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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반걸음만 앞서가라
이강우 지음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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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광고 한 편은 때론 지루한 영화보다 훨씬 낫다. 그만큼 찐한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물론 광고가 감동만을 주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상품도 그만큼 잘 팔릴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광고의 본 목적인 까닭이다.


따뜻한 감동에다 상품까지 날개 돋친 듯 팔도록 하는 광고가 있다면 너나없이 좋아할 것이다. 그 상품을 내다파는 사주는 물론이요 광고주와 기획사도 그만큼 기뻐할 것이다. 그런 광고를 만드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이 있으니, 이강우가 그다.


“비록 몸은 쪼그려 새우잠을 자고 있을망정 꿈속에서는 망망대해를 헤쳐 가며 고래의 뒤를 좇고 있을 것이다. 그래, 꿈에서라도 고래를 잡아 보시게.”


그가 쓴 〈딱 반걸음만 앞서가라〉(살림·2007)는 책에 나오는 한 토막말이다. 이는 회사의 동료직원이 콘티를 짜고 스케치를 하다 새우잠이 들었는데, 그 모습을 두고서 그가 속으로 속삭인 말이다. 어찌 보면 안쓰러운 동료 직원을 향한 배려이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자기 자신의 옛 뒤안길을 돌이켜보는 그림자와 다르지 않겠나 싶다.


사실 광고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파는 직업이다. 달랑 광고 기획서 몇 장이나 콘티 몇 컷, 그리고 아이디어 스케치 몇 장만을 가지고 수십 수백억 원 대에 이르는 비즈니스를 성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자칫 계획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천하의 사기꾼이 되기 쉬운 직업이다.


그 까닭에 늘 경쟁 속에서 살아야 되고, 누군가와 비교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늘 뽑히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가게 되니, 하루하루가 어쩌면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일 것이다. 그야말로 시시각각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광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새우잠을 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인생을 30년 동안 살아 왔으니 그만큼 이력이 날 법도 하다. 그런데도 그는 더욱 미친 듯 열성을 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 일에만 신명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 어찌 고래를 잡을 수 있겠는가?


“아름답지도 않은 것을 아름다운 척, 진실 되지 않은 것을 진실한 척 꾸미는 것에 싫증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106쪽)


이는 일본의 유명한 TV 광고 감독 ‘스기야마’라는 사람이 40대 중반에 목숨을 끊으며 한 말이라 한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목숨을 끊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프랑스 남쪽 해변에 내리쬐는 천연색색의 찬란한 빛깔이 그가 찍은 광고 작품 속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란다.


어찌 보면 그는 자기 작품에 그만큼의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요, 자기만의 색채를 잃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쏟은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도 직업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강우는 그 감독의 불타는 직업정신만큼은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이강우 만의 몫이 아니라 이 땅에 직업정신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몫이지 않나 싶다.


그 까닭에 오늘도 그는 그만큼의 좋은 고정관념을 소비자들에 심어주기 위해 자기만의 색체를 띤 광고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만큼의 리딩 브랜드를 내세워 우뚝 세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30년간 전파광고에서 그가 거장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비록 새우잠을 잘지언정, 남보다 색다르고 감동어린 광고를 반발 빠르게 만들어 낸 덕분이지 않나 싶다. 가히 깊이 본받아야 할 인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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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
김영실 지음 / 물푸레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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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을 농부가 과목을 접붙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염나무에 감나무 순을 접붙이면 뿌리는 고염나무로되 열매는 감이 달린다. 사람도 그 태어난 바탕이 좋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 위대한 사상에 접하고 감화를 받게 되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인간접목, 그것이 곧 교육이다.”


이는 한 평생 교육자로 살았던 김영실의 〈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강화도 마니산 산골 촌뜨기로 태어난 그가 어떻게 교육자가 되었는지, 그 삶을 밝힌 스스로의 자서전이다.


그가 보낸 어린 시절은 흔히 말하는 산골 소년의 삶 그대로였다.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그는 또래 아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소에게 꼴도 먹였고, 초가을엔 논두렁에서 게 구멍을 살폈고, 콩서리와 참외서리 같은 것도 즐겼다. 고무로 된 축구공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새끼로 둘둘 말아 만든 공을 즐겨 차기도 했다.


