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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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흔히, ‘OO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한다. 그 OO의 대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신의 온 관심이 그 OO이라는 것에만 집중되어 다른 주변의 상황이나 사물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할 때 쓴다. 만약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은 만약 ‘우리 모두가 눈이 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를 상상해 본 소설이다. 대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치고 있는 심각하면서도 예리한 주제도 흥미롭지만, 이 책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단문 위주의 문장과 쉼표와 마침표만 있는 문장부호 등이 있어 책을 읽는 것 자체도 만만치 않은 즐거움과 호기심이 생긴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한 좋은 리뷰를 썼기 때문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가 조금 더 보태고 싶은 부분만 기록하고 싶다.


1. 빛나는 아포리즘의 보고(寶庫)

   이 소설의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아포리즘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만약에 책에 처음부터 밑줄을 치기 시작했다면 이 책을 다 읽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꼼꼼하게 표시를 해 가면서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다. 


-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있을 것이고.

-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2. 인간다움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

   이 글을 통해서 볼 때 인간다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 행동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눈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이런 게 바로 ‘자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 안의 이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도록 나를 설득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며, 때로는 다그치기도 한다. 결국  이 사람은 내 마음 속에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가 있어야 활동을 시작하는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이다. 언제나 나의 행동을 보고 있다는 가정 안에서 나의 행동을 따라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질이다.

   이 책에서 가정하고 있는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인간이 자기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눈이 멀어서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 번 가정해 보자. 내 마음 속의 나도 더 이상 나에게 더 이상 ‘인간다움’을 강요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머지않아 소설의 가상 상황이 현실의 공포로 변할 수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의 행동을 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 부끄러움을 잃어버린다. 이는 곧 인간다움의 상실이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인간’은 점차 절도, 폭력, 강간, 살인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되며, 그 가운데에서도 폭력에 기반을 둔 권력이 생겨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에 무기력하게 당하거나 굴종하게 된다.

   이제 문제는 결론이 비관적이냐 희망적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이 지금의 현실 상황에 비춰 보아서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3. 우리는 이미 눈이 먼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리뷰를 읽으며 모두가 탁월한 지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도 우리는 이미 '눈이 멀었다'는 자각은 이 책의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기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눈이 먼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을 가져볼 때, 과연 우리의 어떤 상황을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인가에 대한 성찰은 좀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사람들이 자기 문제이기도 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두고 생각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눈이 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심이 있는 기사들은 어쩌다 포털사이트의 댓글까지 읽어 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식 수준이 점차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거린다. 시민들의 합법적인 시위나 노조의 합법적인 파업 등과 같은 집단행동에 보이는 네티즌들의 과격한(?) 반응은 그들이 과격하다고 욕하는 행동보다 훨씬 더 과격한 수준이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 나의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에 제도화되고 정당화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한 나를 차별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옆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차별’하는, 뻔히 보이는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는, 벌써 오래전에 눈이 멀었지만 아직 우리가 눈멀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독특한 문체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서 제기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는 주제 사라마구의 이 소설은 그 명성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소설이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눠 읽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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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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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도 아내랑 얘기를 했지만, 나는 알라딘의 서재를 통해서 좋은 책을 참 많이 알게 되었고, 그것을 늘 고맙게 생각한다. 만약 내가 서재를 몰랐다면 아마도 읽을 책이 바닥이 나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인데,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읽을 게 많아지는 게 책의 세계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그 여러 권의 책 중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들고 싶다. 나는 이 책은 지금껏 열 권 쯤 샀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말이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보낸 책은 이내 읽은 사람들의 기쁨과 깊은 감동을 담아서 나에게 메일로 되돌아왔다. 특히, 서른이 넘은 사람들에게서는 공치사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렇게 좋은 책을 알게 해 준데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도 받았다. (앞으로도 여전히 나의 책 선물 목록 제일 앞자리는 이 소설일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홀로 밭을 가는 노인 복귀의 기이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황당한 인생을 소개하는 이 소설이 우리네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회고의 말하기방식에 있는 것 같다. 복귀는 자기가 살아온 끔찍한 삶을 달관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소설의 패기가 없다고 평하기도 했지만, ‘인간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기’에 ‘패기가 없다’는 평가는 이 소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온 ‘삶의 오롯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에 견준다면 기꺼이 감수해도 될 만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에서 나오지 않은 삶의 희망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책에서 역사는 각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복귀라는 한 인물과 그 가족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복귀와 그의 가족들은 혼란스러운 중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복귀 가족의 삶은 멀리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약진 운동과 59년 대기근, 문화대혁명 등,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겐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이다. 또한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다.

