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언제부터인가 '세계명작'을 즐겨 읽지 않게 되었다. 잘된 번역과 못된 번역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에 구입했던, 깨알만한 글씨가 압박이었던 소담출판사의 책들은 어느 샌가 책꽂이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민음사나 범우사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 단테를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여전하지만, 예전처럼 더 이상 다급하지는 않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고뇌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눈길이 더 많이 가게 되는 내 취향과 관심사의 문제이자, 근래 갖게 된 문학작품의 번역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인 의심 때문인데, 이것은 더듬더듬 원서를 읽는 정도의 영어실력으로 지나친 의역이나 오역의 문제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언어를 바탕으로 작가와 얼마간의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고서 과연 문학작품의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몇 년 유학한 미국인 한국어학자가 번역한 박민규의 단편을 읽은 미국인들이, 박민규와 같은(혹은 유사한) 시대를 보낸 한국의 2,30대들과 비슷한 감상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마찬가지로, '토니오 크뢰거'가 다른 독일어 이름보다 '어색하게' 들리려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독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가 넘는 이 단편집을 손에 쥐고 하루에 한두 편씩 읽기 시작한 것은, 내 무의식에 남아있는 몇몇 그의 작품의 제목들에 대한(예컨대, [토니오 크뢰거]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처럼) 알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며, 또한 예술가적인 기질과 시민적인 기질 간의 분열이 인생의 주제였던 그가, 파시즘을 거치며 정치적인 인간으로 변해가는 (언제나)흥미로운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이고, 좀 더 직접적으로는 근래 두 달째 읽고 있는 [사로잡힌 영혼]에서 라니츠키가 그를 독일을 대표하는 두 이름 중의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나머지 한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한 문화의 절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꽤나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노벨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보통 그러하듯, 결코 쉽거나 즐겁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분열과 그것을 다루는 그의 지성을 읽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분열은 대체로 자서전으로 보이는 [토니오 크뢰거]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잘 드러나 있는데,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106p)와 같은 진지한 문장도 있지만, 한편에는 "나는 인간적인 것에 동참하지 못하면서 인간적인 것을 표현해 내느라고 가끔 죽도록 피곤하단 말입니다."(46p)와 같이 재밌는, 혹은 "이 사랑을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선량하고 생산적인 사랑이랍니다."(108p)와 같은 순수한(!) 문장도 있다. 또한 "소박한 결혼반지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그녀의 아름답고 창백한 손은 직물로 짜서 무거워 보이는 어두운 색 치마의 무릎 주름 속에 편안히 놓여 있었다."(353p)로 시작해 한 페이지 넘게 이어지는 [트리스탄]의 묘사처럼 대체로 그의 문장은 발자크의 작품들만큼이나 화려했지만, 결코 어지럽지는 않았다.(역시!) 덧붙여 큰 감동은 없었지만, 1930년에 발표된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다룬 [마리오와 마술사]도 현실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마술적인 느낌의 문학으로서, 비교적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서, ‘따스하지만 엄격한 화려함’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격조 높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만의 정신과 마주하는 동안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토니오 크뢰거]부터 시작하여,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어릿광대]에서 선명해지는 그가 가진 어떠한 패배감(혹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컨대, 고귀한 지성이 때때로 세속적 아름다움의 앞에서 순식간에 그 빛을 잃고 마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인데, 과거 끊임없이 감탄하며 읽은 어떤 혁명가의 치열한 이론보다, 몸이 기억하는 듯한 오래 전 이성과의 짧은 육체적 접촉의 추억이 더욱 강렬하게 지금 내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혹은 연예계의 저속함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소유한 이들도, 자신의 앞에 등장한 멋진 이성/동성 배우에게 향하는 자신의 선망과 동경의 눈빛을 돌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처럼,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혹은 토마스 만 자신의) 완성된 고귀한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정신이 어떠한 세속적 대상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나는 무척이나 즐겁게 공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감히' 토마스 만의 작품을 읽으며, '이 녀석, 나와 같은 종류의 열등감이 장난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낄낄대었던 것이다. 물론 토마스 만은 지성적으로 대가이듯, 열등감과 그것의 표현에도 대가이고, 나는 그저 '키 작은 프리데만’일 뿐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지금껏 아마도 나만 몰랐던 사실을 이 리뷰를 거의 작성해가는 시점에서야 알게 되었다. 유언에 따라 뒤늦게 발간된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동성애와 상업적 허리우드 영화에 대한 취향 등이 밝혀지면서, 그의 근엄한 지식인, 아버지, 시민의 이미지가 상당부분 깨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래, 역시 그랬군. 하였다.
전쟁 중 망명 지식인들의 조직화 문제(즉 지식인의 참여 문제)와 전후 독일의 책임을 둘러싸고 토마스 만과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증오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세부적인 사항은 차치하고, 둘 간의 어떠한 명백한 대조를 볼 수 있는데 - 격변기의 치열한 참여주의의 경향과, 개인주의적이고 귀족적인 성향 간의 대조를 - 나의 이성은 브레히트를 지지하되, 나의 감성은 만을 지지하니, 나에게도 토마스 만 못하지 않은 분열이 있는 셈인데, 문제는 항상 그거다. 어쨌거나 나는 [토니오 크뢰거] 같은 작품을 쓸만한 능력이나 재능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질투는 나의 힘이라, 말할 수밖에.
못된(?) 생각이지만, 그의 일기가 너무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