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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 8월 15일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교회를 창립한지 2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아이들 셋과 청년 한 명, 그리고 어른 한 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던 때였다.

그 무렵 어느날 아침, 중년 한 분이 교회에 상담 요청을 하러 왔다. 2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 온 삶을 술술 풀어 놓았다. 물론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그 분은 남다른 유머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다 쏟아놓은 다음, 끝머리에 들어 오십견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우리 부부는 그 분이 떠난 자리에 앉아 그 분을 위해 정성스레 기도했다. 그로부터 한 주간이 지났을 때 그분이 사는 집을 찾아나섰다. 우리 부부가 집에 들어섰을 때, 그 분은 너무나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이야기를 또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아내는 그분을 모시고 신경외과에 다녀왔다. 아픈 어깨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동행해 준 것이다. 그리고 하루 이틀이 지난 바로 그날 아침, 아내는 그 분을 위해 끓인 호박죽을 가지고 길을 건너는데 그만 차에 치인 것이다. 그날 사고로 얼굴은 퉁퉁 부었고, 왼쪽 다리가 분쇄골절을, 오른쪽 발목은 금이 갔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로부터 한달이 넘은 지금 아내의 얼굴은 차츰 붓기가 빠지면서 제자리를 찾았다. 분쇄골절 부위도 수술을 해 안정을 취하고 있고, 금이 간 발목은 석고보드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면 무척이나 안쓰럽고 딱할 뿐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Easy com, Easy go."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것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는 그 분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제 몸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그 분도 본의 아니게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쉽게 얻으려는 자세로 매사를 조급하게 밀어붙이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급히 먹는 것은 무엇이든지 체하는 속성이 있지 않던가. 일도, 사랑도, 그리고 사람도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어렵더라도 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한걸음씩 헤쳐 나가는 자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분명 귀한 것을 얻을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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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19-12-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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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포스터 <언터처블:1%의 우정>
ⓒ NEW
언터처블

성격은 달라도 그것 때문에 서로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완고한 사람이 때론 어설픈 사람을 좋아하는 게 그렇다. 내성적인 사람이 수다쟁이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들이 댄스곡을 즐겨하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격차이는 그렇다 쳐도 신분차이는 어떨까? 고급저택에 사는 이들이 전월세에 세 들어 사는 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대지주가 하루 벌어 사는 품팔이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대기업 사장이 시장 상인과 만찬을 즐길 수 있을까? 오줌보 친구라면 모르겠지만 우연한 사이라면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영화 <언터처블:1%의 우정>은 서로 다른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만찬까지 즐기는 모습을 그려낸다. 최상류층에 속하는 필립(프랑스아 클루제 분)과 최하층의 드리스(오마 사이 분)가 펼치는 연기력을 통해 실제 인물들의 더 따뜻한 소통과 우정도 그려볼 수 있다.

필립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백만장자다. 승무원이 딸린 전용기에 억대의 차들, 생일 때마다 대동하는 오케스트라의 공연. 그가 최상류층의 신분임을 드러내주는 것들이다. 그것이 그를 더 엄격하고 더 근엄한 성격의 소유자로 살게 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오페라와 클래식에 젖어 사는 것도 상류층만의 특권이라 여기는 까닭은 아니었을까?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이유도 그랬다.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픈 욕망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한 사고로 그는 목 아래의 감각까지 모두 잃었고, 대 여섯 번까지 시도한 아이는 모두 유산 당했고, 급기야 그의 아내까지 잃는 불운을 겪는다. 백만장자의 신분은 유지했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 그였다. 성경의 '부자 욥'에 빗댈 수 있을까?

▲ 스틸 한 컷 <언터처블:1%의 우정> 속 한 장면
ⓒ NEW
1%의 우정

그런 그에게 찐한 우정을 보여준 이가 등장한다. 흑인 출신에 삼촌 밑에서 배다른 형제들과 자란 방랑아 드리스가 그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인도 사회의 불가촉천민에 빗댈 만한 사람이다. 어디에도 얽매임 없는 좌충우돌한 성격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취향은 필립의 집에서 도우미로 일할 때에 곧잘 드러난다. 성경의 '거지 나사로'에 견줄만 할까?

