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년에 한글날 기념 버튼을 만들었답니다. 사진기가 학교에 있어서 지금 올리지는 못 하겠네요 ^^ (집에서는 여러번 찍었는데, 알라딘에는 안 올렸습니다. 내일 학교에 가면 당장 사진 찍어서 올려야지.) 보시면 아시겠지만, 작년에 만든 버튼의 핵심 주장은 " 'thank you'가 아니라 '고맙습니다'입니다." 였습니다. 올해도 한글날이 되기 전에 버튼 만들어야지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러가 버렸네요. 한글날은 다가오는데... 큰일났습니다. 어쩌지요?

 

그래서 알라디너의 도움을 구합니다.

1. 한글날을 기념해서 사용할 버튼에 들어갈 배경 그림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도 좋고, 단순한 삽화도 좋습니다. 컬러 사진(그림)도 좋고, 흑백 사진도 괜찮습니다.

2. 이번 한글날 기념버튼에 들어갈 주요 '카피'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라디너의 작은(?) 관심이 우리 학교 아이들을 아주 기쁘게 할 것입니다.

관심과 도움 주시는 모든 분들께 미리 고마운 마음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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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9-3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어렵습니다;;;;

비발~* 2004-09-30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렵네요. 화이링 대신에 아자!라고 할까나..?^^

조선인 2004-09-3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malteo.net/
이렇게 바꿨어요~를 참고해보시면 어떨런지?
 

- 이 글은 우리 학교에서 기간제 선생님으로 계셨던 OOO 선생님께 드린 메일입니다. 메일함을 정리하면서 지우려다 보니, 그 글마저 지우면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질까봐 알리딘으로 옮겨와 남겨 둡니다.

 

   정말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사람이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더군다나 같이 보면서 일하는 일이 보통 연이 아닌데 말씀이지요. 더불어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방금 공부방에서 다녀와 하루를 이제 정리하려고 합니다. 변명 같지만 학교 상황이 이렇게 어이 없는-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경우가 반복되지 않았다면 동료 교사들간의 서먹함도 훨씬 덜 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저의 유쾌하고 신나는 학교생활을 좀 더 많이 보실 수 있었을텐데, 계시는 동안 즐겁게 지내다 가실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마음 속에 큰 짐을 지고 사신다는 거 알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꼭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의 마음이 굳다면 꼭 발령을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과 더불어 크려고 노력하는 일이 무척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처럼 서로가 꽉 막힌 관계로 살아갈 때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당부처럼 늘 아이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는 '교사'로 살아가도록 더 분발하겠습니다.

   편견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성원 보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시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생각나실 때 한 번, 안부 전해주세요.

   "하느님께서는 저희를 시험에 들게 하시고, 저희들 눈물 짓게 하시지만, 오늘 우리가 흘리는 그 눈물로 우리들의 영혼은 조금 더 맑아지고, 우리 생각은 조금 더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드립니다.

 

2004년 7월 10일, 느티나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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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눈물
슬라보미르 라비치 지음, 박민규 옮김 / 지호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도 우리 나라 땅을 내 두 발로 조금은 걸어다닌 적이 있었던지라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해서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걸어다닐 때는 이름을 얻지 못한 길가의 꽃들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시골마을의 한적한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징하게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길, 숨이 턱턱 막히는 아스팔트 그 길을 걸으면서 가야할 길만 생각하며 걸어다녔던 그 기억. 서너 번의 그 도보여행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도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가 누군가의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되새김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걷는 길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그 길이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최악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라면? 그 길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동료들이 죽기도 한다면? 늘 먹을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굶어 죽기도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걷는 기한이 단 며칠이 아니라 그 끝을 알 수 없다면? 이런 절망적인 여러 가지 질문에도 모두 '좋다'라며 길을 떠난 일곱 사람이 있었다. 길을 '떠났다'라기보다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게 더 상황에 맞는 설명일 것이다.

