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반장 별명은 '너구리'다. 이름보다 이 별명이 더 익숙할 정도로 불려지고 있는 별명. 으흐흐. 중국보고서 때문에 모였다가, 나중에 우리 둘만 남아서 어찌어찌 이야기가 이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구리가 본 '나'.


구리:
내가 보기에 넌...
항상 미소짓고 웃으면서도
날카롭고... 진지하면서
음...
냉소적인 면이 있어.

나:
아아
너구리, 잘 봤네ㅎㅎ

구리:
ㅋ 그러냐?
뭐, 애들 척하면 척이지..

나:
어떤 면에서?

구리:
평소에는 아니다가도... 좀 민감한 일이 있거나 하면..
아니면, 중요하다거나, 혹은.. 니 생각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일에 대해서랄까..


남이 나에 대해서 말해주는 걸 듣는 건, 정말 재밌다.^^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나 완벽한 친구'라고 하고, 누군가는 '냉소? 그건 너한텐 좀 아닌데.'라고 하고, 누군가는 '진지한 면이 좋다'고도 하고. 사람들마다 나를 보는 눈이 그렇게 다르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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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올 초까지만 해도 <삼대>가 단편소설인 줄 알았다. (이 정도 길이는 가뜬하지! 라는 뜻이 절대 아니고, 단순히 잘못 알았단 말이다.) 장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전에 오해하던 버릇 때문에 그리 길지는 않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오해 때문에 책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난감했는지. 2~300쪽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건 700쪽이 넘는 게 아닌가! 완벽하게 착각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책을 잡기가 싫었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미루고 미루다 읽긴 읽은 모양이다.

  <삼대>는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다른 소설들―내가 읽어본 것 중에서만 이지만― 과 달리, 사회와 개인의 갈등보다는 개인간의 갈등에 치중하고 있다. 일제 시대를 그리는 작품들은 으레 독립을 위해 투쟁하거나, 일제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는데, <삼대>를 읽을 때는 '이 소설 배경이, 일제 시대가 맞지? 병화와 여러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일제인 것 맞지?'라고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정도로 시대 상황이 실감이 안 났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일제 시대라고 크게 달라야 할 것인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분명 많은 변화를 불러 왔을 것이나, 여전히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결국 비슷한 모습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니까. 싸우고, 크게 상처입는 것만이 역사의 흔적은 아니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일본말―병화는 '제이타쿠'라고 써놓고, 무어라고 번역했으면 좋겠나, 고 하기도 했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일본 반찬 가게와 그곳을 드나드는 단골 손님, 일본 술집. 서민들의 생활에 녹아든 일본의 모습 또한, 우리의 아픈 역사의 파편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삼대>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심리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아, 진짜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법하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하는 맛이 있다. 작품 속의 모든 인물들이 현실적인 생각을 하며, 그림자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수긍하게 되고 마는 '심리'의 대부분이 인간의 어둡고 이기적인 면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눈에 들어오는 수원댁이나 매당집 같은 인물들은 순수한 악의만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악녀'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통속성이 짙은 만화나 연애소설에서 흔히 볼 수 볼 수 있는 인물형에 사뭇 놀랐다. 같은 부류라도 만화책에 나오면 '판에 박힌' 인간으로 보이고 <삼대>에 나오면 '간결하고 상징적인' 인간으로 보이는 나에게도 놀랐고 말이다. 소설에서는 악당에게도 행동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하게도 이 악녀들은 행동의 이유라고 해봤자 자기 잇속 정도일까? 싶을 만큼 평면적이다. 문학작품은 작은 사회이니 만큼, 세상에는 이 정도로 '나쁘게 평면적인' 인물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못돼먹은 사람들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살고 있겠으나, 역시 속이 시커먼 사람을 보는 게 즐겁지는 않다. 아니, 그보다도, 어떤 '의미'가 있다 해도 이런 삶은 너무 불쌍하다. 이따위로 사는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제명에 못 죽을 테다.

