수가 바람이 났던 것이다. 그 사건을 바라보던 문국진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다음과 같은 말로 큰 형에게 위로 겸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고 한다.

"K씨! 당신에 삼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핏줄이오. 비록 태어난 자식 중 둘은 당신 자식이 아니지만, 당신과 같은 핏줄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핏줄을 모르거나 알고도 자식으로 거두는 사람들도 많고, 또 동생의 자식을 아들로 삼고 키우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 거요. 이 경우는 그래도 모두 당신과 같은 핏줄 아니오. 이제 와서 이런 사실을 낱낱이 밝혀 평지풍파를 일으켜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소. 모두에게 좋은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93쪽)

또 하나 재밌는 사건이 있다. 두 부부가 신혼여행 3일째 되던 날에 신부가 아랫배의 통증을 호소한 사건이다. 신부의 소변검사는 '이상한 균' 때문이라고 판명이 났고, 결국 그게 발단이 되어 남편의 '성병'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성병 때문이 아니라 그람음성간균이 원인인데, 그것은 여자의 항문 주위에 있던 대장균이 그녀의 질까지 침범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 요인으로 여성들은 종종 월경 뒤에 오줌소태를 자주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바기니스무스'와 관계된 사건들이다. 조그마한 농촌 마을에 한 쌍의 처녀총각이 결혼반대를 무릅쓰고 밀회를 즐기는데, 그 날 보리밭에 뱀 한 마리가 처녀 옆을 지나간 것이었다. 순간 처녀는 너무 놀라 '바기니스무스'가 일어났고, 총각의 성기는 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서로가 진땀이 났고, 둘은 탈진하여 의식을 잃어버렸고, 그 모습을 동네 노인이 발견하여, 의사의 왕진이 있은 뒤에야 성기가 빠졌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붙어 있는 두 사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의사 선생이 보리밭까지 왕진을 나왔고, 치료를 하고서야 성기가 빠졌다. 그런데 이 날의 사건이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양가 부모들도 더 이상 결혼을 반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기니스무스가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113쪽)

본래 이 책은 리라이팅된 것들이다. 문국진 박사의 <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다>는 인터뷰 집의 후속조치로 나온 산물이다. 1985년과 1986년에 발간된 <지상아>와<새튼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잘 보여준 몇 편의 글들을 골라서 다시금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여전히 기똥차게 재미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물론 각각의 사건현장 속에 있었거나 그 피해를 당한 분들에게는 명복을 빌어야 하는 일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있는 도서관 - 천천히 오래도록 책과 공부를 탐한 한국의 지성 23인, 그 앎과 삶의 여정
장동석 지음 / 현암사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밤 어느 프로그램에서 서울 시장을 인터뷰한 걸 봤다. 그가 앉아 있는 집무실 광경도 신선했고, 그가 품어내는 말도 공감이 갔다. 새로 구상한 뉴타운 정책이라든지, 아들의 병역에 관한 의혹들, 그리고 민주당에 입당한 진정한 속내까지도 모두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힘든 시민들을 품고 대화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압권이었다.

그처럼 이 사회를 이끌려면 적어도 시대상황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더욱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도 돋보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만 무성한 게 아니라 그 행동도 그대로 묻어나야 한다. 그 때에만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그의 행보를 모두 닮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 인물들은 물론 책에서 배움을 얻는다. 그건 박원순도 마찬가지다. 수감사 시절 그는 전투하듯이 책을 읽었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 객원연구원 시절 그는 그곳의 책들을 모두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불태웠다. 아름다운 재산을 구상한 것도 실은 그때 읽은 책들 속에서 나온 것이다.

장동석의 〈살아 있는 도서관〉(현암사)은 사람과 책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사회 곳곳을 이끌고 있는 한국의 지성 23인에 관한 책 탐방서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껏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 어떤 책들이 영향을 끼쳤는지 그 깊은 면면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이 책을 대하는 독자들마다 추천하는 이들이 다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고전의 광대무변한 세계를 누비고 있는 고미숙 씨를, 어떤 이는 인간 냄새나는 한국형 평전을 그리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을, 또 다른 이는 여성학과 한의학의 행복한 만남을 엮어나가는 한의사 이유명호 씨를 추천할 것이다. 그들의 삶과 그들이 읽었던 책들이 오늘날에도 생생한 감흥과 도전을 준다는 이유인 까닭이다.