서로 다른 성격에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집 주인과 그 집의 노예와도 다를 없는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무엇이었던가? 무엇이 둘 사이를 우정의 끈으로 연결시켰던가? 필립은 돈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위해주는 드리스의 진실성에서, 드리스는 자신의 조언과 재능을 인정해 준 필립의 배려심에서,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싹트고 깊어졌다.

드리스의 진실성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한 밤 중 거친 호흡을 하고 있던 필립을 휠체어에 태워 부둣가 산책을 나선 일, 필립의 생일잔치 석상에서 클래식이 아닌 댄스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던 일, 별안간 필립으로부터 해고된 뒤로도 그의 아픔과 허전함을 달래주려 다시 찾아 간 일, 필립이 주고받던 연애편지의 주인공을 마지막까지 만나도록 주선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난 일이 그렇다.

▲ 스틸 한 컷 <언터처블:1%의 우정>의 한 장면
ⓒ NEW
언터처블

드리스를 향한 필립의 배려심은 어떠했나? 필립은 그가 일자무식이었어도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높이 샀고, 그가 그린 처녀작품도 자신이 아는 미술애호가에게 직접 선을 보여 판매할 정도로 그의 예술성을 인정해 주었고, 괴팍한 자신의 딸아이에게 매를 들어서 훈계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 데서, 그를 향한 진정어린 배려심을 엿볼 수 있다.

'언터처블'이란 영화 제목의 앞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필립과 드리스는 사실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사이다. 오늘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화상이 그렇다. 서로 다른 성격이야 잠시 잠깐의 흥미를 유발키 위해서는 함께 할 수 있다. 그들의 신분은 서로가 손을 맞잡을 수도 없고, 오페라나 만찬 석상에서도 즐길 수가 없는 사이다.

앞선 그 제목 뒤에 토레다노 감독은 '1%의 우정'을 붙였다. 아니 또 다른 제목 하나를 단 것이다.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삭막한 연결고리보다, 서로 간에 '진실과 배려'를 나누는 인간다운 삶의 교감을 이루고픈 의도가 아니었을까? 말이 될지는 모르지만 '따뜻한 자본주의 사회'를 꿈꾸는 것 말이다. 이 영화 <언터처블:1%의 우정>은 두고두고 사랑받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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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틸 한 컷 〈저스티스〉속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 쇼박스
저스티스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신작 〈저스티스〉는 잘못 꿰맨 단추가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하는지 알게 한다. 청소년 범죄자들을 지도하는 학교선생 '제라르 윌'(니콜라스 게이지 분)은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여 입원하자 그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어 오른다. 그 무렵 법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보복할 수 있다는 '사이먼'(가이 피어스 분)이 내민 음모의 손을 붙잡는다.
법이 아닌 불의한 거래에 그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법의 판결은 시간도 걸리고 정확한 판결을 도출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뒷거래에는 더 큰 덫이 있다는 걸 그로서는 생각지 못한 걸까? 단순한 부탁만 들어주면 모든 게 해결될 걸로 생각했던 걸까? 결국 그는 그들이 내 민 덫에 걸려 일급살인자로 내 몰리고 만다.
이 세상 누구든지 은밀한 거래, 불의한 거래는 애당초 확실하게 차단해야 한다. 그것보다 더 안전하고 바른 선택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청와대 내에서 그런 거래에 손을 맞잡았다니 어찌 경악치 않겠는가?
▲ 스틸 한 컷 〈저스티스〉속 강간 폭행 당하여 입원한 아내
ⓒ 쇼박스
저스티스
내부고발자, 왜 망설이지 않나?
'불의한 거래'가 더 큰 화를 몰고 온다는 내용 이외에도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내부 고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법부의 불신'에 관한 것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 기업들은 사회 환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동자들의 복지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것보다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는 방안도 없고, 결국 그것이 더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헌데 그 기업 제품이 사람의 인체와 자연환경에 해를 끼친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윤리와 도덕에는 전혀 신경을 안 쓴다면 말이다.
문제는 그걸 바라보는 직원들의 관점이다. 그저 덮고 가는 게 능사라는 측과 함께 그걸 고발해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견해가 엇갈릴 수 있다.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내부 고발자', 아니 '내부 제보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영화 〈저스티스〉에서도 내부제보자 있었다. 기업윤리와 경영방침에 심각한 불의를 발견한 직원이었다. 그걸 고발코자 취재 기자를 만났는데, 그는 기업에서 운용하는 민간인 사찰과 청부살해업체에 의해 낭떠러지로 떠밀려 죽고 만다. 그와 같은 죽음의 위협이 두려워서 내부제보를 망설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오래 전에 개봉된 영화 〈인사이드〉에서도 마찬가지다. 담배회사의 연구 개발자로 3년간 몸담았던 '와이건'이 담배의 유해물질이 있음을 밝히자 권고사직을 당한다. 회사에서 쫓겨날 때 내부비리를 발설치 않는 조건으로 각종 연금과 복리비를 받지만, 그는 가정의 경제적인 안정보다 국민들의 알 권리와 건강에 더 신경을 쓴다. 그 속에서 온갖 위협과 회유를 받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끝내 만 천하에 공개한다.
▲ 스틸 한 컷 〈저스티스〉속 경찰이 윌을 풀어주는 모습
ⓒ 쇼박스
저스티스

