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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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참을 - 며칠간을 - 고민했습니다. 어떠한 언어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라는 습관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요. 그리하여 간신히, 매우 사적인 언어들이나, 나름대로 공적인 단어들, 혹은 억지로 학술적인 어휘들로 이루어진 몇 문장을 만들어 보았지만, 영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몇 페이지(!) 분량의 파편적인 문장들 뿐, 생각들은 잘 엮이지 않았고, 설혹 엮였다 하더라도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면 위악적으로 보이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정상이되, 단지 저의 비평적 지식과 체계적인 사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분명, 김모교수의 멋들어진 비평 하나가, 떡하니, 소화 안 되는 설날 떡처럼 담겨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거나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쓸쓸했고, 슬펐으며,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나 자신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세상이라 생각했고, 그 감정이 소중하며, 그것을 느끼게 해준 이 작품이 무척이나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나'이며, 내가 '장모씨'이며, 장모씨가 '그'이기 때문이었고, 또한 세상은 여전히 '즐거운 그의 방'처럼 어둡고, 외롭고, 모두를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문득, 혼란스러운 작품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혼란스러운 인간이 보았으니, 무엇인가 정리된 감상이 생산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그'와 짧은 동거를 하였지만, 저는 그들과 앞으로 오랜 동거를 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만약, 제가 이 작품의 존재를 며칠 뒤에 잊어버리더라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모두를, 그냥 안전하고 완전하게, 타자를 망각한 채로, 살아가도록 놔두지를 않으니까 말입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심층의 이야기부터, 매우 거친 사회의 표면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가능성의 흔적들까지, 세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그리고 그 그림들의 여백에 작가의 진심이 담겨져 있는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쉽지 않은 일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라고, 그러하다고, 적어도 좁은 제 방 안의 어떠한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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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1-0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보셨군요. 저의 올해 첫 주문은 역시 이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올 한해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올해에도 변함없이 좋은 글 보여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

happyant 2006-01-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에- 꼭 보세요. 바람구두님의 추천페이퍼는 정말 감사한 것이었습니다.ㅋ

블루님도 올 한해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좋은 리뷰와 페이퍼, 항상 그렇듯 기대하겠습니다.~

happyant 2006-01-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앗앗. 매번 바람구두님의 리뷰나 페이퍼를 보며 여러가지를 배우는 처지인데;; 그리 말씀하시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구두님의 이 책 리뷰 또한 잘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추천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3-1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happyant님의 하나의 리뷰를 읽고 글이 좋아 여러작품 리뷰를 읽다가 글 남깁니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다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286 컴퓨터는 어느새 펜티엄이 되었고, 386 혁명가들은 어이없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무엇인가 변하기는 변한 것도 같다. 세상이 변했으니 사람들도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으니 그 사람들이 창조해내는 작품들도 변한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민주사회다. 책들의 표지는 반짝반짝, 연예인들을 비추는 조명만큼이나 빛나고, 이 찬란한 시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취향이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얼마나 변하였는가. 선명한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에 투명한 파시즘이 자리 잡았다는 얘기는, 얼마간 타당하지만 대체로 복에 겨운 헛소리다. 방패에 찍혀 죽어나가는 농민들과, 기계에 찍혀 죽어나가는 이주노동자들을 담은 사진이 선명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변한 것은 사람이지, 세상이 아니다. 때문에, 대체로 ‘변한’ 오늘날의 문학이 그것의 기반으로서의 세상을 얼마나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얼마간 비판적인 대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그늘을 바라보는 작가는 오늘 날에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소년은...'는 그러한 작가가 풀어놓는 여전한 세상을 여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극도의 가난을 겪고 열 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어린 화자와, 성매매를 통해 생을 유지하는 그의 누이, 그리고 그녀를 착취하거나 사랑하는(그럼으로써 착취하는) 몇몇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무척이나 무거운 어조로 그려낸다.