그런 즐거움에 빠져들 무렵 신식학교의 길이 열렸다. 이전까지 해 오던 서당식 한문교육과는 달리 새로운 보통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더욱이 서당에서는 마음껏 질문할 수 없는데 반해 그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를 묻고 또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도 초등학교를 기점으로 끝인가 싶었다. 배고픔과 학비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집들이 태산같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둘째 형의 도움으로 끝내 배제학당에 입학했다. 그 때의 경쟁률이 11대 1이었으니 그 스스로 큰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입학 후 인천에 있는 친구 집에서 통학하는가 하면, 친구와 자취도 해야 했고, 서울로 올라 온 동생과 함께 서대문의 기숙사에 입사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고초를 감내해야 했다.


배제중학교를 끝마칠 무렵 그는 경성제대 철학과에 가고 싶었으나 돈이 만만치 않았다. 급기야 여러 방도 끝에 일본 유학의 꿈을 품었고, 당시 배제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던 아펜젤러 2세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그 분은 20원이 든 수표를 그에게 건네며, 큰 용기를 북돋아 줬다.


“가서 열심히 공부하게. 세상으로 날아가 꽃을 피우게.”(49쪽)


이른바 그때를 기점으로 김영실은 민들레 홀씨의 사명을 이어받았다. 민들레 홀씨는 그야말로 들판이나 재방, 길가나 자갈밭 그 어디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생명을 터 나간다. 그처럼 그가 일본 본토 속에 들어가 유학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헤쳐 나가길 그 분은 바랐던 것이고, 김영실 또한 그 뜻을 고이 간직했던 것이다.


꽃다운 18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온갖 막노동을 했다. 처음 소개받아 간 곳은 하네다 공항이었다. 비행장 공사가 한창이었던 그곳에서 주로 철근이나 시멘트 그리고 앵글을 날랐다. 어떤 날은 슬레이트 공장에 나가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땀 흘린 결과 1943년 4월에 눈물겨운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24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한국으로 귀국하여 학도병에 지원했다. 징집보다는 그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때 학도병에 함께 지원한 동료들은 대부분 만주 벌판을 지나 북지의 산동성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중국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끝내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광복을 맞이했고, 그들도 머잖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미군청정 상무국 물가과에서 근무하다가, 부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길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그 길이 교육임을 깨닫고 곧장 숙명여고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혼인한 후 서울고등학교에 재직했지만 6.25가 터졌고, 훗날 공군에 지원하여 항공병학교에서 근무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우리 민족의 살 길을 고민했고, 급기야 양을 키워서 온 국민에게 분양하기로 다짐했다.


“그때는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항공병학교 교관실장으로 군복무도 해야 했고, 충남대에 강의도 해야 했고, 집에서는 양들을 돌봐야 했다. 아내도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가정 살림을 꾸려야 함은 물론이고, 내가 출근한 뒤 양들을 돌봐야 했고, 또 돼지와 오리도 길러야 했기 때문에 일거리는 산더미 같이 많았다.”(165쪽)


이 책을 펴낼 당시 86세의 김영실 총장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평생 가난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배움의 길을 열고 달려 나아갔던 그. 이 나라의 가난을 뿌리 뽑기 위해 양 한 마리를 키웠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문일고등학교와 안양대학교를 세워 사람을 올곧고 바르게 세우려 애썼던 그.


그가 품었던 바람은 지금 이 땅에 민들레 홀씨가 되어 온 천지에 참된 생명력을 흩날리고 있다. 그에게 홀씨의 사명을 잇게 해 준, 평생에 잊지 못할 두 분이 있다고 하니 어린 시절 선원보통학교의 김재덕 선생과 배제학교의 아펜젤러 2세 교장선생이다. 그만큼 그 분들에게 많은 은덕을 받지 않았나 싶다.


모름지기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 법이다. 솜털 같은 갓 털에 둘러싸인 조그만 민들레 홀씨가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 여린 새싹의 숨결을 내 밀듯이, 그것이 자라 또 다른 생명을 흩어 뿌리듯이, 우리의 삶도 김영실 총장처럼 누군가에게 빚진 삶을 돌려 주는 참된 홀씨처럼 살았으면 좋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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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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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여행은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옮기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많은 곳을 여행했다 할지라도 자기 우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만큼 여행은 장소보다도 자기 생각의 지평을 여는 것이 훨씬 소중한 일이다.