사법부 불신, 한계에 달했다
"변호사를 믿지 말라.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건 인간성, 이성, 정의다."
이 영화 〈저스티스〉에서 윌이 발견한 취재기자의 노트에 적혀 있는 글이다. 또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은 그 글귀가 우리사회의 사법부를 반영하는 음성처럼 들리기도 하지 않을까?
그건 〈부러진 화살〉에서도 마찬가지다. 석궁 교수가 법의 진실을 요구하는 동안 법원 판사는 또 다른 판사를 두둔하고 나섰다. 정의로운 판결보다 조직내부의 사람들을 더 옹호하려는 기획적인 판단이었다. 그로 인한 그 교수의 서글픔은 극에 달했고, 그의 아내와 아들만이 그의 위로자가 될 뿐이었다.

이 영화〈저스티스〉에서도 뉴올리언스 경찰 서장은 '사이먼'이 이끄는 조직과 부당한 내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이미 서장은 그들의 암호를 꿰차고 있었고, 경찰서에 붙잡혀 온 윌도 도주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 주었다. 물론 그것은 윌을 더 큰 올갈미로 덧씌우는 계략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어찌 경찰만 해당되겠는가? 때로는 권력에 기생하려는 판사와 검사도 같은 영향권 내에 있을 것이다. 심지어 변호사까지도 믿지 말라고 이 영화에서 충고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사법부 불신이 극에 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윌이 믿을 사람이라곤 그의 아내뿐이었음을 이 영화에서도 드러내 준다.
영화 〈저스티스〉는 꽤 볼만한 영화다. 깊은 감동이나 세밀한 추리력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큰 교훈을 안겨준다. 불의한 거래에 말려들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교훈과 함께, 내부제보자들의 고독과 갈등,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사법부의 불신까지 드러내 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들을 되짚는다면 큰 유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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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 영화 <더 그레이>의 메인포스터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오늘도 생과 사의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 언제 어디서 단속반이 몰려올지 몰라 조마조마하며 장사하는 길거리 노점상들이 그렇고, 링거 하나로 목숨 줄을 연명하는 병원 입원 환자들이 그렇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그렇다.

자유시장체제, 글로벌시장경제, 한미FTA, 그 모두가 물고 물리는 게임과 같은 살벌한 체제 아니던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쓰러트리고 심지어 다시는 발 딛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밟는 약육강식의 짐승과도 같은 틀이 그것이다. 스님으로 살다가 격구에 뛰어들겠다던 드라마 〈무신〉의 김준도 그렇지 않던가. 그 앞에 신(神)은 철저히 배제당하고 만다.

리암 니슨 주연의 〈더 그레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회색지대를 보여주는 영화다. 살다보면 여러 지대를 만날 수 있지만 대부분 두 가지다. 대자연 속에서 생명이 넘실거리는 풍부한 녹색지대, 그리고 온통 죽어가는 사람들이 쌓이는 흑색지대가 그것. 영화는 그 속에서 삶의 끈질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리얼하게 연출한다.