  작품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 '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죽을까 보아 생겁을 벌벌 내는 사람에게 자식들이 어서 죽기를 조인다고 해놓았으니 겁도 내는 것이 무리치 않다면 무리치지도 않을 것이나 게다가 몸을 꼼짝 못하는 생병이다. 워낙 잠이 없는 늙은이가 긴긴 밤을 새노라니 느는 것은 그런 까닭 없고 주책없는 공상뿐이다. 게다가 자식부터 노리고 있는 재산이 있다 생각하면 믿을 사람이라고는 그래도 한자리에서 자는 귀여운 수원집뿐이요, 그 외 놈년들은 남이요 한 푼이라도 뜯어먹지 못해서 눈이 벌게 돌아다니는 놈들뿐이다…… (205쪽)
  최근, 지난 유월 70대 할머니가 한강에서 투신 자살한 사실이 뒤늦게 기사화 되었다. 돈이 없음에 대한 비관 자살이었을까? 천만에. 할머니는 60억 원대의 재산가였다.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소, 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돈이 있다고 꼭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적막한 아파트에서 가정부와 사는 것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사람이 할 일이 없으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딱히 할 일도 많이 없으셨을 터, 현실과 연결되는 '주책없는 공상' 속에는 언제나 별거한 남편과 엄마의 돈에 눈이 뒤집혀서 싸움질을 해대는 자식들이 떠돌지 않았을까. 조의관은 자살한 것은 아니나 그보다 더 비참한 비소 중독으로 숨을 거두었다. 돈이란!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생각들을 주절주절 적어 보았는데, 정리가 안 된다. 그렇지, <삼대>도 꼭 나와 같은 꼴이었다. 작가는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읽는 사람으로서는 좀 더 알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갑자기 뚝 끝나버린 것이다. 갑자기 끝내버리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죽음'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걸까? 훌륭한 작품이라 하여 계속 해석하려 드는 것도 좋아뵈지는 않는다만, 영 궁금한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노트

여자는 밥만 짓고 아이만 기르라는 거냐고 흔히 말하데마는 세상에는 밥 짓고 아이 기를 손이 필요한 것을 어떻게 하나. 남자에게 유방이 생기기 전에는 여자의 가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관념상 문제가 아닌가. 여자로 하여금 가정일 지키게 할 원칙을 버릴 이유가 어디 있나! (298쪽)

  이렇게 말하면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설교가 나올 걸세마는 빵이 너무 많으면 체중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보게. 귀한 집 자식이 꽤 까다롭고 트집이 많고 물리기를 잘 하는 법이지만 나중에는 생명까지 물리고 시들해진 것일세. 제이타쿠 제이타쿠 하니 이런 제이타쿠가 어디 있겠나. 만일 사람에게는 빵만이 아니라면 봉건적 유폐의 마지막 희생이라고나 볼 것일세. 오는 시대의 여성은 결코 결혼을 잘못했다거나 실연을 했다고 자살하지 않네. 제 갈 길을 뚫어나갈 것일세. 거듭 말하거니와 사람은 빵만이 아니라 하지만 빵이 없을 때 사람은 대담하여지네. 용감하여지네. 지금의 중산계급더러 몰락하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나 자연지세로 몰락하는 날 그들은 생활난으로 자살할지는 몰라도 그런 제이타쿠한 조건이나 생각으로 자살하지도 않을 것이요, 또 그때에는 봉건적 유물도 불살라버리게 될 것일세. (400쪽)

  이 여자의 몸의 어디서 고무 냄새가 날까! 어디서 직공 티가 보일까! 직업이란 그 사람의 육체만 외곬으로 기형적으로 발육시킬 뿐 아니라 정신상 심리상으로도 변작시키는 것이건마는 이 여자를 누가 보기로 어제까지 고무공장에 다니던 사람이라 할까. 자기의 직업에 동화하지 않는다는 것―자기의 주위와 환경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것―다시 말하면 직공이 직공답게 되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당자에게 도리어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소시민성으로 직공 생활이라는 것을 천하게 생각하거나 자기의 가문이나 교육이 다른 허섭스레기 직공과는 다르다고 동배를 천히 여기는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못할 것이다. 저 타고난 본바닥, 제 천성이 깨끗하고 기품이 높은 것이야 어찌하는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필순이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다. (5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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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룸 2005-08-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칠백...칠백이로군요...허허허허허허...=ㅂ= (쪽수에 놀라서 그냥 맛이 가버림)