신영복 교수의 서화에세이 〈처음처럼〉에서는 여행과 관련하여 또다른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여행에서 가장 먼 길은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란 것이다. 그만큼 머리에서 깨달은 것을 가슴으로 잇는 게  쉽지 않고, 설령 가슴이 뜨거워졌을지라도 발끝에까지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그 까닭에 줄곧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면 희망의 연대이다. 이른바 우뚝 솟아 오른 한 그루의 나무보다는 오히려 그 나무를 지탱하는 흙가슴처럼,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라나 우거진 아름다운 숲들을 내다보게 하고 있다.

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태양은 언제나 산에서 뜨고 산에서 진다. 바다에서 일평생 생활한 사람도 태양은 언제나 바다에서 뜨고 바다에서 진다. 넓은 평원에서 한 세월을 보낸 사람도 태양은 언제나 평원에서 뜨고 평원에서 진다. 가끔씩 이권 때문에 포용하지 못한 채 핏대를 세우며 다투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그런 주장이지 않나 싶다.

그러나 물은 다르다. 물은 산에서든지 바다에서든지 평원에서든지 매 한 가지다. 높은 데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이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막힌 돌담을 부딪히지 않고 에돌아 간다. 분지가 있으면 가득 채운 후 부드럽게 지나간다. 그만큼 물은 생명의 삶이요, 관용의 삶이다. 그렇기에 썩지 않는 참 물이라면 그만큼 생명력은 긴 법이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주역 사상의 핵심입니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리게 되며, 열려 있으면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171쪽)

이른바 물처럼 참됨을 갈구하면 모름지기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고, 변하는 곳에는 열림이 있고, 열려 있으면 무엇보다 생명력이 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 땅에서 폼 내고 주름잡은 것들이 몇 년 못되어 사라진 예들은 참 많다. 모든 찬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다가도 하루아침에 쇠한 것들이 너무 많다. 이념도 체제도, 그에 따른 운동도 다 그러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지구의 종말 앞에서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꿋꿋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만큼 참됨의 씨앗을 뿌리면 된다. 그것을 신영복 교수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이야기했다.

"무성한 잎사귀 죄다 떨구고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나목으로 서 있는 감나무는 비극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 가지 끝에서 빛나는 빨간 감 한 개는 '희망'입니다. 그 속의 씨가 이듬해 봄에 새싹이 되어 땅을 밟고 일어서기 때문입니다."(229쪽)

그렇듯 참됨의 씨앗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짓밟을지라도 그 생명의 숨결은  끝내 솟아오르는 법이다. 세월의 여파 속에서 그리고 희망찬 열매도 내 놓는 법이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이룰 일은 아니다. 긴긴 세월 속에서 자기 이파리들을 떨어뜨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되풀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아흔이 넘은 노인이 산 속의 돌을 캐내고 흙을 파서 삼태기로 발해까지 그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처럼….

사실 이 땅에서 참된 숲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너도나도 빼어난 한 그루 나무처럼 우뚝 서길 바라는 까닭이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 더군다나 혈연과 학연과 지연, 그리고 제도와 관습 등이 숲 속의 덫과 톱이 되어 그 정신과 삶을 마구 헤치고 있지 않던가?

그럴지라도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참 물처럼, 그리고 참 씨앗처럼 궁극이 되는 참됨을 지향하고 변하고 열리고 포용하고 관용하면 그 생명력 자체가 길고 긴 희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뜻깊은 냉철한 생각을 머리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발끝까지 이어가는 참된 흙가슴으로서 연이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 때에만 이 세상을 희망의 숲으로 일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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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지음, 이두부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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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선진국대열에 온통 힘을 쏟고 있다. 세계 자본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고,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가 됐든 그 누가 됐던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이 주도하는 FTA 협상에 순순히 나서는 것도 그 흐름이다.


그러나 선진화대열에 발 벗고 나서는 동안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과연 나아졌는가? 돈줄이 있고, 배운 사람들이야 아는 곳에 발 빠르게 들어가고 투자하면 된다. 그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기에 그만큼 뒤처지고 있다. 농어촌에서 사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그저 세월과 함께 쇠꼴만 빠질 뿐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선진국을 이루는 길인가? 그저 잘 먹고 잘 쓰고 잘 사는 것만이 선진국인가? 겉으로는 자유로워도 속이 부정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마저도 선진국인가? 가난하더라도 모두가 잘 사는 길은 없을까? 못 먹고 못 입어도 서로를 위하며 서로가 믿어주는 그런 사회는 바랄 수 없는 것인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가난한 휴머니즘〉(2007·이후)은 비록 가난하지만 참된 인간애를 찾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는 프랑스와 맞선 전쟁에서 독립을 이뤄냈다. 하지만 악덕 뒤발리에 부자의 30년 세습으로 그곳의 사람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에 대해 반기를 들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가 아리스티드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신부로서, 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참된 자유와 인권을 위한 애써왔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내란에 휘말려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나라 바깥에서 지금도 아이티 공화국이 살 길이 무엇인지, 가난하지만 참된 신뢰가 존속하고, 그만큼 인간애가 회복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 책에는 총 아홉 통의 편지가 담겨 있다. 물론 아이티 공화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쓴 글이지만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에 휘둘린 채 굽신거리며 사는 나라들, 비록 가난하지만 참된 인간애를 회복하려는 세계 모든 나라와 사람들을 위한 편지기도 하다.


