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여기에서의 '질'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의 '삶의 질'을 의미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시대인식에서부터 출발한 민주주의자로서의 저자가, 그러한 저하의 이유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담은 것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와 해결방안’이 놓여있는 공간은 각자가 견지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민주주의자로서의 저자가 파악하는 오늘 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즉 이데올로기적 양극화와 권위주의적 산업화, 그리고 87년 민주화 운동의 보수적 종결을 경험하며 성립된 현재의 한국 민주주의는 ‘기존의 냉전 반공주의의 헤게모니와 보수독점의 정치구조에 그저 얹혀 있는 외피에 불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 계층의 갈등이 정상적인 형태로 정당에 의해 대리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민중의 발언권이 축소되고 삶의 수준이 저하되는 것은 그것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또한 이러한 토대 위에서, 민주화 이후 연속적으로 집권한 비주류 정부는, 자신들을 지지한 세력과의 연계 고리를 유지하기보다 보수 세력과의 타협을 추구함으로써, 집권 후기 역설적으로 권위주의 정부보다도 더 관료에 포획된 무력한 정부가 되었고, 그들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세계화로 인해 재벌의 경제적 집중은 심화되는 가운데 노동은 더욱 철저히 정치의 장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시민사회는 그 규모는 성장하였지만, 그것과 동시에 내부의 보수적 헤게모니가 강화됨으로써, 오히려 한국 사회의 민주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현상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문제의 해결방식은, 대중의 갈등을 대리하지 못하는 보수독점의 협애한 정당체제로 표상되는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변화시켜, 사회에 상존하는 갈등이 정치체제 내에서 해소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저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비롯하여 책 말미에 몇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논의의 깊이의 측면에서나, 대안이 전체 내용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측면에서나,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있지 못하다. (초판에서 그러했듯)사실상 ‘기원과 (한때 그가 기대했던 현재 노무현 정부의)위기’까지가 저자가 이번 개정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의 ‘결론과 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기원과 위기’ 이후 이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저자가 참여하는 몇몇의 세미나에서 그가 발표한 글들이 아마도 그것의 내용이 될 터이다. 작년 10월 21일에 있었던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 역사와 좌표’ 심포지엄과 올해 1월 12일에 있었던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 한국사회 위기 진단과 희망 찾기' 포럼에서 발표된 각각의 그의 글은 이번 개정판이 담아내지 못한 몇 가지 중요한 지점들을 담고 있다.


우선 저자는 과거 한국 사회 민주화의 커다란 이념적 기반이었던 NLPD론을 다시 되살릴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지금껏 그가 보여 온 지난 민주화세력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감안하면 얼마간 뜻밖인데, 사실상 저자는 과거로부터의 연장선상에서 NLPD론의 회복을 주장하기보다는,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사회가 추구해야할 두 가지 현실적인(동시에 어느 정도 당위적인) 가치로서 통합적인 NLPD론을 재정립 하려는 듯 하다. 분열되어 PD적 문제의식이 약화된 NL의 현실 상황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현실적 사회 변혁의 방안으로 적합한 것이 ‘민주주의’인가 ‘운동’인가?” 라는 얼마간 도발적인 이분법적 질문을 던지며, 그 대답으로 후자를 비판(혹은 걱정?)하면서 민주주의를 더욱 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면모는 그의 최대의 장점임과 동시에 주류 정당정치의 공간을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의 그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진 대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지나오는 동안, 그의 이상(혹은 학자로서의 기대감)과 그가 지지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려 왔다.