 

   복귀의 가족은 혼란스러운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차례차례 죽게 되는데, 대부분의 죽음이 인물의 성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복귀의 가족들이 살아가야만 했던 당대의 현실 때문이었다.

   대변을 보다 죽게 되는 아버지, 국공 내전에 끌려갔다 와보니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복귀와 함께 죽을 고생만 하다가 죽게 되는 아내 가진, 헌혈을 하려다가 의사의 실수로 너무 많은 피를 뽑아버려 죽게 된 아들 유경, 이희와 결혼해 아이를 낳다가 죽은 귀머거리 딸 봉하, 공사장에서 일하다 콘크리트 틈새에 끼여 죽게 되는 편두 사위 이희, 시름시름 앓다 삶은 콩을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은 손자 고근……. 이들이 차례로 복귀의 곁을 떠났고 복귀는 결국 소 한 마리와 노년을 보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이런 인생도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아도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작가 자신은 이런 말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해 두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도 작가의 질문을 씹어본다. 우리도 가끔은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늘 오늘의 고통스러운 삶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줄 밑거름이 되리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결국엔 현재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이 지나가고 나면 이 고통 속에서 피어난 그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화의 소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보건데, 우리가 눈물을 보태며 고통스러운 강을 건너더라도 그 강 건너엔 우리가 기대한 그 무엇도 없을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네 삶은 비루한 것인가? 희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희망이 없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삶이 비루하다는 데는 대체로 수긍한다. 그러면 그런 비루한 삶은 왜 살아야 하느냐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살지 않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사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한 번이라도 책을 읽고 울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죽은 아들 유경이의 무덤을 찾아가는 복귀와 가진, 아들의 무덤 앞에 엎드린 가진의 모습을 읽을 때에는 책 읽는 걸 한참이나 멈추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또 하나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마음이 아릿하게 느껴진 이유는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의 삶은 최근까지 우리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태도와 많은 부분이 겹쳐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초인적인 인내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폭력을 견디며 근근이 살아온 우리 조상들-결국 나의 부모님이 아니시겠는가-의 삶이 겹쳐져서 더욱 가슴이 찡했다.


   리뷰랍시고 대충이라도 쓰고 보니, 이 책의 리뷰만큼은 이렇게 써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씨가 감은사를 보고 말한 것처럼 쓰면 소설에 누가 되지 않는 리뷰가 될까? 리뷰의 처음부터 끝까지 - 아! 위대하도다, 살아간다는 것이여! 아! 위대하도다, 살아간다는 것이여! 아! 위대하도다…… 

 

   자, 현재 삶의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살아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이 책으로 밤을 지새우며 살아간다는 것의 위대함을 음미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

 

* 1년 전에 읽었던 책의 리뷰도 이렇게 써지는 걸 보니 스스로도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이 책의 리뷰를 쓰지 않고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점을 한 번 더 언급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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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8-1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죠..위화 작가의 글솜씨는..정말 너무나 탁월하구요..

느티나무 2005-08-1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였다는 말 밖에 더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요? ㅎㅎ

심상이최고야 2005-08-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셤 공부 하다가 갑자기 이주의 마이리뷰가 궁금해서 와 보니 이렇게 기쁜 소식이 있다니!! ㅋㅋ
축하드려요^^

해콩 2005-08-22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허삼관매혈기]도 디게 좋더만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리뷰 당첨은 당연한 결과인듯.. 샘의 소개로 알라딘에서 산 책이 얼마야~~

느티나무 2005-08-27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상이 최고야님, 덕분이지요 ^^ 응원의 도움이 컸답니다.

느티나무 2005-08-27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맞아요. 허삼관 매혈기도 좋지요. 좋은 책 소개라니요? 알라딘에서 산 책, 정말 많지요? 저도 그래요. 그래도 멈춰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요? 어쩌죠?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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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까지 내가 읽어 본 외국소설이라고는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이 읽으면서 감동했다는 말에 솔깃한 ‘데미안’ 정도였다. 그런데 다 읽고도 그 소설이 감동적이라는 말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이후 ‘호밀밭의 파수꾼’과 ‘위대한 개츠비’에도 손이 갔지만 그리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아무튼 나에게는, 배경을 잘 알 수 없는 외국소설은 친구가 맛있다고 권하는 낯선 음식을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면서 계속 먹어야하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이다.


