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문을 읽지 않는다."
  
  자랑이 아니라, 내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이다. 학교에 있으면 매일 아침, 각 반에 여러 종의 신문-조선일보부터 한겨레, 코리아 헤럴드까지-이 배달되는데, 나는 머리를 말리면서 교탁에 올려져 있는 신문의 표제들만 적당히 훑고 기사는 거의 읽지 않는다. 런던 테러쯤 되는 큰 사건이어야 눈이 작은 글자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위험한 독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보니, 고등학교 올라온 후로 줄곧 정신이 마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킨 나의 게으름의 탓이었다.

  중학교 때, 같은 사건이 신문마다 어떻게 다르게 보도되었는지 비교하는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신문에 대해 지금보다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의 세부적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중앙은 삼성 거잖아."라고 흘리듯 하신 말씀에 "왜요?"라고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편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그 때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한가지임이 분명한데도, 기사들은 제각각, 너무도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 '혁명적'이었던 수업이 떠올랐다.

  나는 비판 정신만 있고 올바른 정보나 뚜렷한 가치관이 없는 사람이다. 흔히들 '가능성'에 비유하는 흰 도화지와 비슷한 상태인 셈이다. 말이 좋아 가능성이지, 이런 게 '진짜 바보'라는 걸 잘 안다. 나는 바보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부터 신문을 읽으려 한다. 나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역시, 게으름을 걷어내고 신문 읽기의 창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가가서는 걸레질만 하고 다시 앉아버린 과거의 많은 경험들을 통해, 이 창은 누군가가 열어주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책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 번 창에 걸어가본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의지를 가지고.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나를 혁명으로 이끌지 모르는 정신을 닦기 위해서 다가가보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걸렸던 게 있다. 많은 자료를 통해 신문이 얼마나 '썩었는지' 신나게 보여주는데, 그 예시들이 특정 신문사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약력을 보니 한겨레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데, 한겨레의 경우는 어떻게 그 사건을 다루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이 몸담고 있기에 '불편부당'을 위해 한겨레의 예를 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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