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했던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의 「여인」이 입은 드레스의 붉은 빛깔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평소 애호하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들을 본 것도 너무 좋았다.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여전히 그림은 내게 어려운 존재이지만, 멀게 느껴지던 것들이 삶의 큰 의미가 되는 순간은 결코 작지 않은 기쁨을 준다.
양정무 한예종 교수가 영국 내셔널갤러리 자체와 이번에 전시됐던 갤러리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작품들에 대한 소개 자체는 평이하다. 다른 책이나 웹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과 아주 큰 차별성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다른 '난처한' 시리즈에서 감탄했듯, 작품 또는 작가들이 미술사적으로 위치하는 자리를 이해하기 쉽게 규정하는 능력은 역시나 발군이다. 거기에 터너가 클로드 로랭을 너무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하는 조건으로 그의 작품과 로랭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할 것을 내걸었다는 부분처럼, 나 같은 초심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의미 있는 잡학'이 곳곳에 담겨 재미를 더한다.
전시회를 가기 전에 책을 봤으면 훨씬 나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자연도 예술도, 아는 만큼 보인다. 색과 선, 구도, 이야기, 물성, 그리고 붓의 터치와 작품의 외적 맥락까지.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에 따라 느끼는 깊이도 달라진다. 굳이 깊이 느낄 필요가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다양하게 있는 법이다. 책 집필의 ‘동기’가 되는 명화전이 끝난 마당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뭔가 순서가 바뀌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내셔널갤러리에 대한 단순 소개 이상의 무언가가 책에 담겨 있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