   폴란드 기병 중위였던 슬라보미르 라비치는 1941년 러시아 군에 의해 붙잡혀, 러시아 법원에 의해 '간첩죄'와 '적대행위' 혐의로 시베리아 강제노역 25년형을 선고받고, 북극권 근처의 303수용소로 이송된다. 라비치가 재판을 받기 전까지의 상황은 서준식의 '옥중서한'에서 읽은 장면과 비슷하기도 하고, 김동원 감독의 '송환'이라는 영화의 장면과 자꾸 겹쳐져서 읽는 내내 괴로웠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쿠까지 이송되는 기간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은 또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연해주에 살았던 고려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르쿠츠크가 끝이 아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서 레나 강의 북쪽에 있는 303수용소에 도착하는 길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추위와 맞서 싸우며 걸어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다. 그렇게 걸어간 기간이 무려 두 달이었다. 재판 전 고문을 당하면서 오직 살아 있는 것, 살아서 자유를 찾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이유였던 라비치는 험난한 이송 과정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고, 수용소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오스탸크인(일종의 에스키모인들)을 통해서 '수용소 탈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수용소에서 '체력'을 회복한 라비치는 탈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함께 탈출한 여섯 명의 동지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라비치가 탈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라디오 고치는 것 때문에 알게 된 '수용소의 소장 부인'이었다. 수용소 소장 부인의 도움으로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겨울밤, 라비치를 포함한 일곱 명은 303 수용소를 손쉽게 탈출했다. 그리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질주. 일곱 명은 추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용소에서 가급적 멀리 달아나야만 했고, 쫓는 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은밀히 숨어다녀야 했다. 

   수용소 부근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일곱 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극한의 생존 상황에서도 남의 물건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인도'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몽골의 국경을 넘어 내려가서 맞닥뜨린 내몽골의 고비사막과 티베트를 지나 인도로 넘어가기 전에 만나 히말라야 산맥은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에게는 최대의 '고비'였다.

   고비사막은 사막에 들어가는 줄로 모르고 들어선 탓에 더위와 굶주림으로 함께 탈출한 동료들을 잃으며 절망하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쓰러지기 직전에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뱀'까지 잡아먹으며 먹을 것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마지막까지 포기하기 않고 걸었기 때문에 결국 고비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과정도 감동적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몹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산맥을 넘어 내려오다가는 지금까지 함께 했던 동료, '팔루호비치'를 잃게 되었다. 라비치는 그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랫동안 주위를 서성거렸다. 참변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팔루호비치는 이제 없는 것이다. 그가 죽을 거라고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강인하고 헌신적이었던 팔루호비치 상사는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결국 이렇게,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죽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스미스 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죽음에 상심했다. 일행 중에서 나이가 많던 둘의 우정은 남달랐다."

   팔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로 그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처음 탈출할 때부터 가고 싶어했던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만난 영국군을 통해 이들의 기나긴 탈출 행적이 알려지고, 드디어 살아남은 네 명은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탈출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로 한 달 동안이나 혼수 상태를 겪기도 한다.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누구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라비치가 탈출하자고 제안했을 때 라비치와 친했던 그레히넨은 '눈과 추위 때문에 어디든 가기 전에 얼어죽을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했고, 라비치가 청년들에게 농담처럼 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부들부들 떨며 달아나 버렸던' 이 무모한 계획은 무엇을 위해 시작되었을까? 나는 라비치에게 , 어리석겠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라비치 당신은, 고비 사막과 히말라야 산맥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고 해도 '자유'를 찾아 탈출하겠느냐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직접적인 신체의 자유를 제한 당한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이 자유에 대한 가치가 극한적 상황을 뚫고, 목숨을 걸만한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내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누리는 자유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 온 누군가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라비치와 그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자유를 찾아 극한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진정한 인간 의지의 무한함을 보여준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진 이야기'라는 역설적인 부제가 달린 이 고통스러운 실제 이야기는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책도 그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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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한 주가 어떻게 갔나 싶을 정도로 정말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난주 토/일요일은 짧은 여행을 다녀왔고, 월요일부터는 강행군이었다. 수업이 무척 빡빡한 월요일. 수업이 끝나고 나면 거의 쓰러진다. 더군다나 저녁시간에는 도서관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니... 쌓인 스트레스를 도서실에서 노래부르는 것으로 푼다. 누가 있든 없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나면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다.

   8시부터는 토론대회 준비 모임이었다. 잠깐 참여해서 정리만 해 준다는 것이 한 시간을 넘기고 10시를 넘겼다. 내가 마음이 좀 조급했던 이유는 시험문제 출제 때문이었다. 마감일은 화요일인데 월요일 저녁까지 별로 정리를 못 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문제낼 자료를 안고 집으로 갔다. 몇 문제 만들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후딱 갔다.

   화요일은 토론대회 준비로 몹시 바빴다. 음료수도 좀 사고, 사회를 보려면 나름대로 자료 정리도 해야 했고, 토론회 평가서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니, 일과 중에는 도저히 시험문제를 마무리지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화요일 저녁은 공부방에 가는 날. 수녀님께 전화를 드렸다가 수업이 바꾸어지지 않아서 결국 공부방에도 올라갔다. 집에 와서 문제를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역시 시간이 부족했다.(시험문제가 잘 안 내어지면, 차라리 내가 문제를 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충 문제는 다 내었으나, 편집과 검토 작업이 남았다.