소설이 우선적으로 ‘재미’를 주는 것은, 화자가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이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어린이날에 어울리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나이의 화자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어른들과 우정을 쌓을 정도로 노숙하다. 근대로 접어들며 구성된,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아이'라는 개념은 실질적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시대에 해체되고, 그것이 해체된 잔해를 걷으면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한걸음의 상승과 영속적인 추락의 문체로 진행된다. 예컨대, 새로운 삶을 꾸려보려 이것저것 가재도구를 장만했다, 태풍이 불어왔다, 삶이 잠겨버렸다. 이런 식이다. 작품 속에서 절망은 공기와도 같고, 고독은 끼니보다 자주 찾아온다. 무거운 문장은 더 무거운 현실과 부딪쳐 끊임없이 부서지고, 이것은 소설의 끝까지 지속된다. 난장이가 공을 쏘아 올린 지 무려 30년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고독한 작가가 뱉어내는 문장 또한 여전히 쓰다.  


책을 덮고서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은 누이의 전형성이다. 저열하게 말하자면, '무능력한 가족들을 몸 팔아서 부양하는' 누이의 캐릭터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반복되지 않았던가. 물론 여전히 여성을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내모는 사회체제는 존재한다.(아니,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남성 작가로서 그러한 부분들을 좀더 올바르게 그리려면, 좀 더 겸손하던가, 혹은 좀 더 창의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의 대부분이 '나'의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필연적으로 외부의 인물들이 얼마간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불가피했겠지만, 작품 속에서 성매매라는 것이 단순한 소재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만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과연, 소년은 눈물을 그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은 무리한 기대인 것 같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문득 진정 뜬금없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삽입곡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물 흘리는 소년이 신화가 되기에, 세상에는 그보다 멋진 이미지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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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2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라도 가능할까요? 책을 볼 때, 혹은 님의 리뷰같은 이런 글을 볼 때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하여, 다시 무겁습니다.

happyant 2005-12-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을 덮고 우울한 마음에 깊이 생각 못하고 글을 싸질러놓았는데, 블루님의 물음을 받으니 너무 쉽게 쓴 것 같아 제 마음도 더 무겁고 부끄러워 집니다. 어쨌거나, 할 수 있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것의 크기 역시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요.
 
정경화 - 화답
지니(genie)뮤직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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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마녀가 좋다.(여기에서 ‘마녀’라는 단어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이건 그냥, 가벼운 리뷰다.) 진지한 마녀도 좋고, 활달한 마녀도 좋고, 섹시한 마녀도 좋다. 오래전부터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진지한 마녀와 함께 숲에서 반자본주의 의식화를 위한 세미나를 한다든가(물론 마녀가 나를 지도하는), 활달한 마녀와 들판 위에서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든가(물론 나는 코러스다), 섹시한 마녀와 음란하게 정을 통하다 함께 화형 당하는 등등의 상상. 물론 상상속의 마녀는 대체로 이미지 일 뿐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아무튼 그런 식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아주 가끔씩 정장을 입은 나를 보고 친구들이 '너 60년대의 나약한 지식인 같다.' 라고 놀릴 때면, 60년대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라고 투덜대면서도, 나약한 지식인과 터프한 마녀. 뭔가 어울리지 않나? 라고 내심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녀들도 보는 눈이 있을 터인 즉, 나는 아직 마녀를 실제로 만나지 못했고, 사랑해 보지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15세기의 종교재판관처럼 숨어있는 마녀를 한눈에 알아보는 성스러운 시력도 없고, 21세기의 잘 팔리는 '세련된 마녀'들이 그/녀들의 은밀한 의식으로 나를 유혹하도록 만들 만한 매력과 재력 따위도 없으니, 마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겨우, '내'가 생각하는 마녀는 '그런'게 아냐. 라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릴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골치 아프게 '그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는 말자. 누가 마녀를 논리적으로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마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벤야민 아저씨가 정치적 해방의 냄새를 맡았을 법한 상품들에서 마녀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지금껏 두 명의 마녀를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가수다. 우선 한 명은 27살의 나이에 그토록 꿈꿔오던 결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쓰리제이 중의 한명인 ‘재니스 조플린’이다. 그러니까, 재니스 조플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두들 공감할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몹시 짜증이 나는 어느 날 밤에, 라이브 버전의 '섬머타임'과 '볼앤체인'을 듣는 것이 대체 어떠한 기분인지. 그것은 마치 쇠사슬로 결박된 채로, 한 땀 한 땀 해부당하면서 환각제로 뼈마디를 세척당하는 듯한 기분인 것이다. 기절할 듯한 몽롱함이라고나 할까.

