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ㅣ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본래, 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니체주의자이기 때문도 아니요,(오히려 난 니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맑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라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종교에 무심하게 된 것은, 내 성장기의 집안 형편과, 유년기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 이유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제법 놀 줄 아셨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 워낙 살기에 바빠 종교집단에 가입할 여유가 없으셨으며, 어머니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입에 풀칠하기 위해 회사에 다니셨던 터라, 연례행사로 절에 가는 것이 - 일년에 한 두 번 쯤? - 전부였으니, 우선 내게는 '모태신앙'같은 일종의 숙명적인 것에 묶일 가능성이 전무 했던 것이다. 또한 유년기 원체 소심했던 나는 차례로 발을 들인 교회와 절에서, 그 폐쇄적인 관계망에 빠르게 질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 그 가정형편과 외모의 '부유함'에 몰리는 어린 인간군상 들이여!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꼬임에 빠져, 하필이면 거리도 멀었던 강남의 큰 절에 발을 들인 것이 ‘원죄’였을까?) 그래서 나는 종교는 미워하지 않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구라치는) 인간은 미워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현실의 종교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갔는데, 훈련소에서 스님이 고 김선일씨가 나라에 해를 끼쳤다고 타박했던 것이 절정이었다. 나는 교회의 ‘초콜릿 바와 콜라’의 유혹도 뿌리치고 소신을 지켜 겨우 파이 하나 주는 절에 갔건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와 완전히 거리를 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험에서 노력한 만큼의 성적을 얻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기원이 담긴 '만卍' 모양의 목걸이를 10년 가까이 목에서 떼어 놓지 않고 있으며, 누군가가 나의 종교에 대해 물을라치면, '무교'라고 차갑게 대답하기보다는 '불교를 좋아합니다. 스스로의 수양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확실히, 내게 불교(절)는 기독교(교회)보다 덜 가진 것 같았고, 또한 무언가 그냥 인정해버리기에는 미심쩍은 ‘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양과 관련이 있는 담백한 종교로 이해되었기에, 호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그에 비해 ‘예수천국불신지옥’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특히 개신교)는 너무 많이 갖고, 너무 많이 부패하고, 너무 많이 폐쇄적인 것으로 느껴졌었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짧은 공부의 결과로, 불교가 기독교에 비해 비교적 덜 가진 것이 '정의로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과, 그 '불교답지 못함'이 - 아, 그 구라쟁이 조폭 스님들과, 구라쟁이 박사와의 연합이라니! - 개신교 못지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정의로운 불교도들과 정의로운 기독교인들이 지난 세월 어떻게 탄압받았으며, 오늘날 어떻게 힘들게 싸우고 있는지도 말이다.)
그러던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세상을 조금 더 겪으면서, 종교라는 것이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한번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라는 얼마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그와 비슷한 시기에 김규항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읽게 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일련의 글들을 통해, 그리고 [서준식 옥중서한]에서 읽게 된 예수님에 대한 서준식 선생의 주옥같은(아, 이 통속적인 수사라니.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말장난이 포함된 개성적인 찬사를 붙이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고 생각된다.) 글들을 통해, 종교라는 것이(혹은 신이라는 것이)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본보기로서, 하나의 교훈으로서, 하나의 위로로서, 얼마든지 내게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매일 일정한 분량씩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지장보살의 가르침에 대한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지옥에 가서 함께 고통을 겪으며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지장보살님의 실천은, 고고한 신들의 허공에 뜬 말씀들 보다 얼마나 멋진가!) 물론 아직 많은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종교마저 ‘아는 만큼 믿는’ 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황빠들이 그들의 신에게 그러하듯)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워낙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던지라, 내가 즐겨 찾는 사이트의 운영자이신 '학생 겸 선생'님의 짧은 추천의 글을 읽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문하게 되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핵심을 잡지 못하고 파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터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 이하였다. '일단 믿으면 구원이 찾아오리니'라는 가르침도 설득력이 없었고,(아, 이 여전히 믿음이 없는 가여운 자의 구원받지 못할 얼어붙은 마음이여!)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 누구의? 하느님의? 작가의? -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실소마저 튀어나왔다. 물론, '믿음과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소득이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인자하고, 쿨하고,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말씀 잘 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듯한 기분(뒤에서는 교세의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아니면 고통 받는 민중을 위해 마음속의 예수님을 실천하고 계신지 도무지 알 수 없는)을 느꼈을 뿐인 것이다. 전직 부르주아의 예수(지금은 어떠할는지. 법정스님의 인세보다 많이 버셨을라나?)는, 독실한 신자 부시가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서나, 혹은 일찍이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아프리카나 아랍, 아시아의 민중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해진 폭력들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찬사 일색인 일련의 리뷰를 보아하니, 누군가가 이 리뷰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타 종교인의 악의적인 비난'이라고.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지금 당당히 내 마음속의 예수님과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부처처럼 내면을 가꾸고 예수처럼 세상과 싸워, 극락천국에 가겠다. 라고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실천의 수준은 저열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말이다. 이것 역시 ‘믿음’이 부족해서 일까?)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니야, 라고 반문한다면, 그 기준은 누가 만들었지? 일요일마다 반드시 교회에 가야 한다고 강요한 바리새인?, 이라고 되물어 주겠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안고 오늘 날 부활하신다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반전집회를 열고, 미국의 제국주의에 비정치적인 형태로(그럼으로써 가장 정치적이고 기득권 세력이 위협이 되는 형태로) 대항하셨을 것이라고, 또한 불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상관없이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이라면 '나만을 믿어라'라는 강요 없이 은총을 내려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략 이천년 전에 그러하였듯이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