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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다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286 컴퓨터는 어느새 펜티엄이 되었고, 386 혁명가들은 어이없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무엇인가 변하기는 변한 것도 같다. 세상이 변했으니 사람들도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으니 그 사람들이 창조해내는 작품들도 변한다. 어쨌거나, 아름다운 민주사회다. 책들의 표지는 반짝반짝, 연예인들을 비추는 조명만큼이나 빛나고, 이 찬란한 시대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취향이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얼마나 변하였는가. 선명한 파시즘이 물러난 자리에 투명한 파시즘이 자리 잡았다는 얘기는, 얼마간 타당하지만 대체로 복에 겨운 헛소리다. 방패에 찍혀 죽어나가는 농민들과, 기계에 찍혀 죽어나가는 이주노동자들을 담은 사진이 선명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변한 것은 사람이지, 세상이 아니다. 때문에, 대체로 ‘변한’ 오늘날의 문학이 그것의 기반으로서의 세상을 얼마나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얼마간 비판적인 대답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그늘을 바라보는 작가는 오늘 날에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소년은...'는 그러한 작가가 풀어놓는 여전한 세상을 여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극도의 가난을 겪고 열 두 살의 나이에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어린 화자와, 성매매를 통해 생을 유지하는 그의 누이, 그리고 그녀를 착취하거나 사랑하는(그럼으로써 착취하는) 몇몇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무척이나 무거운 어조로 그려낸다.
소설이 우선적으로 ‘재미’를 주는 것은, 화자가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이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어린이날에 어울리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보호받을 나이의 화자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어른들과 우정을 쌓을 정도로 노숙하다. 근대로 접어들며 구성된,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아이'라는 개념은 실질적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시대에 해체되고, 그것이 해체된 잔해를 걷으면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한걸음의 상승과 영속적인 추락의 문체로 진행된다. 예컨대, 새로운 삶을 꾸려보려 이것저것 가재도구를 장만했다, 태풍이 불어왔다, 삶이 잠겨버렸다. 이런 식이다. 작품 속에서 절망은 공기와도 같고, 고독은 끼니보다 자주 찾아온다. 무거운 문장은 더 무거운 현실과 부딪쳐 끊임없이 부서지고, 이것은 소설의 끝까지 지속된다. 난장이가 공을 쏘아 올린 지 무려 30년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고독한 작가가 뱉어내는 문장 또한 여전히 쓰다.
책을 덮고서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은 누이의 전형성이다. 저열하게 말하자면, '무능력한 가족들을 몸 팔아서 부양하는' 누이의 캐릭터는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반복되지 않았던가. 물론 여전히 여성을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내모는 사회체제는 존재한다.(아니,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남성 작가로서 그러한 부분들을 좀더 올바르게 그리려면, 좀 더 겸손하던가, 혹은 좀 더 창의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의 대부분이 '나'의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진행되기에, 필연적으로 외부의 인물들이 얼마간 피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불가피했겠지만, 작품 속에서 성매매라는 것이 단순한 소재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만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과연, 소년은 눈물을 그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은 무리한 기대인 것 같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소년을 울리는 그 무엇인가에 같이 대항해 주는 것, 혹은 결국 울게 될 소년과 같이 울어주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문득 진정 뜬금없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삽입곡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물 흘리는 소년이 신화가 되기에, 세상에는 그보다 멋진 이미지들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