  

재니스가 무겁고 거칠게 절규하는 마녀라면, 온 힘으로 위로하는 두 번째 마녀는, 바로 대체 나이를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경화다. 오래 전 어느 날 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나에게로의 초대'가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만들었었는지. 그때 내가 인식한 정경화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욕망하는 내 상상속의 섹시하게 진지한 마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자신의 은밀한 의식에 초대했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울림 속에서 난 그 어렸던 시절, 나 스스로도 솔직히 다가설 수 없었던,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마치 화형당한 마녀처럼,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나버렸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6년 만에, 그녀가 화답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녀도 변했고, 나도 아마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하고, 나의 갇힘과 외로움도 여전하다. 또 한번의 계절이 가는 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한번씩 불렀던 노래들을 불렀고,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사랑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그녀의 화답을 들으며, 세상을 한발자국 정도 관조하게 된 듯한 그녀의 어투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패닉'처럼 지나치게 세련된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생각하며, 앨범의 첫 번째 곡의 마지막 가사 한 줄에 그만 심하게 가슴 아려하는 것이다. 내 맘을 어루만져 주세요, 라는 그 가사 한 줄에. 그렇게, 그녀의 애원과 외침이 나를 위로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위의 다섯 단락은 순수하게 헛소린데, 그것은 왜냐하면, 이따위의 글로는 그녀의 노래가 품고 있는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나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나름대로 고생해서 써놓은 글을 폐기하기는 못내 아쉬우니, 볼품없는 내 서재의 한 귀퉁이에, 그냥 처박아 놓기로 한다. 아, 뒤늦게 생각난 것인데, 이 글은 이 음반을 추천하기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으며 별다른 이유로 불쾌하지 않으셨던 분들은, 책사는 김에, 이 음반도 사서 들어 보시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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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헛소리, 제가 무지 좋아합니다.
음반 리뷰가 이렇게 재미있으면, 요즘은 음악이랑은 담 쌓고 지내는데, CD를 당장 구입해야할 것 같단 말이지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구만.

happyant 2005-12-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옹. 96년도 2집의 '나에게로의 초대'는 분명(^^)어디선가 들어보셨을걸요. 꽤나 히트했으니깐. 그리고, 저야 뭐, 읽어주시니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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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씩, 아니 자주, 이 나라는 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기회주의가 소명인 듯한 정치인들이나, 부패가 주식인 듯한 고급관리들이나, 양심은 엿 바꿔 먹은 듯한 부유층들이나, 상아탑의 벽돌을 팔아 끼니를 구걸하는 지식인들이나, 마녀사냥에 재미 들린 키보드 워리어 들이나, 그리고 항상 현실에 굴복하는 스스로를 볼 때면 막연하게 총체적인 개념으로서의 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이 도저히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부정적인 모습만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컨대, 치안유지법이 아직 남아있다든가, 신자유주의 정당이 빨갱이로 몰린다든가, 하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지금껏 몇 종의 한국사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속 시원하게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은 없었다. 물론 여러 차례 한국전쟁의 기록들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화 투쟁들의 기록들에 가슴 두근거려 보기도 했지만, 불만스럽게도 대부분의 책들 속에서 좋은 것들은 당연히 좋은 것이었고, 나쁜 것들은 당연히 나쁜 것이었으며, 그러한 이분법 아래에서, 대중(이든, 이념적 언어인 민중이든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사람)은 이념에 의해 어떤 때에는 혁명적 투사로, 어떤 때는 반동적 소시민으로, 또는 어떤 때에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공란으로 일관성도 없이 그저 몇 마디의 말로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뜨거운 이념들과 멋진 규정들은 보았으나, 엉터리 지도자와 가여운 민중을 막론하고, 생활을 살아가는 그들 사람들의 냄새는 맡지 못하였던 것이다.