그러나 내게 색다른 감흥과 도전을 준 이들은 이만열 교수와 김두식 교수, 그리고 양희창 목사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 세상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그들이 안내해 주는 까닭이다. 당연히 그들이 소개하는 책도 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조직이 까딱 잘못하면 어떤 권위주의 체제보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30여 년이 흘렀다고 해서 〈야훼의 밤〉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기독교 단체나 교회, 또는 조직들의 현실과 실상이 그 시절 〈야훼의 밤〉의 배경이 된 선교단체에 견주어 그리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51쪽)

이는 헌법학자인 김두식 교수가 〈야훼의 밤〉을 읽어보도록 추천한 이유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답습되고 있는 엉뚱한 권위를 해체시켜야 하는 까닭도 있다. 그런데 그 책은 이슬람에 관하여 전문가인 이희수 교수가 추천한〈정체성과 폭력〉에도 일치한다. 이른바 도그마적인 정체성이 모든 사물과 사건을 선악의 구도로만 이해시키려 한다는 게 그것이다. 중동과 이슬람을 무조건적으로 단죄하는 경향이 그 구도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초등학교 1학년 때 집안에서 발견한〈신약성경〉에 매료되어 지금껏 한국기독교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이만열 교수. 그는 한국기독교가 민족주의 요소를 지닐 것을 강조한다. 그것이 이기백의 〈한국사신론〉과 찰스 라이트 밀스의〈들어라 양키들아〉를 추천한 이유일 것이다. 한편 그는 한국교회의 개편 찬송가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이유인 즉 새 찬송가의 가사가 은혜와 묵상을 방해하고,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만든 찬송가가 너무 많다는 이유다.

"사실 대안학교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의 동의가 절대적이다. 공교육 부적응이 이유가 아니라 '다르게 살겠다는 절대적 의지'가 대안학교를 찾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양희창 교장의 생각이다."(200쪽)

이는 제천 간디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양창의 목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그곳에 전념한 것은 간디의 불복종 정신과 공동체를 지향한 열정 때문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물결로 양극화 문제가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이 때에 진정으로 소박한 꿈을 이루고픈 그 대안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을 품기까지는 어떤 책이 영향을 미쳤을까? 바로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듯 이 책에 등장하는 한국의 지성인들이 추천하는 책은 다 다르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소개하는 책이 몇 권 있다. 이른바 〈사상계〉와 〈기독교사상〉,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루쉰의 〈아Q정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에드워드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그것이다.

아울러 내 눈에 새롭게 띄는 책도 있다. 찰스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 장현광의 〈우주설〉, 데이비드 애튼 보로의 〈식물의 사생활〉, 윤노빈의 〈신생철학〉, 조성기의 〈야훼의 밤〉,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가 그것이다. 목회자로서 민족주의 색체를 갖출 건 무엇인지, 신학과 과학의 만남은 어떤 출구에서 가능한지, 한국교회의 권위주의 요체를 개혁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그 점점을 알고자 하는 까닭에서다.

지금은 바야흐로 융합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시대다. 환경과 철학과 기술과 문학과 문학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통섭의 시대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려고 해도, 부부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려 해도, 그 누구와도 외연을 넓히려 해도, 그야말로 총체적인 독서가 필요한 시대다. 시대를 이끄는 인물도 그를 바탕으로 태어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 - 우리 시대의 23가지 쟁점과 성서적 해법
차정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사회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당장 4월 총선에 공천한 사람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대부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듯 오랫동안 정치인으로 몸을 담으면 부패하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헌데도 여당과 야당은 그 맛에 오래도록 깃들어 있는 정치인을 또 내 보낸다. 그러니 우리사회에 부정부패가 끊일 리가 있겠는가.

