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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에는 분교였다가 지금은 폐교가 된 백련초등학교. 그곳은 어린 시절 내가 배우고 자란 초등학교였다. 지금은 학교 운동장도 좁디 좁은 논밭과 같지만 그때는 월드컵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체육대회 때가 되면 왜 그렇게 운동장이 길던지, 이어달리기를 해도 좀체 끝나지 않았고, 기마전을 해도 적벽대전을 방불케 하는 광활한 대지였다.
그곳에서 함께 배운 아이들 이름이 떠오른다. 기현이, 상운이, 행용이, 성수, 길배, 인갑이, 치권이. 또 정순이, 영금이. 다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들 그 운동장에서 배우고 자랐다. 학교 운동장 아래는 논두렁길이 나 있었고, 학교 옆 동산에는 대낮에도 무서운 묘지와 비석들이 서 있었다.
백련초등학교에서 잊지 못할 게 있다면 우리들을 동무처럼 대해 준 선생님들이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내게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 문성화 선생님이 바로 그 분이다. 그 분은 무척이나 잘 생겼다. 미남형이라 여학생들에게는 인기 짱이었다. 나도 그 분이 잘 생겨 내심 질투심도 났지만 내 노래 솜씨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셨다. 더욱이 꾀꼬리처럼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예쁜 혜련이 누나와 함께 학교를 대표해서 듀엣으로 졸업식을 부르게 한 건 더 가슴에 남는 추억이다.
탁동철 선생님과 아이들의 산골학교 이야기 묶음집인 〈달려라, 탁샘〉(양철북 펴냄)도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책이다. 그 선생님은 아버지가 졸업한 학교를 다녔고, 이제는 그 모교에서 아들딸들과 함께 공부하고 씨름하고, 산과 들판을 누비고, 운동장 구석에 작은 논도 만들어 모도 심고, 심지어 닭장도 짓고 토끼도 키우며 아이들과 동무가 되어 살고 있다.
"손바닥만 한 논에서 하는 모심기지만 흉내는 다 낸다. 작대기 두 개에 끈을 묶어 만든 못줄을 두 아이가 양쪽에서 잡아 줄을 맞추고, 다른 아이들은 허리 숙여 모를 심었다. 교장 선생님이 보시고는 거 되지도 않을 걸 뭣하러 하냐고 했다. '안 되어도 좋아요. 살아 있는 모를 구경만 해도 그게 어디에요.' 5학년 아름이는 벌써 '선생님, 우리 나중에 이걸로 떡 해 먹어요.' 한다. 논두렁을 만들고 콩도 심었다. 일기장을 보니 모를 심는 날이 5월 31일이었다."(67쪽)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은 알고 있다. 어린 시절에 가장 바쁠 때가 모내기를 할 때라는 것 말이다. 경운기가 나오지 않던 그 시절에 나도 손모내기를 직접 했다. 그때만 되면 아이들이 학교를 빼 먹고 부모님들을 도와 직접 모내기를 도와야만 했다. 물론 힘이야 들지만 학교를 빼 먹는다는 건 그 시절엔 재미난 일이었다. 더욱이 배불리 먹었던 모내기 밥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런데 탁동철 선생님은 거기에다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니 모내기 할 때 학교에 나오지 않는 녀석이 있으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엔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 녀석의 논으로 모내기를 직접 하러 가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줄을 띄우고 한 줄에 한 뼘씩 모를 심는 모습은 흡사 이웃집 아저씨의 품앗이 하는 모습일터다. 물론 선생님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정겨운 동무로 어울린다.
탁동철 선생님이 머문 학교들은 명문이거나 도심에 있는 초등학교가 아니다.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그 흔한 시골 초등학교다. 가난하고, 배운 게 덜하고, 자주 싸움을 하는 그런 아이들이 자라는 학교다. 탁동철 선생님은 그 속에 공부하다 삐친 아이와 싸우기도 하고, 연극을 해서 아이들 잘못을 돌이켜보게 하고, 또 학교 급식문제에 관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토론하며 길을 찾기도 한다.
요즘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하나만 낳아서 기른다. 교육비가 그만큼 만만치 않는 탓이다. 그런데 시골도 그런 흐름을 타고 있으니, 그 많던 시골 학교들이 다들 폐교가 될지 모른다. 이 책에서 '닭장'이란 시를 쓴 차정현이랑 '메뚜기 선수'를 쓴 다솔이, '거름 나르는 아저씨'를 쓴 유정이, '잡탕 떡볶이'를 슨 희영이도 먼 훗날 자기들이 배우고 자란 '오색초등학교'랑 '공수전분교'랑 '상평초등학교'를 바라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나 어릴 적 배우고 자랐던 백련초등학교처럼 녀석들도 그런 감회를 떠올리지 않을까? 왜 그 시절에 그토록 코피 터지며 친구들과 싸워댔는지, 왜 그토록 여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는지, 왜 그토록 친구 물건을 탐하며 살았는지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함께 뒹굴며 자기 삶을 나누어 준 멋진 탁동철 선생님을 사무치도록 떠올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