BRINY 2005-09-1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학교 1학년들도 과제도서로 이거 읽고 있어요. 야자시간에도 이 두~꺼운 책을 펴들고 인상을 찌푸린 애들이 많아요. 환타지 소설이랑 만화만 보던 애들에게는 정말 고역일 듯^^

明卵 2005-09-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힘들겠어요! 전 그나마 방학 때 읽었지만..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봤는데도 감동.

  사만다가, 이안의 '꿈'속에서 죽는 것은,

  이안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생각해보자니, 너무 잔인해서 관뒀다.

 

 

 

 

[택시기사와 이안의 첫 대면]
D
What if she never come back?
그 여자분을 다시 못 보면 어쩔 거요?

I
What sort of a question is that?
무슨 그런 걸 물어봐요?

D
Come on. Picture it.
아니, 상상해봐요.
You waved good-bye at the airport,
she gets on the airplane,
you never see her agian?
공항에서 배웅해준 다음
다시는 못 보게 된다면?
Could you live with that?
살아갈 수 있겠소?

I
No.  
No, I couldn't.
아뇨.
못 살 겁니다.

D
Well you know what to do.
Appericiate her, and what you have.
Just love her.
그럼 길은 하나지.
그 사람이 있는 것에 감사하고
계산없이 사랑하는 것.

------------------------------------------------------
[사만다와 이안의 마지막 대화]

I
I love you.
사랑해.

S
I love you too.
(건성으로)나도 사랑해.

I
I wanna tell you why I love you.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S
It's.. It's raining. you know that, right?
비 쏟아지잖아!

I
I have to tell you this and you need to hear it.
이 말은 꼭 해야겠어, 좀 들어줘.
I loved you since I met you,
but I wouldn't allow myself 
to truly feel it until today.
첫눈에 반했지만
전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어.
I was always thinking ahead, 
making decisions (???).
항상 미리 계산하고, 
겁쟁이처럼 빼기만 했지.
Today, because of you, 
what I learned from you...
하지만 오늘은 네 덕분에,
니가 가르쳐준 덕분에...
Every choice I made was different 
and my life has completely changed.
평소와 달리 두려움을 떨쳐버렸고
내 하루가 완전히 달라졌어.
And I've learned that if you do that, 
then you're living your life fully.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게
진정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어.
Doesn't matter if you have 5 minutes or 50 years.
5분이든 50분이든,
시간따윈 상관없단 걸.
Samantha, if not for today, not for you, 
I would never have known love at all.
사만다, 오늘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영영 사랑을 몰랐을 거야.
So thank you for being a person 
who taught me to love, and to be loved.
사랑받고, 사랑받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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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광고들이 쏟아지는 시대에, 5년이나 전에 쓴 "광고"와 "대중 문화"가 얼마나 가치 있을까? 라고 비웃음 섞인 물음을 던지며 읽기 시작한 책이다. 크게 소비와 광고의 관계, 사회와 광고의 관계, 광고의 다양한 장르, 광고 비평의 모습 등을 살펴보고 광고의 미래를 말하면서 끝을 맺는 형식인데, 우악스럽게 생긴 겉보기―차례와 표지―와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세상을 다 가져라'와 같은 '추억의' 광고들의 예가 많이 나와 있어 옛날 생각도 나게 하고, 글도 상당히 사람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암울한 표지 디자인은 용서가 안 된다.)

  광고는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무리 화장품 광고가 좋았다 해도 쓰던 화장품을 다 쓰거나 해서 필요해지지 않은 이상, 광고에 혹해서 충동구매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파격할인 광고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 필요에 의해 상품을 살 때는 매장에 가서 판매원의 설명을 듣거나, 인터넷에 올라온 사용 후기를 참고한다. 상품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사게 하는 기능까지 있다는 것은 그렇게 와 닿지 않는다. 하긴, 이런 식으로 광고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내가 광고의 영향력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받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하면 섬뜩해지지만.