관점 없는 역사(책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용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그리웠다.(물론 무엇보다 자료를 찾는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이러저러한 대한민국 대중의 특성을, 혹은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케 한, 절대적으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요인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솔직하고 쉽게 설명한 글들이. 바로 생각보다 약하고 예상보다 어리석은 존재인 인간들과 그들을 억압한 사건들 간의 연계로서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글들 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아야만,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쉽사리 신나하거나, 쉽사리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를 상당부분 채워준다는데 장점 이 있다. 저자는 그의 '최대의 무기인 성실함'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복원해낸다. 곳곳에 인용된 증언들은 오래전에 박제된 인물들과 사건들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건들에는 기본적으로 두세 가지 관점에 의한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된다. 예컨대, 419혁명의 과실을 취한 사람들이 '가장 실천이 늦었던 서울의 명문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국민 개조 작업이 결과적으로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응시함으로써, 왜 명문대 학생 노동운동가 출신의 국회의원이 이따위 비정규직 법안을 내놓고 그것의 정당성을 조선일보를 통해 홍보하고 있는지, 또는 마치 가미카제가 자폭하듯 수많은 여성들이 황교주에게 난자를 제공하겠음을 선언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객관을 지향하는 역사관은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형태로서 그것 자체로 보수적 역사관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을 향한 강준만의 노력이 양비/양시론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우선 첫째로, 한국사회가 그동안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문화에 익숙했다는 점과, 둘째로 한국 현대사를 통해 진정한 대중의 민주주의나 혹은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진 적이 전무했다는 사실에 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쓰인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오늘 날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인간성과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보수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보통'이기 위해선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은, ‘우와 정말 새로운데?’보다는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에 가깝다. 그리하기에 열다섯 권의 압박이 극심하기는 하지만(그래서 조금 빼곡히 내용을 채워서 두꺼운 책 다섯 권 정도로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 책은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읽어야만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보수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내용이 여기에 있다. 나아가, 지피지기면 승률이 조금 오르기는 할 터이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에게도 이 책이 꽤나 유용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419나 518에 대한 책을 읽음으로써도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품을 수 있겠지만, 그 점은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금껏 이토록 꿋꿋하게 살아왔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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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동춘 교수가 자신의 책 <전쟁과 사회>를 50만명에게 읽히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변할 것이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 책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진달래와 무궁화가 깔린 사진을 보고 기막혀하던 참이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님의 글은 여전히 반갑습니다. ^^

happyant 2005-12-0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편이 허락된다면,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리고 싶은 책입니다. 십년치씩 선물하려 했으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가격인지라, 좌절.;;;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려진 무궁화에 한번 놀라고, 방송계의 조선일보 에스비에수의 집중과 왜곡에 또 한번 놀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 없는 소설이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비까지 내리면 그러한 기분은 더욱 극심해진다. 내가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논리로 차분히 비평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울림을 지닌 책을 만나는 것은 물론 두말 할 나위 없이 '기쁜'일이겠으나  - 돌덩이든 쇳덩이든, 쳇바퀴 같은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은 마찬가지죠(이우진식으로읽어야함) - 그것도 때와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뇌까지 스민 무기력 증에 밤새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존 쿳시’의 '추락'은 내가 세 번째로 읽은 그의 소설이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에코 페미니즘 적 여성에 대한 본능적 반감으로 별 감흥이 와 닿지 않았으며, 두 번째 읽은 '페테르크부르크의 대가'는 내용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대가의 자의식에 침몰된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그라는 존재를 잊고 있다가, -책장에 꽂힌 책 두 권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 또한 '삼세번‘은 내 유년기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언명령에 가까운 원칙이 아니었던가. - 집어든 세 번째 이 책에서, 나는 끔찍한 먹먹함을 느낀 것이다.