하지만, ‘한계’를 지적하기에 그의 논의는 그것 자체로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말처럼 ‘민주화로의 전환의 과정에서 운동의 역사적 기초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한국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냉전 반공주의와 보수적 산업화를 주도했던 권위주의가 해체된 민주화이후의 시기에 소멸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사회의 희망적인 대안이 노모씨나, 황모씨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민중들의 피로 유지되는 연극이라면, 적어도 규칙도 원칙도 없는 저열한 개그는 아닐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김규항의 사사로운 언어를 빌려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XX, 학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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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1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장집 선생이 말하는 바가, 대략 정리가 안 되었는데 '위험하면서도 의미있는 접근이라는 점'에서 님의 리뷰를 보고 아우트라인이 잡히네요. 일전에 <민중의 세계사>를 소개해주실 때부터 늘 먼저 책을 읽으시는구나 생각했더랬습니다.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happyant 2006-01-1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먼저는 무슨...^^ 그저 읽어봐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후마니타스 2007-06-1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한참을 - 며칠간을 - 고민했습니다. 어떠한 언어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라는 습관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요. 그리하여 간신히, 매우 사적인 언어들이나, 나름대로 공적인 단어들, 혹은 억지로 학술적인 어휘들로 이루어진 몇 문장을 만들어 보았지만, 영 만족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몇 페이지(!) 분량의 파편적인 문장들 뿐, 생각들은 잘 엮이지 않았고, 설혹 엮였다 하더라도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면 위악적으로 보이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정상이되, 단지 저의 비평적 지식과 체계적인 사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분명, 김모교수의 멋들어진 비평 하나가, 떡하니, 소화 안 되는 설날 떡처럼 담겨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거나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쓸쓸했고, 슬펐으며,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나 자신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세상이라 생각했고, 그 감정이 소중하며, 그것을 느끼게 해준 이 작품이 무척이나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나'이며, 내가 '장모씨'이며, 장모씨가 '그'이기 때문이었고, 또한 세상은 여전히 '즐거운 그의 방'처럼 어둡고, 외롭고, 모두를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문득, 혼란스러운 작품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혼란스러운 인간이 보았으니, 무엇인가 정리된 감상이 생산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거짓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그'와 짧은 동거를 하였지만, 저는 그들과 앞으로 오랜 동거를 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만약, 제가 이 작품의 존재를 며칠 뒤에 잊어버리더라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 모두를, 그냥 안전하고 완전하게, 타자를 망각한 채로, 살아가도록 놔두지를 않으니까 말입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심층의 이야기부터, 매우 거친 사회의 표면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가능성의 흔적들까지, 세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그리고 그 그림들의 여백에 작가의 진심이 담겨져 있는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쉽지 않은 일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라고, 그러하다고, 적어도 좁은 제 방 안의 어떠한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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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1-0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보셨군요. 저의 올해 첫 주문은 역시 이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올 한해 건강하게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올해에도 변함없이 좋은 글 보여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

happyant 2006-01-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에- 꼭 보세요. 바람구두님의 추천페이퍼는 정말 감사한 것이었습니다.ㅋ

블루님도 올 한해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좋은 리뷰와 페이퍼, 항상 그렇듯 기대하겠습니다.~

happyant 2006-01-0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앗앗. 매번 바람구두님의 리뷰나 페이퍼를 보며 여러가지를 배우는 처지인데;; 그리 말씀하시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구두님의 이 책 리뷰 또한 잘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추천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3-1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happyant님의 하나의 리뷰를 읽고 글이 좋아 여러작품 리뷰를 읽다가 글 남깁니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다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286 컴퓨터는 어느새 펜티엄이 되었고, 386 혁명가들은 어이없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무엇인가 변하기는 변한 것도 같다. 세상이 변했으니 사람들도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으니 그 사람들이 창조해내는 작품들도 변한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민주사회다. 책들의 표지는 반짝반짝, 연예인들을 비추는 조명만큼이나 빛나고, 이 찬란한 시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취향이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얼마나 변하였는가. 선명한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에 투명한 파시즘이 자리 잡았다는 얘기는, 얼마간 타당하지만 대체로 복에 겨운 헛소리다. 방패에 찍혀 죽어나가는 농민들과, 기계에 찍혀 죽어나가는 이주노동자들을 담은 사진이 선명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변한 것은 사람이지, 세상이 아니다. 때문에, 대체로 ‘변한’ 오늘날의 문학이 그것의 기반으로서의 세상을 얼마나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얼마간 비판적인 대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그늘을 바라보는 작가는 오늘 날에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소년은...'는 그러한 작가가 풀어놓는 여전한 세상을 여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극도의 가난을 겪고 열 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어린 화자와, 성매매를 통해 생을 유지하는 그의 누이, 그리고 그녀를 착취하거나 사랑하는(그럼으로써 착취하는) 몇몇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무척이나 무거운 어조로 그려낸다.


