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 이승하 시인과 함께 떠나는 세계 명시 기행, 개정판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이전의 서평에서도 한번 이야기 했었지만, 번역된 문학작품은 근래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사실 그렇게 말해 놓고선 정작 서평 대상은 번역된 세계명작이었지만) 그리고 그 점은 시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소설이야 번역 과정에서 역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하더라도, 큰 이야기의 얼개 자체가 변형될 위험은 없지만, 고도로 압축된 언어로 구성되는 시는 역자가 어떠한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백팔십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채의 저자가 "예이츠의 이 시는 제목이 '꿈'이 아니라, 'He Wishs for The Cloths of Heaven'인데, '하늘의 옷감'(윤삼하 역), '하늘의 수(繡)단이 내게 있다면'(신동춘 역), '하늘의 융단'(신현정 역), '하늘나라의 옷'(성춘복 역) 등의 제목으로 변역되어 있다. 제목이 이렇게 다르니, 번역자에 따라 시의 뉘앙스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269p)"라고 말했듯, 나는 그동안 "번역이 영 신통치 않다, 문화적/역사적 배경이 달라 이해를 못하겠다, 외국 시는 좋은 줄을 모르겠다(4p)"라고 말하며 세계 명시라는 말이 나오면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물론 네루다나, 랭보를 뒤적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내 뭔 소린지 모르겠다, 라며 고개를 흔들거나, 백석, 김수영, 최승자, 기형도 등의 기존에 내가 좋아하던 시인들의 책으로 다시금 눈길을 돌리고 말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인의 시를 읽는 건지, 역자의 시를 읽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여름의 끝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이 책을 펼쳤을 때 눈에 들어온 한 구절의 설명, 한 편의 시, 한 장의 사진은 나를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호텔에서 칼로 팔목 동맥을 절단, 펜을 피에 찍어 시를 썼다.


잘 있게나, 내 친구여

소중한 자네를 내 가슴속에 간직하려네.

이별은 이미 정해진 것.

저승에서 만남을 약속하는 것.


나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잘 있게나.

악수나 조사(弔詞)따위는 아껴두게.

이승에서 죽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건만

삶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네.


시 쓰기를 마친 예세닌은 노끈을 목에 감고 의자에 올라가 창문에다 노끈을 맨 뒤 발로 힘껏 의자를 찼다......(367~368p)



그리고 유약한 이미지의 그가 담겨 있는 사진과 마주하고는, 나는 그의 삶으로, 그리고 다른 24명의 시인들의 삶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했을 법한,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한(누군들 그러하지 않으랴만, 시인은 더욱 그러함에 틀림없다) 영혼들과 마주하며, 난, 한없이 우울했고, 가까스로 그 우울에서 끌어 올려 졌다가, 다시 더 깊은 우울에 빠져버리곤 했다. 기형도가 어떤 시의 마지막 행에서 고백했듯, 가장 사랑받는 시인의 삶은, 어찌 그리 스스로를 사랑할 줄은 모르는 것일까.(아니면 너무나도 큰 나르시시즘적인 사랑을 스스로가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예순이 되기 전에 폐렴악화로 죽은 엘뤼아르를 보며 참 오래도 살았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불화는 기본, 질병은 필수요, 요절은 선택이라고나 할까. 당시의 평균수명과 의학의 발전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지나칠 정도로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그들이 너무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이것은 역으로 그 정도의 ‘불길한 감수성’을 갖고 있어야만 ‘사랑받는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체로 너무 앞서 느꼈거나(블레이크, 하이네), 뒤쳐져가는 것을 잊지 못했고(예세닌), 자신의 감성에 너무도 정직했으나 유약했다(보들레르, 포). 그리하여, 시인의 연약한 살갗은 이내 세상의 굳은살에 쉽사리 베여버리고, 그 안으로 운명적인 비극의 균들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시와 소설만은 발적적으로(190p)” 쓰게 되면, 아픔을 잊고 살아가는 대중은, 그들의 각혈에 사랑을 보낸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상처만 한 아름 안고 세상을 떠난 다음에 말이다. 슬픈 일이다.


저자는 이 책이 외국 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미안하게도, 난 여전히 그들의 시에는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포나 예세닌, 보르헤르트를 비롯해 몇몇 시인들의 시는 인상 깊게 읽었지만, 여전히 ‘그럴 바에야 우리의 시를’이라는 닫힌 태도를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그들의 아픔에는, 적어도 내일 아침의 밥 한 끼보다는,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가 누구나 한 때 겪는다는 문학청년의 시기는 이미 오래 전 지났으되, 여전히 그들의 백분지 일이나마, 날선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즐겨’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든, 몇몇 영어권 작가들의(프랑스어나 독일어를 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를 원서로 읽어야겠다, 라고 결심했으니, 이것은 무책임한 결심일까, 현학적인 만용일까. 아니면 때늦은 낭만의 발동일까.     


책 한권에 많은 인물을 다룰 경우, 인물별로 두 세 페이지 분량의 간략한 전기에 작품 한두 편과 그것의 해설을 덧붙여 놓고 책 팔아먹는 일도 있을 법 한데, 이 책은 총 600페이지 분량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내용이 채워져 있다. 물론 책의 사이사이에 있는 시가 워낙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에, 시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분량이 적지만, 조금 더 심화된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생길 정도의 깊이는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이었던 상고르의 경우, 그가 주도한 네그리튜드 운동과 그것에 대한 파농과 월레 소잉카의 비판까지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참고서 느낌이 나는, ‘감수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표지와 가끔 보이는 저자의 오버(이것은 독자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겠다)를 감안한다면, 나처럼 ‘세계의 명시’에 거리감‘만’ 있었던 사람들에게 입문서로는 적당할 듯하다. 물론, 입문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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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9-2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세닌이 20대에 자살했던가.
수업 시간에 러시아어로 시를 읽었지만, 말 그대로 '읽었'을 뿐이죠. 잘 모르긴 마찬가지였어요. 뭐 사실 우리나라 시도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_-
그나저나, 자주 좀 봅시다!

happyant 2006-09-26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살때라네요.
시야, 그래서 읽던 것만 읽게되죠. 그러다가, 가끔씩 찡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또 한동안 그것에 젖어 살다가, 잠시 잊었다가, 다시 빠져들었다가, 반복입니다.ㅎ

그러게요 자주 보면 좋겠네요. 언젠가 진짜 보면 더 좋을 지도요.ㅎㅎ
그래도 이렇게 잊지 않고 또 글을 남겨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urblue 2006-09-2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로 봐도 좋죠 뭐.
안그래도 청첩장 돌리고 있는 중인데 하나 보내드리까? ^^a

happyant 2006-09-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히. 뒤늦게, 블루님의 공지에 댓글을 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