양극화는 또 어떤가? 우리나라 국민가운데 상위 10%가 우리나라 사유지를 86%나 독점하고 있다. 더욱이 상위 10%가 국가의 부를 75%나 소유하고 있는 지경이다. 그에 비해 정신질환자는 278만 명, 도박중독자 360만 명, 매춘부 120만 명, 절대빈곤 아동 100만 명, 가출 청소년은 50만 명, 잠재적 신용불량자를 합친 신용불량자 780만 명이다. 거기다가 비정규직 노동자 850만 명이다.

교육은 또 어떤가? 올바른 인성과 창의적인 교육은 실종된 지 오래다. 그저 좋은 대학만 합격하면 최고로 친다. 요즘은 담임선생님들도 무척이나 힘들어 한다. 잘못을 했으면 매를 들고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것마저 맘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어찌 나라의 미래가 밝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이런 상황인데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어떤 생각을 품고 살까? 크리스천들이야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가 구현한 삶을 토대로 사는 게 옳을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께서 원하신 가치와 진리를 실천하는 삶 말이다. 헌데 그 거리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답답하고 또 괴로워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그 심정을 토로하는 이들도 많다.

차정식의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쟁점과 그에 대한 해법을 예수의 관점으로, 성서적 관점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예수라면 과연 한국사회를 어떻게 진단하고 처방할지, 그 관찰과 대안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우리사회의 '정치'와 '복지'와 '양극화'와 '가정'과 '집'과 '교육'과 '자살'과 '생태보존' 등 23가지 사안들이 들어 있다.

"제 영광을 돋보이게 하려는 경쟁심리로 불거진 좌우편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도의 관심으로 전이되어야 한다. 제자도의 삶은 곧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었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종의 자세로 대가 없이 남을 섬기는 이타적인 봉사의 길이었다."(191쪽)

이는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일등 지상주의를 꿈꿨던 '요한'과 '야고보'에 대한 예수의 교정과 대안에 관한 것이다. 차정식은 예수의 교육이 '경쟁보다는 관용'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이 곧 제자들의 발을 친히 닦아 주는 섬김에서, 그리고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품는 관용에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제자들 가운데서도 변절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떤가? 한국사회의 교육은, 심지어 크리스천들의 교육은 경쟁과 자기욕망만 난무한 풍토이지 않는가. 그것은 정부요직에 앉아 있는 공무원들과 해외에서 유학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자녀만 봐도 명확하다. 물론 그 속에서 새로운 충격을 받아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들이 주축이 되어 경쟁사회의 물꼬를 주름잡고 있으니, 어찌 예수가 한탄하지 않겠는가.

"아직도 공사중인 4대강은 끔찍하게 파헤쳐지고 온갖 생명체를 난도질하면서 성급하게 재구성된 인공의 연못으로 변화중이다. 가만 내버려두어도 변화할 텐데 이렇게 급조하여 인간의 편익에 봉사하도록 변화시키는 게 무엇이 나쁘냐는 항변이 들려올 법도 하다."(263쪽)