 

일단(그리고 아마도 이 리뷰 내내), 이 책이 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남아공의 흑백 간 완전한 화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잊을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외재적 비평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내가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곳을 한번 여행해 본 적도  없으니, 몇 권의 역사책과 '호텔 르완다'(혹은 ‘부시맨’)정도의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연찮게도, 나는 이 책을 지력이 아닌 감성으로 읽었기 때문에, 논리에 의한 딱딱한 리뷰를 뱉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스스로를 속이는 일임과 동시에 재미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역사를 가장 비역사적으로 그린 소설을 다시금 역사를 끌어들여 읽는 것은,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외부에 위치한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답답했던 것은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 교수의 무력함이었다. 그것은 그를 교수직에서 박탈되게끔 만든 존재에 대한 무기력이 아닌(오히려 그러한 무기력 하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자존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딸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자, 자신의 창조성에 대한 총체적 무기력이다.(물론 역사에 대한 무기력이 가장 크겠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그는 때때로 못이기는 척 - 필사적으로 - 반걸음 정도 나아가 보지만 항상 커다란 장벽에 부딪친다. 그것은 그의 주체적인(동시에 배제적인) 합리성에 대한 벌이요, 그의 폭력적인 남근에 대한 벌이자, 동시에 그의 깨닫지 못했던 오만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내가 루리에게 감정이입했다는 사실이다. 대략 두 배 정도 나이가 많은 늙은이에게(그가 작가의 분신일지도 모르는 일인데) 감정이입했다는 것은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손톱만큼이나 잃을게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어지는 의문점들, 나는 내가 저질러야 했던, 혹은 저지르게 될 죄로 고통 받은/을 사람들과 과연 화해 할 수 있을까? 동시에 내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루시’처럼 나는 용서하거나 계속 견뎌내며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물음이 남고, 풀리지 않는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것은 아픈 거다. 그렇다, ‘루리’는 항상 꿈꾸던 오페라를 못 쓰고 헉헉대지만, 나는 이 짧은 리뷰조차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헉헉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은 그것뿐이다.

 

무척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만끽하는 가운데에서도 ‘야만인을 기다리며’부터 품게 된 하나의 껄끄러움은 여전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인 ‘설정’이다. 현실을 가득 매운 화해 불가능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어떠한 캐릭터와 설정을 사용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겠지만, 어찌되었거나 가해자 남성과 피해자(혹은 그래서 역으로 구원하는) 여성으로 귀착되는(주요한 장치인 섹스와 강간을 통해 어찌되었거나 고통 받은 성性은 무엇인가) 남성 노대가들의 소설에서 주로 보이는 설정은 역시나 껄끄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나로선 이 느낌은, 그러한 설정이 아무리 위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해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루리도 살아가고, 루시도 살아간다. 쿳시도 인세 받고 잘 살아가고, 나도 나름나름 잘 살아간다. 정형근도 잘 살아가고, 그에게 고문당한 많은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쿳시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끝이 났지만,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게 남겨진 몫이다. 삶은 역시나 언제나 고된 법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한 층 한 층 지하로 천천히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일 테지만, 이런 CM송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난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기는 한편, 이렇게 말하는 거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즐기시지 못한 게 있으시면 자유롭게 즐기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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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8-2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한 권으로 조용히 마무리한 작가로군요. ^^;
이백오십구만층까지 추락하기, 라니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네요.

happyant 2005-08-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포인트는 '지하'라는 것과, 한층한층 천천히 추락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