소설이 우선적으로 ‘재미’를 주는 것은, 화자가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이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어린이날에 어울리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나이의 화자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어른들과 우정을 쌓을 정도로 노숙하다. 근대로 접어들며 구성된,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아이'라는 개념은 실질적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시대에 해체되고, 그것이 해체된 잔해를 걷으면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한걸음의 상승과 영속적인 추락의 문체로 진행된다. 예컨대, 새로운 삶을 꾸려보려 이것저것 가재도구를 장만했다, 태풍이 불어왔다, 삶이 잠겨버렸다. 이런 식이다. 작품 속에서 절망은 공기와도 같고, 고독은 끼니보다 자주 찾아온다. 무거운 문장은 더 무거운 현실과 부딪쳐 끊임없이 부서지고, 이것은 소설의 끝까지 지속된다. 난장이가 공을 쏘아 올린 지 무려 30년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고독한 작가가 뱉어내는 문장 또한 여전히 쓰다.  


책을 덮고서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은 누이의 전형성이다. 저열하게 말하자면, '무능력한 가족들을 몸 팔아서 부양하는' 누이의 캐릭터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반복되지 않았던가. 물론 여전히 여성을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내모는 사회체제는 존재한다.(아니,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남성 작가로서 그러한 부분들을 좀더 올바르게 그리려면, 좀 더 겸손하던가, 혹은 좀 더 창의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의 대부분이 '나'의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필연적으로 외부의 인물들이 얼마간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불가피했겠지만, 작품 속에서 성매매라는 것이 단순한 소재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만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과연, 소년은 눈물을 그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은 무리한 기대인 것 같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문득 진정 뜬금없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삽입곡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물 흘리는 소년이 신화가 되기에, 세상에는 그보다 멋진 이미지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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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2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라도 가능할까요? 책을 볼 때, 혹은 님의 리뷰같은 이런 글을 볼 때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하여, 다시 무겁습니다.

happyant 2005-12-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을 덮고 우울한 마음에 깊이 생각 못하고 글을 싸질러놓았는데, 블루님의 물음을 받으니 너무 쉽게 쓴 것 같아 제 마음도 더 무겁고 부끄러워 집니다. 어쨌거나, 할 수 있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것의 크기 역시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겠지요.
 