이는 자연과 소통하는데 힘을 썼던 예수의 관점으로 바라 본 4대강 공사에 관한 신학적 진단이다. 차정식에 따르면 그것은 인공적인 문명의 장식적 가치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수는 자연의 생래적 아름다움을 더 높이 쳤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인간의 방자한 자유로 벌여 놓은 난장판들을 예수의 '치유사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사기와 폭력을 비롯하여, 다문화사회, 종교 근본주의와 다원주의, 타락한 성전과 성직, 그리고 남북문제 등 그의 신학적인 단상들이 많이 담겨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풀어 쓴 말들 가운데 난해한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추구하는 예수의 사고와 관찰은 정말로 좋은데 너무 건조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 계급사회 - 누가 대한민국을 영어 광풍에 몰아 넣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
남태현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집 둘째가 어린이집을 졸업했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함께 다녔던 어린이집도 이제는 셋째만 데려다 주면 된다. 그런데 오늘 녀석과 함께 가는 길목에 녀석이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어 몇 마디를 내게 자랑해 보였다. 한 쪽으로는 신기하면서도 또 한 쪽으로는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과연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조기영어교육을 받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가 영어를 우리말처럼 사용할까? 그 아이들이 초중고를 나오고 대학입시를 보고 직장인이 되어서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 걸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이들 모두가 영어를 쓰는 건 아닐 테고, 오직 영어를 필요로 하는 이들만 쓸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동사무소에서 주소를 이전할 때나 여권을 만들 때도 이름 석 자만 영문으로 쓰면 된다. 은행에서도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전담 직원 한 명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대형 우체국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심지어 우리나라의 정부 부처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필요로 하는 몇 몇 직원만 영어를 잘 하면 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이상한 흐름을 타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영어조기교육이 광풍이고, 초등학교에서 국어선생을 뽑거나 심지어 공무원시험에도 영어시험이 필수다. 실제 생활에서 쓰는 이들은 제한돼 있는데도 모두가 영어에 미쳐 있는 꼴이다. 마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처럼 유교경전을 달달 외우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합격하면 영어는 써먹지도 않는데 마치 계급장을 딴 것처럼 특권행세를 부리지 않던가?

남태현의〈영어 계급사회〉는 그 현상이 우리나라가 미국을 숭배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세계화의 논리가 그것이다. 영어만 배우면 우리도 미국처럼 강국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2011년 3월 현재 미국 정부가 중국에 빚진 돈은 한국 돈으로 1조 2,865억 원이고, 미국 재정은 갈수록 악화될 것이고, 냉전 당시와 달리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할 거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고 한다.

더욱이 영어는 세계 공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쓰는 언어는 중국어로 약 10억 명이 쓰고, 그 다음은 스페인어와 영어로 약 3억 명, 인도의 힌디어와 아랍어를 약 2억 명, 러시아어와 일본어를 약 1억 4천 명 정도 쓰고 있고, 유엔의 공식 언어도 아랍어,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프랑스 등 여러 가지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모두 영어에 미쳐 있다. 조기교육을 비롯해 조기유학까지, 대학입시제도와 어학연수와 취업시험까지 모두 영어가 도배하고 있다. 과연 그런 교육과 제도를 통해 우리 모두가 혜택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다. 돈은 그만큼 쏟아 붓지만 우리나라의 영어실력은 세계에서 하위다.

그렇다면 영어광풍의 진정한 수혜자들은 누구일까? 남태현은 영어와 관련된 산업자들, 이른바 우리나라의 기업화된 영어학원이 그 첫째요, 둘째는 토플과 토익 시장의 최대 물주인 ETS, 셋째는 한국의 학원사업에 투자하고 외국의 투자자들이라고 한다. 거기에다 또 하나 있지 않을까? 한국의 유학생들이 미국에까지 가서 먹여 살리는 미국의 대학들 말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두 가지 대책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구체적인 정책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국가경영 차원의 문제입니다."(194쪽)

남태현이 말하는 구체적인 정책과 국가경영 차원이란 무얼까? 우리나라 정부가 공무원시험에서 영어를 필수로 하던 제도를 바꾸는 것, 외국의 학생들을 많이 유치하는 대학들에게 높은 평가점수를 줬던 제도를 바꾸는 것, 그리고 대학입시도 영어 대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외국어를 선택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말해도 콧방귀도 안 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영어로 계급화된 사회를 밀어붙이고 있는 이들 말이다. 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그런 정책적인 변화는 진정으로 필요한 대안이다. 그것만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나중에 써 먹지도 않을 영어 때문에 골몰해야 할 이유도 없고, 영어 광풍의 수혜자들에게 괜한 돈을 싸질러 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총선 때부터, 그리고 대선 때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백성들에게 참된 것을 일깨워주고 또 되돌려 주었듯이, 우리나라도 영미숭배정책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또한 여당과 야당에서 당리당략으로 집값을 안정화시키겠다고 여러 공약들을 내세우지만 그것들은 해가 바뀌면 수시로 달라질 일들이고, 진정으로 집값을 잡으려면 입시제도와 대학정책만 바꾸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있는 예수 - 어떻게 우리는 2천 년 전 인물을 지금 만날 수 있는가
루크 티머시 존슨 지음, 손혜숙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18세기 계몽주의는 신학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에서 인간 예수로 분리해 내는 시도가 그렇다. 예수의 일생도 역사적인 관점으로 조명하는 붐이 일었다. 그로 인해 예수는 유대인 혁명가였고, 십자가에 처형되자 제자들이 그를 신격화했다는 주장도 폈다.