“민중들에게 전략을 구하는 시민사회 사이에서 아이티의 조직들을 본다는 것은 한밤중에 촛불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절망의 암흑에서 만난 희망! 우린 대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대안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를 굶주림에서 꺼내어 ‘존엄한 가난’으로는 이끌 것이라 봅니다.”(93쪽)


사실 아이티가 가난하게 된 것은 오래 세월 식민통치를 해 왔던 프랑스가 주범이요, 현재는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미국주도의 외세자본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프랑스는 그곳의 열대우림을 마구잡이로 벌채하여 유럽에 값비싸게 팔아 넘겼고, 그로 인해 농민들의 소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정책도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자본과 식량을 원조해 주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모든 힘줄을 끊어 놓았다. 시골 가구의 80%이상이 돼지를 기르며 학자금을 썼는데 그 숨통마저 끊어버렸고, 농업분야의 대출금도 전체의 2%만 쓸 수 있게 했다. 그들이 압력을 가한 식량수입정책으로 아이티의 농업생산성마저도 극심하게 떨어졌고, 학교라는 곳도 오직 돈줄이 있는 자식들이라야 들어가게 해 놓았다.


그런데도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에서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을 읊조리고 있다. 무엇이 그가 바라보는 희망이란 말인가? 무엇이 그 아이티 공화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경제적 자본이 아닌 신뢰적 자본에서 찾고 있다. 인간의 머리끝에 돈줄을 매달고 살면 절망하게 되고 자살이 넘쳐나겠지만, 비록 가난하더라도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제 3의 길을 만들어간다면 오히려 참된 인간애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신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도 무턱대고 선진화대열에 끼려고 안달할 게 아니라, 더디 가더라도 국내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 주도하는 종속경제에 질질 끌려 다니기보다는 조금은 힘들더라도 진정으로 서로가 신뢰하는 세상, 살맛나는 살가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와는 다른 제 3의 길을 터나가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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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 임의진 참수필집
임의진 지음, 이동진 그림 / 이레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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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강진의 흙집에서 들려오는 '참 종소리'


"대봉 형님 으름장에 김이 폴폴 나는 돼지머리 누른 고기를 일동 확보해 놓고서야 만 원짜리 지폐를, 칼만 안 들었다 뿐인 노상 강도에게 아까워하며 바쳤다. 기복신앙이 어쩌고 하면서 욕을 퍼붓고 다니는 나인데 교회도 다니지 않는 인호네가 하도 떼를 쓰며 졸라대는 통에 그 날 무사고 기원제의 개회 기도까지 해 주었지 않았던가."

이 글은 남녘 마을 강진에 사는 임의진 목사의 두 번째 참 수필집인 《종소리》(이레·2001)에 실려 있는 '고구마에 동치미'라는 꼭지 중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임의진은 시인이요, 동화작가요, 민중운동가요, 화가에다, 최근엔 〈산〉이라는 일철스님 헌정음반까지 낸 목사다.

그토록 팔방미인 재주를 지닌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달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도닦는 도사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목사라고 해서 교회 안에만 갇혀 지내지도 않고 종교인으로서 금기시할 수 있는 세상사에 대해서도 마음껏 끼어 들고 휘젓고 다니며 옳은 소리만을 곧잘 해 댄다. 그래서 싫지 않는 살 가운 목사이다.