영화에서 죽음을 부르는 공포는 두 가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의 혹한, 그리고 숲 속에서 떼를 지어 다니며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리고 있던 늑대들. 생존 본능이 강한 인간으로서는 그 어떤 혹한도, 그 어떤 짐승 떼도 곧잘 물리치곤 한다. 그게 대부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승리이자 감동의 드라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영화는 절망만 끌고 간다.

최초 비행기 추락사고로 살아남은 이들은 7명이었다. 한꺼번에 절반가량이 죽어난 것이다. 그 뒤 눈보라 속에서 불침번 서던 1명이 늑대에게 물어뜯기고, 그곳에서 이동하다가 또 1명이 늑대에게 잡혀 먹히고, 저산소증을 앓던 1명, 낭떠러지를 건너다 1명, 강가에서 1명이 낙오자로, 그리고 늑대를 피하려다 물속에서 또 1명이 죽는다. 결국 프로페셔널 가드인 오트웨이만 살아남는다.

▲ 포스터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잔인하지 않다면,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마지막 희망이라도 보여주려 했다면, 주인공만이라도 살아남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마저도 늑대와 사투를 벌이다 죽음으로 끝을 낸다. 물론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늑대가 죽었는지, 정확하게 밝히 않고 희미하게 처리한다. 그를 구출하러 헬기가 뜬 것도 아니고, 강가 가까이에 오두막이 보이지 않았으니, 관람객들 모두는 그가 죽었을 것으로 단정할 것이다.

조 카나한 감독은 과연 이 영화를 공포영화로만 처리하려 했을까? 단순히 늑대에게 잡혀 먹히는 것을 여운으로 남길 작정이었을까. 정확하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신의 실존에 대한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족쇄다. 그 두 가지를 하나로 묶기 위해 실은 늑대라는 짐승을 투입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사실 비행기추락 이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어설픈 위로의 기도를 올렸다. 이동 중에 늑대와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자들도 함께 신에 대해 논쟁한다. 물론 주인공 오트웨이는 오직 폐 속에 품어 나오는 차디찬 공기만이 실재라고 강조한다.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그 현실을 마주한 인간뿐이라는 것. 그것이 신을 철저히 배제시킨 이유다. 오트웨인도 마지막 호소에서도 그렇게 읊조렸다.

▲ 포스터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조이앤컨텐츠
더 그레이

"주여, 제발 이러지 마소서. 이번에 도와주면 죽을 때가지 믿겠나이다. 그래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 할 거야. 그래 내 힘으로 살아남을 거야."

또 하나는 노동자들의 족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알래스카의 고단한 작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향하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처와 자식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족쇄는 생의 인연을 끊을 정도로 고단하다. 영화 첫머리에서 주인공 오트웨이가 총으로 자살하려는 것도, 강가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생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지 않던가.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절망의 족쇄는 한 순간 짐승의 밥이 되어 죽는 것보다 더 독한 공포였던 것이다.

"살아 돌아가면 또 다시 밤새 기계 돌리고, 술만 푸고 살아야 할 것 아냐?"

가까이 살고 있어서 종종 듣는다. 청계천에서 노점상도 하고 상가를 얻어 일하고 있던 이들이 가든 파이브 하나만 믿고 모든 주권을 내 줬다가 졸지에 낭패를 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또 멀리 있어도 그런 소식도 듣는다. 재벌의 탐욕에 갈기갈기 찢겨진 정리해고노동자들이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함께 뭉쳐 살아갈 해법을 찾는다고. 바로 그들이 살얼음판의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이들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늑대는 아득한 공포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공포는 현실 세계의 재벌들이요, 자유시장체제요, 글로벌시장경제요, 한미FTA 체제를 굳히려는 정치권력들이다. 이러한 때에 신의 실존에 대해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이러한 때에 노동자들의 족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삶의 해법이 없는 것보다 더 지독한 공포가 어디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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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은이) | 문학동네 | 2012-01-06

도스또예프스끼,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이자 인간의 정신세계를 가장 신랄하게 파헤친 잔인한 천재지만

우리 집 책장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켜켜이 먼지 쌓인 낡은 이름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구석에 처박힌 그 이름을 환생시킬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 책은 독자들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 작품, 예술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다.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를 통해 러시아의 대표적인 도시와

그 안에서 탄생한 찬란한 문화예술의 발자취를 폭넓게 다루었던 저자 이병훈이,

이번에는 시공을 초월한 대문호의 연대기를 축으로 그가 살아간 시대와 공간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과 사상의 향연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복원해냈다.