그것이 타당한 설득력을 얻었던 것일까? 그 뒤에는 사(四)복음서를 놓고서도 역사와 신화를 떼어내는 연구가 진행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 싼 '역사적인'(historical) 부분과 '신화적인'(mythical)부분들을 분리시키는 작업이 그거였다.
왜 그런 신학적인 작업을 한 걸까? 고백의 차원에 머물던 신앙심에 회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존의 규명을 먼저 밝혀내고픈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예수는 누구였는가?' 하는 것보다 '그 시대의 예수는 누구였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너무 앞서나가면 본질에서 이탈하기 마련이다. 역사적 예수에 외골수로 매달린 신학자들은 대부분 예수를 유대 혁명자로 간주하며, 기독교는 초기 제자들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신약성경의 사(四)복음서도 초기기독교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기 위해 쓴 '문학작품'이라고 강론한다.
루크 티머시 존슨의 〈살아 있는 예수〉는 그와 같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한다. 이제까지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부인하고, 지난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가 성서 속에 있는 예수보다 더 믿을만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한 방 펀치를 날리는 격이다.
"최근 유사한 전제로 다시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도 복음서의 다양성을 없애려 한다. 이번에는 수세기 동안 신앙인에게 가장 가치 있었던 복음서의 특징, 즉 부활에 비추어 예수를 해석하고 증언하는 것이 '역사적 진리'에 부적합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학자들은 사실이라고 추측되는 '말씀'과 '행위'의 단면만을 그 설화에서 발굴해 낼 수 있으며, 그것만을 예수가 '정말로 누구였는가?'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런 재구성이야말로 '더욱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해석 구도를 적용시키지 않았으므로 사실과 더 일치하며, 불일치 요소가 제거되었으므로 더 일관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163쪽)
이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들에 관한 허점을 찌르는 대목이다. 케네디나, 히틀러나 데레사 수녀도 그렇지만, 역사적 예수를 인식하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필름 조각 더미가 한 편의 영화가 될 수가 없고, 짧은 에피소드를 수집한 것이 한 권의 소설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도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들은 예수를 하나의 모형으로만 확정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성경을 창밖으로 던지게 만드는 꼴이고, 신약성경의 예수와는 다른 예수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는 모순을 범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존슨은 거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사(四)복음서에 기초한 예수에 집중하는데 반해 그는 바울서신과 일반서신도 눈여겨본다. 바울 서신 같은 경우는 기독교 초기에 기록된 믿을 만한 서신으로 예수 탐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확신한다.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건대 한 인물에 대한 탐구는 다양하다. 때로는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한다. 예수에 관한 칭호도 선생, 메시아, 왕, 예언자, 제사장, 주님, 인자, 하나님의 아들, 말씀, 재판관, 보혜사, 증인, 친구 등 너무나 다양하다. 또한 예수에게 적용된 은유와 비유도 양, 목자, 문, 포도나무, 빛, 빵, 물, 피, 성전, 영, 닻, 돌, 건축가 등 복합적이다.
그런 호칭과 은유는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비친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가 그들에게 드려내려 했던 것은 지극히 적다. 그만큼 예수가 갖고 있는 면은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걸 언론에 비추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언론이 항상 예수를 묻고 답한 것이지, 예수가 항상 언론에 답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구전과 전승도 그와 같다는 뜻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으면 존슨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을 한 방 날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