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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화 - 화답
지니(genie)뮤직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마녀가 좋다.(여기에서 ‘마녀’라는 단어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이건 그냥, 가벼운 리뷰다.) 진지한 마녀도 좋고, 활달한 마녀도 좋고, 섹시한 마녀도 좋다. 오래전부터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진지한 마녀와 함께 숲에서 반자본주의 의식화를 위한 세미나를 한다든가(물론 마녀가 나를 지도하는), 활달한 마녀와 들판 위에서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든가(물론 나는 코러스다), 섹시한 마녀와 음란하게 정을 통하다 함께 화형 당하는 등등의 상상. 물론 상상속의 마녀는 대체로 이미지 일 뿐이었지만, 뭐 어떤가,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아무튼 그런 식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아주 가끔씩 정장을 입은 나를 보고 친구들이 '너 60년대의 나약한 지식인 같다.' 라고 놀릴 때면, 60년대엔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라고 투덜대면서도, 나약한 지식인과 터프한 마녀. 뭔가 어울리지 않나? 라고 내심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녀들도 보는 눈이 있을 터인 즉, 나는 아직 마녀를 실제로 만나지 못했고, 사랑해 보지도 못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겐 15세기의 종교재판관처럼 숨어있는 마녀를 한눈에 알아보는 성스러운 시력도 없고, 21세기의 잘 팔리는 '세련된 마녀'들이 그/녀들의 은밀한 의식으로 나를 유혹하도록 만들 만한 매력과 재력 따위도 없으니, 마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겨우, '내'가 생각하는 마녀는 '그런'게 아냐. 라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릴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골치 아프게 '그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는 말자. 누가 마녀를 논리적으로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앞의 마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벤야민 아저씨가 정치적 해방의 냄새를 맡았을 법한 상품들에서 마녀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지금껏 두 명의 마녀를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여성이고 둘 다 가수다. 우선 한 명은 27살의 나이에 그토록 꿈꿔오던 결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쓰리제이 중의 한명인 ‘재니스 조플린’이다. 그러니까, 재니스 조플린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두들 공감할 것이다. 찌는 듯한 더위로 몹시 짜증이 나는 어느 날 밤에, 라이브 버전의 '섬머타임'과 '볼앤체인'을 듣는 것이 대체 어떠한 기분인지. 그것은 마치 쇠사슬로 결박된 채로, 한 땀 한 땀 해부당하면서 환각제로 뼈마디를 세척당하는 듯한 기분인 것이다. 기절할 듯한 몽롱함이라고나 할까.
재니스가 무겁고 거칠게 절규하는 마녀라면, 온 힘으로 위로하는 두 번째 마녀는, 바로 대체 나이를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정경화다. 오래 전 어느 날 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나에게로의 초대'가 나를 어찌나 황홀하게 만들었었는지. 그때 내가 인식한 정경화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욕망하는 내 상상속의 섹시하게 진지한 마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자신의 은밀한 의식에 초대했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울림 속에서 난 그 어렸던 시절, 나 스스로도 솔직히 다가설 수 없었던,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 뒤 마치 화형당한 마녀처럼,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나버렸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6년 만에, 그녀가 화답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녀도 변했고, 나도 아마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하고, 나의 갇힘과 외로움도 여전하다. 또 한번의 계절이 가는 동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전에 한번씩 불렀던 노래들을 불렀고,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사랑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소리친다. 나는 그녀의 화답을 들으며, 세상을 한발자국 정도 관조하게 된 듯한 그녀의 어투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패닉'처럼 지나치게 세련된 음반이 나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생각하며, 앨범의 첫 번째 곡의 마지막 가사 한 줄에 그만 심하게 가슴 아려하는 것이다. 내 맘을 어루만져 주세요, 라는 그 가사 한 줄에. 그렇게, 그녀의 애원과 외침이 나를 위로했다.
그럼에도 사실상, 위의 다섯 단락은 순수하게 헛소린데, 그것은 왜냐하면, 이따위의 글로는 그녀의 노래가 품고 있는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나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나름대로 고생해서 써놓은 글을 폐기하기는 못내 아쉬우니, 볼품없는 내 서재의 한 귀퉁이에, 그냥 처박아 놓기로 한다. 아, 뒤늦게 생각난 것인데, 이 글은 이 음반을 추천하기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으며 별다른 이유로 불쾌하지 않으셨던 분들은, 책사는 김에, 이 음반도 사서 들어 보시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