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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 1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이종욱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과연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는 별개로, 한 철학자의 "앞으로 300년은 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망할 게 무어란 말인가?"라는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주어진 상황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하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나의 경우, 특히나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라서 - 그래서 피곤한 편이라서 - 더욱 그러하다. 짐멜의 말처럼 '감정에 휩쓸려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주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면서 이른바 자신의 밑천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때로는 사태를 넓고 느긋하게 파악하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현실에는 래디컬하게, 성과에는 느긋하게, 이런 얘기다. 관념적이지 않기 위해, 그래도 언젠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고대가 그러했고, 중세가 그러했듯, 무너지고(변화되고) 말 것이라고 느긋하게, 관념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느긋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서는 결코 창조되지 못했던 무기, 핵무기다. 고대의 어떤 전쟁도, 중세의 어떤 역병도, 인류 문명을 단번에 멸절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하지만 핵무기는 다르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무기로 내 영혼은 수 십 번 죽고도 몇 번 더 죽을 수 있다. 우주에 지구와 같이 지성을 갖춘 생명체가 문화를 영위하는 행성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개수가 수백을 넘지 않는다면, 인류는 우주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다. 크리스 하먼의 말처럼 권한을 소유한 누군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려...조직화 된 인간 생활의 종말을 초래‘하는 일이 생길까봐 말이다. 영화나 만화를 보면, '버려진 자들의 반항'과 함께 세상이 바뀌는 데는 몇 개의 탑과 빌딩이 무너지는 데서 발생하는 굉음과 분진만이 필요할 뿐이지만, 아마도 자본주의가 끝날 때에는 그렇게 쉽사리 일이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실재는, 스탠리 큐브릭의 풍자처럼 ’어느 쪽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가치가 실현되는, 그 무시무시하게 쌓여있는 폭탄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다른 극단의 세계의 끝자락에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빼앗으려하는 노동자들을 과연 인간이라 생각할까?(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뭐.......)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은, 그러한 핵무기가 현 인류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사용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의 일본사회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히로시마에서의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직접 원폭을 경험한 작가는(그래서 현재 작가도 병마와 싸우고 있다), 원폭투하 4개월 전인 1945년 4월에서부터 1952년의 한국전쟁 종전 직후까지의 이야기를 마치 자서전을 쓰듯 풀어낸다. 무식했던 나는 맨발의 겐을 [닥터 노구치]나 [캔디캔디] 류의 단순한 인간승리 드라마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직접 읽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투박한 그림체는 놀랍도록 잔혹한 현실을 묘사하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 한 시대의 정신을 증언한다. 정치와 구조가 제거되고 감정과 드라마만 부각되는 여느 전쟁을 다룬 작품들과 달리 [맨발의 겐]에는 개인과 개인간의, 그리고 개인과 사회 간의 권력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에서 겐과 그의 ‘어린’(피를 밥 먹듯이 보는 ‘어린’이들) 친구들은 특별히 공부를 한 것이 아님에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민중-권력자-천황을 통틀어 전쟁에 책임이 있는 총체적 존재로서의)과, 종전을 명목으로 무책임한 살상을 저지른 미국(등의 강대국들)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이해하고 비판하고 싸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실’은 관념적인 이론이나 미사여구로 치장된 형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처절하게 진솔한 형태로 전해지기에 가슴에 더욱 커다란 울림을 남긴다.
한발자국 물러나 바라보면, [맨발의 겐]은 과도하게 소유함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국을 지배하고, 만주까지 점령했던,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 동-남아시아의 상당부분을 착취했던, 자신들만을 위한 대동아공영권을 꿈꿨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우리는 [맨발의 겐] 1권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부의 언론 조작, 비국민에 대한 차별을 통한 집단주의의 강화, 천황의 신격화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입, 그리고 이어지는 잔악한 범죄들. 우리는 난징대학살과 관동대학살을 비롯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일본의 그러한 ‘욕망’은 또 다른 지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해 ‘파괴’되어서만 멈추어 질 수 있었다. 제국을 꿈꿨던 일본은, 자신들의 욕망에 취해 가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 발로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을 보며 한때의 피지배국이었던 한국의 구성원인 우리는, 직접적인 피해자들을 위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배상금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본에게 면죄부를 줄 필요도 없고, 고소해 해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없다.(혹자는 이 책도 ‘반딧불의 묘’의 우를 범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시선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본이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집단 안의 ‘또 다른 목소리’(겐의 아버지처럼)를 외면했듯, 우리도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 안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사회의 건강성을 잃게 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에게 남겨질 것은 피폐함과 황폐함 뿐이기 때문이다.(나는, 얼마 전 잡지에서 본, 거짓에 절망하고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 한겨레21 제591호 <‘성스러운 여인’이 신음한다.>) 같은 의미로, 우리는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가해진 범죄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의 ‘비국민’들에게 가하고 있는 범죄에 대해 과연 얼마나 반성을 하고 있는가. 황우석 쇼크를 거치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의 치부를 목도하며,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었던가? 여전히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또 다시 월드컵이라는 소용돌이에 몸을 던질 채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우리가 반성하는 만큼 일본에도 그것을 요구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당연한 것이지만, 이 얘기는 현재 한국 사회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던/하는 정부를 향해 하는 이야기이지, 수요일마다 찬바람을 맞으며 수 십 년 째 시위를 해 오고 계시는 할머니들이나, 베트남 전에서의 고엽제 피해로 고통 받고 있는 분들을 ‘향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책을 잃으며, 솔직히 말해 꺼이꺼이 울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담한 마음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머리를 맞추면 한번에 죽일 수 있어'따위의 대사가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튀어나와 0.1초면 접속이 가능한 링크를 타고 온갖 잔인한 이미지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휘젓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온갖 가상과 실재와 실재 같은 가상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너무나도 쉽게 몸이 부스러져 죽어가고 있는 세상이지만, 조금만 반성적 사유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그것 자체는 물론, 그것에 익숙해 져 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알 수 있다. 저항할 줄 모르는 우리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저항하지 않는/못하는 무관심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ps. 가능하면 목돈을 마련해서 세트로 구입하시기를 권한다. 낱권으로 구입하게 되면, 2권 이후는 읽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너무나도 비참한 만화 속의 현실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해, 읽는 도중에 몇 번이나 페이지를 그냥 덮으려 했다. 힘겹게 다 읽다 보니, 리뷰도 격해져서, 마음만 더 불편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