   수요일은 오후에 수업이 연속해서 4시간 들었다. 짬짬이 문제를 검토하고 편집을 했으나, 아무래도 부족했다. 그래서 일과 중에는 시험문제를 담당선생님께 넘기지 못했다. 저녁에는 논어 공부를 하는 날이었다. 그 와중에도 1시간을 빼서 논어 9장 '자한'편을 읽은 게 신기하다. 점심을 먹고 늦은 시간에 시작한 논어 공부. 9시 30분쯤에 공부가 끝났다. 선생님들은 돌아가시고, 나는 학교에 남아서 마지막 편집 작업과 검토를 했다. 그러니까 또 두 시간이 금방 갔다. 저녁 11시 30분. 교무실을 나서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목요일. 모의고사 치는 날. 사설 모의고사라 찜찜하기만 한데, 그래도 몸은 좀 편하다. 같은 과목을 수업하시는 다른 선생님들께 문제를 넘기고 도장을 찍었다. 이것으로 올해에 내는 시험문제는 끝났다. 3학년 기말고사는 입시 탓으로 이렇게 파행적으로 운영된다. 시험이 끝나고 도서실에 앉아 있으니, 3학년의 OO이가 놀러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을 사달라고 했다. 모의고사 치고 힘이 없는 것 같아서 다른 녀석들이랑 라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선생님들에게 내가 읽은 좋은 글을 메일로 보냈다. 그것도 수백명에게 보내려고 하니 금방 되는 일은 아니었는데, 새로운 방법을 개발해서 얼마 걸리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는 바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가, 자정 무렵에 다시 깨서 책을 읽었다.

   금요일은 학급운영모임이 있는 날이다. 6시부터 모인 선생님들과 학교에서 일어난 온갖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매점상품권과 야자자유권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흡연문제, 쪽지 상담하기, 체육대회와 떡볶이 만들어 먹은 이야기, 소풍 장소에 대한 고민, 왕따 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정말 온가지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대안을 고민하는 자리라 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가버린다. 다만, 나는 내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늘 아쉽다. (올해는 담임이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두 시간의 수업이 있는 날이다. 수업을 하고 내려와서 방과 후에 도서관에 잠깐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지능이 약간 모자라는 OO이(3학년)도 놀러 오고, 토론대회 최우수 학생인 OO이(1학년)도 도서실에 놀러 왔다. 내가 지능이 모자라는 OO이와 주로 이야기를 하면 그걸 OO이가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배도 고프고, 공부방에도 가야할 시간이라서 셋이서 같이 나왔다. 오늘은 공부방 교사모임이 있는 날인데, 생각보다 선생님들의 적게 오셨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도 잠이 와서 몇 마디 하지도 못했다. 소풍 계획과 교사 M.T 계획이 있었는데, 머리가 좀 멍해서 생각이 퍼뜩 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마음 놓고 잤더니, 종점에서 종점까지 와 버렸다. (하기야 그 버스의 종점에서 내려도 아직 우리집에 다 온 것이 아니다.) 집에 오는 방향과 약간 어긋난 아파트 단지 속에 종점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택시를 탔다. 집에 와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뒹굴거린다. 몇 명의 아이들에게서 문자메세지가 왔고, 준호랑 배즙 때문에 통화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 부탁도 했다.히히히, 승리는 나의 것!)

   내일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못 갔던 벌초를 간다고 하신다. 아마도 차가 막힐 것이기 때문에 일찍 출발하신다는데, 미리 자 두어야겠다. 바쁜 일과는 이번주로 끝나고 좀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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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6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9-26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 토론대회를 맡은 이유

   사실 토론대회 공문은 방학 전에 왔다는데, 나는 잘 몰랐다. 내 업무담당은 도서관 운영과 교과서 공급이기 때문에 토론대회 개최는 담당부서가 따로 있어서 아마 그리고 간 모양이다. 그러나 2학기가 시작되자 담당선생님께서 공문을 주시면서 나보고 행사를 맡아 달라고 하셨다. 굳이 딴사람의 일까지 떠맡아 가며 '착한 척'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내가 아주 관심 있는 '토론회'였기 때문에 한 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 토론대회의 준비 과정

   우선 토론대회에 참가할 희망자를 모으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는데, 학급 담임선생님들께 돌릴 안내문을 만들고, 학교장의 결재를 받았다. 각 학급에서 모인 토론자는 1,2학년을 합쳐 모두 11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개인적으로 찾아와 '토론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두 명의 학생이 더 있었다.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최고의 자질로 생각하는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토론의 주제는 이미 공문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공문에는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토론의 주제가 너무 도덕적인 답을 요구하는 편향된 경향이 있어서, 토론의 공정성과 토론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 '잘못된 법, 지켜야 하는가?'로 큰 주제를 잡았다.