정경화 - 화답
지니(genie)뮤직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마녀가 좋다.(여기에서 ‘마녀’라는 단어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이건 그냥, 가벼운 리뷰다.) 진지한 마녀도 좋고, 활달한 마녀도 좋고, 섹시한 마녀도 좋다. 오래전부터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진지한 마녀와 함께 숲에서 반자본주의 의식화를 위한 세미나를 한다든가(물론 마녀가 나를 지도하는), 활달한 마녀와 들판 위에서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든가(물론 나는 코러스다), 섹시한 마녀와 음란하게 정을 통하다 함께 화형 당하는 등등의 상상. 물론 상상속의 마녀는 대체로 이미지 일 뿐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아무튼 그런 식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아주 가끔씩 정장을 입은 나를 보고 친구들이 '너 60년대의 나약한 지식인 같다.' 라고 놀릴 때면, 60년대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라고 투덜대면서도, 나약한 지식인과 터프한 마녀. 뭔가 어울리지 않나? 라고 내심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녀들도 보는 눈이 있을 터인 즉, 나는 아직 마녀를 실제로 만나지 못했고, 사랑해 보지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15세기의 종교재판관처럼 숨어있는 마녀를 한눈에 알아보는 성스러운 시력도 없고, 21세기의 잘 팔리는 '세련된 마녀'들이 그/녀들의 은밀한 의식으로 나를 유혹하도록 만들 만한 매력과 재력 따위도 없으니, 마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겨우, '내'가 생각하는 마녀는 '그런'게 아냐. 라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릴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골치 아프게 '그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는 말자. 누가 마녀를 논리적으로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마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벤야민 아저씨가 정치적 해방의 냄새를 맡았을 법한 상품들에서 마녀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지금껏 두 명의 마녀를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가수다. 우선 한 명은 27살의 나이에 그토록 꿈꿔오던 결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쓰리제이 중의 한명인 ‘재니스 조플린’이다. 그러니까, 재니스 조플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두들 공감할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몹시 짜증이 나는 어느 날 밤에, 라이브 버전의 '섬머타임'과 '볼앤체인'을 듣는 것이 대체 어떠한 기분인지. 그것은 마치 쇠사슬로 결박된 채로, 한 땀 한 땀 해부당하면서 환각제로 뼈마디를 세척당하는 듯한 기분인 것이다. 기절할 듯한 몽롱함이라고나 할까.

  

재니스가 무겁고 거칠게 절규하는 마녀라면, 온 힘으로 위로하는 두 번째 마녀는, 바로 대체 나이를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경화다. 오래 전 어느 날 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나에게로의 초대'가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만들었었는지. 그때 내가 인식한 정경화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욕망하는 내 상상속의 섹시하게 진지한 마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자신의 은밀한 의식에 초대했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울림 속에서 난 그 어렸던 시절, 나 스스로도 솔직히 다가설 수 없었던,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마치 화형당한 마녀처럼,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나버렸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6년 만에, 그녀가 화답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녀도 변했고, 나도 아마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하고, 나의 갇힘과 외로움도 여전하다. 또 한번의 계절이 가는 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한번씩 불렀던 노래들을 불렀고,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사랑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그녀의 화답을 들으며, 세상을 한발자국 정도 관조하게 된 듯한 그녀의 어투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패닉'처럼 지나치게 세련된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생각하며, 앨범의 첫 번째 곡의 마지막 가사 한 줄에 그만 심하게 가슴 아려하는 것이다. 내 맘을 어루만져 주세요, 라는 그 가사 한 줄에. 그렇게, 그녀의 애원과 외침이 나를 위로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위의 다섯 단락은 순수하게 헛소린데, 그것은 왜냐하면, 이따위의 글로는 그녀의 노래가 품고 있는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나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나름대로 고생해서 써놓은 글을 폐기하기는 못내 아쉬우니, 볼품없는 내 서재의 한 귀퉁이에, 그냥 처박아 놓기로 한다. 아, 뒤늦게 생각난 것인데, 이 글은 이 음반을 추천하기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으며 별다른 이유로 불쾌하지 않으셨던 분들은, 책사는 김에, 이 음반도 사서 들어 보시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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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1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헛소리, 제가 무지 좋아합니다.
음반 리뷰가 이렇게 재미있으면, 요즘은 음악이랑은 담 쌓고 지내는데, CD를 당장 구입해야할 것 같단 말이지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구만.