저자가 모스끄바 국립대학 재학 시절 도스또예프스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부터 모아온 방대한 자료와 더불어,

2009년과 2010년 여름,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모스끄바, 대부분의 작품 활동을 전개한 뻬쩨르부르그,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중 4년간 감옥살이를 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전원생활을 즐긴 스따라야 루사 등을 직접 돌아보면서 취재한 기록으로 현장감과 입체감을 더했다.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새로 번역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과 편지글, 주변 사람들의 회상기 등

풍부한 예문과 다양한 현장 사진 및 자료 도판을 담아,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 또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족사와 유년 시절을 알아볼 수 있는 동생 안드레이의 회상록,

공병학교 시절 모습을 짐작케 하는 친구 뜨루또프스끼의 회상기, 일부 『작가의 일기』,

저명한 도스또예프스끼 연구가 L. 그로스만의 기록 등 그간 국내에서 접할 기회가 없었던 자료들을 처음 우리말로 소개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에 번역, 출간된 몇몇 평전이 가진 관점의 한계를 넘어

인간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의 여정을 가능한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과 증언에 따라 복원하는 충실한 전기이자,

그가 러시아 곳곳에 남긴 흔적을 따라가는 생생한 여행기, 동시에 작가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과 예술론을 개괄하는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를 찾아 나선 길에서
그가 절망의 시대에 던지는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제목은 장편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반복하는 말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예술관을 응축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외형적이고 정형화된 것이 아니라

‘선한 정신’에 의해서만 윤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불완전한 상태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무정형의 아름다움은 선한 정신에 의해 평정을 되찾을 때만 세상에 구원의 빛을 선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듯 도스또예프스끼의 여러 작품을 통해 그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구원의 메시지를 탐색한다.

그것은 죽은 지 130년이 지난 이역만리의 작가를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가

왜 다시 주목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저자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청년 시절, 산산이 부서졌다 다시 태어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보며 삶의 고비를 넘긴 저자는

“우리 누구에게나 라스꼴리니꼬프―갈라놓다, 분리하다, 분리주의자라는 뜻이 있다―적인 측면이 있다.

자기 안의 라스꼴리니꼬프를 직시해야만 현대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육체와 정신, 자기와 타자, 개인과 사회, 이상과 현실, 삶과 생존의 뿌리 깊은 ‘분리’를 극복하고

다시금 순수한 생의 에너지를 회복할 열쇠가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책장 구석에 방치된 도스또예프스끼를 펼쳐 들 때이다.

그 깊고 넓은 우주로 나아가기 전에 든든한 사전 지식을 제공하고 훌륭한 동기 부여가 되어줄 이 책과 함께

새해 목표로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읽기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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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 동안 도스토예프스키 읽기를 했습니다.

이 책이 먼저 나와 읽은 후였다면 훨씬 많은 분이 참여하셨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만

이제라도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운 마음입니다.

더구나 저자인 이병훈 님은 이전에 펴낸 두 권의 러시아 문화예술기행을 읽어본 분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분이십니다.

책세이 도서로 추천하신 파니핑크 님과

지난 두 달동안 도스토예프스키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우선 기회 드립니다.

우선 기회를 드리는 이유는 어떤 카테고리든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는

회원님들에게 카페 매니저로서 작은 것이나마 혜택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이런 식의 혜택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앞으로도 계속 있을 예정입니다.

신입과 오피니언에 상관 없이

카페 활동에 관심을 보여주시는 분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스크랩해주시고, 읽고 싶은 이유를 댓글로 달아주세요.

신입 회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카페에 책세이가 3편 이상 올라와 있어야 합니다.

선착순은 아닙니다. 신청 마감은 8일이고 책은 9일 발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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