  읽고 나서, 기억에 남는 것.

  보고 싶은 프로가 있어서 TV를 켰을 때, 화면 오른쪽 위에 프로그램 안내가 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곧 내가 원하는 프로가 시작할 거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고주나 광고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표시가 아주 눈엣가시인 모양이다. 그런 광고를 슬립 광고라고 한다는데, 글쓴이는 이 노이즈 현상에 거의 '분개'한다. 셋방을 내주고는 주인집 짐을 들여놓는 심보라고 말이다. 광고주협회에서 방송 3사에 슬립 광고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2000년 기사가 있는 걸 보니, 당시에는 슬립 광고로 인한 손해에 대해 아무런 보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타협점을 찾았을까? 프로그램 안내가 들어가는 것을 미리 알리고, 원작 그대로 나가는 것보다 광고료를 낮추면 되지 않을까?

  ㅂ자형 신문 광고도 있었다. 두 면에 걸쳐 凹모양으로 광고가 들어가고, 남는 공간에 기사가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굉장히 기발한 광고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신문 읽기의 혁명'에서 광고주의 부정적인 힘에 대해 읽은 후라 그렇게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광고로서는 '아이디어 사냥의 산물'이겠지만, 신문의 세계에서 이런 광고는 '기사를 압박하는 돈의 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과도한 팝업창이 짜증을 부르는 것처럼, 신문에서 기사를 가릴 정도의 광고는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아닐까?

  광고는 변한다. 세상을 타고, 시간을 타고. IMF 경제 위기 때의 광고들이 보여주듯, 유동근이 트라이 광고에서 상반신을 보여준 것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보여주듯. 옛날 광고들이 가득한 책을 보고 나니 지금의 유행이 곧 '구식'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한달 뒤, 1년 뒤, 5년 뒤의 TV에는 어떤 광고가 나올까?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광고 유행어가 나올까? 눈이 가는 곳마다, 발이 닿는 곳마다, 그리고 시간이 가는 곳마다 광고는 숨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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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신문을 읽지 않는다."
  
  자랑이 아니라, 내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이다. 학교에 있으면 매일 아침, 각 반에 여러 종의 신문-조선일보부터 한겨레, 코리아 헤럴드까지-이 배달되는데, 나는 머리를 말리면서 교탁에 올려져 있는 신문의 표제들만 적당히 훑고 기사는 거의 읽지 않는다. 런던 테러쯤 되는 큰 사건이어야 눈이 작은 글자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위험한 독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보니, 고등학교 올라온 후로 줄곧 정신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킨 나의 게으름의 탓이었다.

  중학교 때, 같은 사건이 신문마다 어떻게 다르게 보도되었는지 비교하는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신문에 대해 지금보다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의 세부적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중앙은 삼성 거잖아."라고 흘리듯 하신 말씀에 "왜요?"라고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편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그 때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한가지임이 분명한데도, 기사들은 제각각, 너무도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 '혁명적'이었던 수업이 떠올랐다.

  나는 비판 정신만 있고 올바른 정보나 뚜렷한 가치관이 없는 사람이다. 흔히들 '가능성'에 비유하는 흰 도화지와 비슷한 상태인 셈이다. 말이 좋아 가능성이지, 이런 게 '진짜 바보'라는 걸 잘 안다. 나는 바보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부터 신문을 읽으려 한다. 나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역시, 게으름을 걷어내고 신문 읽기의 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가가서는 걸레질만 하고 다시 앉아버린 과거의 많은 경험들을 통해, 이 창은 누군가가 열어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책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 번 창에 걸어가본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의지를 가지고.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나를 혁명으로 이끌지 모르는 정신을 닦기 위해서 다가가보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걸렸던 게 있다. 많은 자료를 통해 신문이 얼마나 '썩었는지' 신나게 보여주는데, 그 예시들이 특정 신문사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약력을 보니 한겨레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데, 한겨레의 경우는 어떻게 그 사건을 다루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이 몸담고 있기에 '불편부당'을 위해 한겨레의 예를 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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