지금 그는 조그마한 종이 세워져 있는 남녘교회에서 고향 동네 사람들과 벗삼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살아가고 있고 강진 들녘에 작은 텃밭을 일구며 세상사 느릿느릿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엔 교회 앞에 세워져 있는 종의 추가 삭아 부러지는 바람에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던가 보다. 그래서 곧장 철공소 진택씨가 종 추를 구하여 가지고 와서, 종탑에 올라가 새로 갈아 끼우게 돼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예전 서울 살이 할 때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들었던 그 종소리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서울 살 때, 고궁의 낙엽이 밟히던 광화문 언저리의 성공회 성당 나무의자에 앉아서 들었던 종소리, 약자들의 농성장을 찾았다가 명동의 성모상 앞에서 비둘기랑 들었던 종소리, 한참 방랑벽에 휘둘려 전국 명산고찰의 숲진 뜨락을 산보하고 다니던 시절 들었던 절 집의 중후한 종소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종소리들이다."(p.37, '종지기' 중에서)

농촌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만들었다던 어느 해의 달력에는 그런 달 이름들도 적어 넣고 있다. 생각할수록 참으로 재미나고 신나는 달 이름들이 아닌가 싶다.

"1월은 새벽별달(엄마는 새벽밥을 차립니다. 아빠는 새벽별을 보고 일하러 나가십니다)
2월은 고드름달(동네 친구들이랑 처마 밑에 까치발을 하고 서서 고드름을 땄습니다)
3월은 꽃뜨락달(꽃이 피었습니다. 겨울에 태어난 강아지들이 꽃밭에 나와 재롱을 피웁니다)
4월은 안개숲달(안개가 자욱한 숲에서 큰오빠하고 새언니가 뽀뽀를 했습니다 나는 봤지롱)
5월은 나들이달(이모가 낼모레 동물원 구경을 시켜준다고 그랬습니다. 야호 야호.)
...
12월은 함박눈달(아침 내내 형이랑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
(p.104, '달이름' 중에서)

그 뿐만이 아니다. 그가 인도하는 예배도 특별한 듯 싶다. 우리 가락 우리 것을 존중하고 높이 세우려는 그런 참다운 의식이 뚜렷해 보였다.

"작년 칠석에는 우리 교회 입당송인 〈직녀에게〉작곡가 박문옥 님을 노래 손님으로, 지금은 북으로 올라가 살고 계시는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특별 손님으로, 관옥 이현주 목사님을 말씀 손님으로 모셨다. 올해 칠석에는 〈이등병의 편지〉 작곡가 김현성 님을 노래 손님으로, 무주에서 농사를 배우며 글을 쓰고 있는 한상봉 이시도르님을 말씀 손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소리로, 멋들어진 춤으로 남도의 벗들은 우리 국악의 멋을 한껏 뽐낼 것이다. 동네 분들도 교회에서 내는 동동주 맛을 보려고 찾아오실 것이다."(p.146, '상사화' 중에서)

아호가 '어깨춤'인 임의진 목사. 그는 자신이 기거하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또 글을 쓰고 있는 집 이름을 '선무당(仙舞堂)'이라고 이름한다. 그런 이름을 붙인 까닭은 아마도 그의 아호에 걸맞게 신선처럼 어깨춤을 추며 살고 싶은 생각에, '착한 무당'(善巫堂)(?)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이름 짓지 않았나 싶다.

"내 흙방 이름을 선무당이라 했던가. 가끔 욕도 할 줄 아는 땡목사요 돌팔이 목사인 나는 사람 잡는 선무당이 아니겠는가. 선무당에 걸맞게 사는 집 당호조차 선무당이니 기가 막힌 이름 궁합이렷다."(p.210, '선무당' 중에서)

남녘 땅 강진의 선무당이란 흙집에 사는 임의진 목사.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해 지길 바라면서 그런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고 있다.

"종교를 뛰어넘어 그 상냥한 밀어에
가슴마다 허물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확성기로 고막 터지게 틀어놓은 찬송가 차임벨도 아니고
예배시간을 알리는 교인들만의 종소리도 아니고
일손 놓고 그만 집에 돌아가 밥지어 드시라고 알리는
자상한 종소리,
공사판으로 바쁜 걸음인 일당벌이 인생들을 담고 두 손을 모은
새벽 종소리,
노느라 정신 없던 막내의 흙 묻은 손바닥을 털게 하는
엄마 목소리인 종소리,
논두렁을 걸어오던 주름살 깊은 농부는 좋은 세상을 기도하고
공장을 나온 누나는 고향집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겁고
사랑하는 사이들은 잡고 있던 손을 더욱 세게 쥐겠지
그대 귀에 시방 이 종소리가 들려오는가."(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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