   첫 번째 예비모임에서는 모두 모여서 잘못된 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에 생각을 물었다. 그러니까 여섯명과 일곱명으로 의견이 딱 갈렸다. (ㅋㅋ 극적이었다.) 그래서 서로 모여서 토론팀장을 뽑고, 의견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모임의 계획과 토론의 형식과 소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참고로 토론의 소주제는,

 - '잘못된 법'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떤 법이 '잘못된 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잘못된 법'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

 - '잘못된 법',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었다.

   두 번째 모임은 야간자율학습 한 시간을 활용해서 도서실에서 예비모임을 했다. 일단 토론의 형식은 교육방송에서 하고 있는 '청소년 원탁토론'의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저번에 나눠 준 토론 안내 자료에 나와 있는 소주제에 대한 내부토론과 자료를 찾는 시간을 주었다. 1시간 정도는 토론준비를 하기에는 아주 부족한 시간이어서 아우성이었다.

  세 번째 모임은 토론 대회 전날 저녁 8시에 모였다. 이번에는 두 팀이 모여서 지금껏 준비한 자료와 토론의 쟁점에 대한 기본 입장을 서로 설명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토론 당일날 서로 딴 영역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팀의 주장을 정리하고, 자료를 찾는 시간을 두었다. 그 날은 비가 엄청 많이 내렸는데도,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이 돌아갈 줄 몰랐다. 겨우 10시 30분에야 도서실에서 아이들을 내보냈다.

  • 토론대회의 실제

   토론대회는 화요일 6,7교시. 며칠 전부터 도서실에 토론을 위한 좌석 배치를 해 두었고,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자리에 두었다. 6교시가 끝나니까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으나, 모두 모이는데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드디어 토론대회 시작! 사회는 내가 맡았고, 가벼운 인사와 기조 발제가 이어졌다. 그런데 토론자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들이 떨렸고, 억양도 약간 어색했다. 그러니까 생각도 굳어지는지 준비해 온 자료만 읽기에 바빴다. 그런데,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잘못된 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쟁점도 없어지고, 감정적인 문제로만 치닫다가 생각을 정리할 휴식 시간을 갖게 되었다.

   다시 한 번 토론자들에게 토론의 소주제에 따라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했고,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자기에게 유리한 영역에서만 토론하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해 두었다. 두 번째 소주제부터는 준비해 온 자료와 자기 생각을 적절히 소화시켜서 제법 토론이 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소주제에서는 한껏 토론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러나, 7교시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그러다보니, 결론도 흐지부지 되어버렸다.(아이들은 더 해 보자고, 아쉽다고 했지만 내가 수업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마칠 수 밖에 없었다.)

  • 토론대회 이후

   다음날 점심시간에 아이들에게서 평가서를 받았다. 평가서에는 자기 평가와 토론자 상호간의 평가, 그리고 토론회 자체에 대한 평가가 담겨 있다. 토론 평가서를 꼼꼼하게 읽고, 자기 평가와 상호 평가를 통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1학년의 OOO 학생을 최우수 토론자로 뽑았다. (이 학생은 10월 19일에 열리는 부산시토론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한다.) 토론회를 참관하러 온 아이들 세 명에게도 토론회 감상문을 한 번 써 보라고 했다. (참관한 학생 중에는 자기가 참가하지 못해서 무척 아쉬워하는 학생이 있었다. 토론회 감상문은 빨리 받아서 정리해 두어야겠다.)

   이것으로 열흘 동안 준비했던 토론회가 끝났다. 요즘도 토론회에 참가했던 그 아이들은 나에게 그 날의 토론회를 이야기한다. 무척 별난 경험이었던가 보다. 더불어 나도 아이들과 무엇인가를 만들어간다는 기쁨에 바빴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열정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언제든 토론대회의 주체는 내 몫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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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09-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정리의 황제... ^^ 이 글 읽으니 토론대회, 함 해보고 싶어지는걸요. ^^ (우리 학교는 이런 행사에는 무관심한 듯 잠잠~ 해요.) 그리고 토론대회 때 오고 갔던 아이들의 구체적인 발언, 주장들도 읽고 싶네요. 정리해주실? 샘은 늘 행복을 만들어가시는 것 같아요.

느티나무 2004-09-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캠코더로 찍기도 했는데... 보여줄 정도는 안 되는 것 같아요 ^^ 혹시 다음에 편집하게 되어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가려고 해도 일이 많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