happyant 2005-12-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옹. 96년도 2집의 '나에게로의 초대'는 분명(^^)어디선가 들어보셨을걸요. 꽤나 히트했으니깐. 그리고, 저야 뭐, 읽어주시니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가끔씩, 아니 자주, 이 나라는 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기회주의가 소명인 듯한 정치인들이나, 부패가 주식인 듯한 고급관리들이나, 양심은 엿 바꿔 먹은 듯한 부유층들이나, 상아탑의 벽돌을 팔아 끼니를 구걸하는 지식인들이나, 마녀사냥에 재미 들린 키보드 워리어 들이나, 그리고 항상 현실에 굴복하는 스스로를 볼 때면 막연하게 총체적인 개념으로서의 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이 도저히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부정적인 모습만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예컨대, 치안유지법이 아직 남아있다든가, 신자유주의 정당이 빨갱이로 몰린다든가, 하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지금껏 몇 종의 한국사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속 시원하게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은 없었다. 물론 여러 차례 한국전쟁의 기록들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화 투쟁들의 기록들에 가슴 두근거려 보기도 했지만, 불만스럽게도 대부분의 책들 속에서 좋은 것들은 당연히 좋은 것이었고, 나쁜 것들은 당연히 나쁜 것이었으며, 그러한 이분법 아래에서, 대중(이든, 이념적 언어인 민중이든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사람)은 이념에 의해 어떤 때에는 혁명적 투사로, 어떤 때는 반동적 소시민으로, 또는 어떤 때에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공란으로 일관성도 없이 그저 몇 마디의 말로 규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뜨거운 이념들과 멋진 규정들은 보았으나, 엉터리 지도자와 가여운 민중을 막론하고, 생활을 살아가는 그들 사람들의 냄새는 맡지 못하였던 것이다.

관점 없는 역사(책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용 모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그리웠다.(물론 무엇보다 자료를 찾는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이러저러한 대한민국 대중의 특성을, 혹은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케 한, 절대적으로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요인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솔직하고 쉽게 설명한 글들이. 바로 생각보다 약하고 예상보다 어리석은 존재인 인간들과 그들을 억압한 사건들 간의 연계로서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글들 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아야만,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 쉽사리 신나하거나, 쉽사리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그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를 상당부분 채워준다는데 장점 이 있다. 저자는 그의 '최대의 무기인 성실함'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복원해낸다. 곳곳에 인용된 증언들은 오래전에 박제된 인물들과 사건들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건들에는 기본적으로 두세 가지 관점에 의한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된다. 예컨대, 419혁명의 과실을 취한 사람들이 '가장 실천이 늦었던 서울의 명문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의 국민 개조 작업이 결과적으로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응시함으로써, 왜 명문대 학생 노동운동가 출신의 국회의원이 이따위 비정규직 법안을 내놓고 그것의 정당성을 조선일보를 통해 홍보하고 있는지, 또는 마치 가미카제가 자폭하듯 수많은 여성들이 황교주에게 난자를 제공하겠음을 선언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객관을 지향하는 역사관은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형태로서 그것 자체로 보수적 역사관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을 향한 강준만의 노력이 양비/양시론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우선 첫째로, 한국사회가 그동안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문화에 익숙했다는 점과, 둘째로 한국 현대사를 통해 진정한 대중의 민주주의나 혹은 소수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진 적이 전무했다는 사실에 있다.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쓰인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오늘 날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인간성과 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보수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보통'이기 위해선 진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은, ‘우와 정말 새로운데?’보다는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에 가깝다. 그리하기에 열다섯 권의 압박이 극심하기는 하지만(그래서 조금 빼곡히 내용을 채워서 두꺼운 책 다섯 권 정도로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이 책은 어떻게 해서든 모두가 읽어야만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보수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내용이 여기에 있다. 나아가, 지피지기면 승률이 조금 오르기는 할 터이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에게도 이 책이 꽤나 유용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419나 518에 대한 책을 읽음으로써도 민중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품을 수 있겠지만, 그 점은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금껏 이토록 꿋꿋하게 살아왔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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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동춘 교수가 자신의 책 <전쟁과 사회>를 50만명에게 읽히면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는 변할 것이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 책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진달래와 무궁화가 깔린 사진을 보고 기막혀하던 참이지만, 오랜만에 나타난 님의 글은 여전히 반갑습니다. ^^

happyant 2005-12-0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편이 허락된다면,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리고 싶은 책입니다. 십년치씩 선물하려 했으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가격인지라, 좌절.;;;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려진 무궁화에 한번 놀라고, 방송계의 조선일보 에스비에수의 집중과 왜곡에 또 한번 놀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