   지금에야 고백하건데, 나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은 소설책이 아니라 문학이론서나 두꺼운 사회과학 서적인 줄 알았다. 내가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책의 제목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처음 오만과 편견이라는 말을 들었던 건, 1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지만, ‘너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영화에서 바지 입은 여자로 나온 정선경 씨가 비빔밥을 다 먹고 그 그릇에다 물을 부어 마시면서 하는 대사 중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을 보면…’ 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때 오만과 편견이라는 단어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결국 며칠 전에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귀족 가문을 배경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한 남자-손꼽힐 만큼 많은 재산과 뛰어난 지적 능력, 알고 보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다아시 씨와 평범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재기발랄하며 똑똑하고 재치가 넘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엘리자베스 베넷 양의 사랑이야기가 주요 내용이다.

   다아시 씨는 앞에서 말한 모든 장점도 있지만 ‘오만’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주변의 천박한(?) 인물들-특히,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상업을 하는 친척들- 때문에 사랑을 망설이고 있으며 또, 그래서 쉽게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지 못한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 씨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면서 그의 오만한 듯한 모습과 다른 사람의 잘못된 평가만을 믿고, 다아시 씨가 성격적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둘은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게 된다. 다아시 씨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천박하다고 생각했던 엘리자베스의 가족을 이해하려고 하고 자신의 오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총명함 뒤에 있던 다아시 씨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애쓰면서 둘의 사랑은 완성된다.


   흥미로운 사건들이 이어져서 지루하지 않고, 젊은 여자들의 심리 묘사도 탁월했고, 전부 다 느낀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 가득 찬 유머와 풍자 등도 책을 읽는데 즐거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이 소설에서 결혼과 연애에 대한 엘리자베스-아마도 제인 오스틴의 생각이 투영된-의 생각이 나타난 부분이 재미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모두 네 쌍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자기(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후 사흘 만에 자기의 친구에게 청혼을 한 콜린스 씨와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성사된 샬롯의 결혼에 대해서는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요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샬롯)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이제 마침내 그 예방책을 손에 넣은 것이니 스물일곱의 나이에 한 번도 예뻐 본 적이 없는 여자로서는, 이번만큼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177쪽)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181쪽)


   콜린스 씨가 사흘 동안에 두 사람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건 샬럿이 실제로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샬럿의 견해가 자기와 꼭 같지만은 않다는 건 그녀도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녀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더 중요한 다른 것들을 희생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콜린스 씨의 아내인 샬럿, 정말로 창피스러운 그림이었다! 그리고 친구가 창피스러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도 가슴이 아팠지만, 마음을 더 무겁게 한 건 샬럿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운명 속에서 웬만큼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181쪽)


   엘리자베스는 그 두 사람이 애정 없이, 조건에 따라 선택한 결혼이기에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내리고 있다. 리지는 콜린스 씨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는데, 그에게는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애정 없는 결혼도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리지는 회의적이다.


   두 번째는 한 때 리지도 호감을 가졌던 민병대의 장교, 위컴과 그를 따라 다른 지방의 친척집으로 갔다가 결국 위컴과 함께 가출하여 베넷 집안을 근심과 걱정 속에 몰아넣었던 동생 라디아와의 결혼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인데, 위컴이라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고, 리디아는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도 없을뿐더러 사랑에 눈이 멀어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가문의 허락 없는 결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의 망신을 막기 위해서 그나마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결혼 생활도 리지가 보기에는 행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생활이 된다.


   “정말 결혼을 하게 되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이따위 일에 우리가 감사해야 하니 말이야. 행복할 가망이 거의 없는데도 결혼해야 하고, 남자의 성격이 형편없는데도 우린 기뻐해야 한다는 거지! 에이, 리디아 계집애!”(417쪽)

   불쌍한 리디아의 처지는 그야말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비록 앞을 내다보면 당연히 동생에게서 정상적인 행복도 세속적인 번영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만, 단 두 시간 전에 자신들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돌이켜보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된 것이 어디냐고 감지덕지하는 기분이었다. (421쪽)

   반대로 이어지는 두 번의 결혼은 여러 번의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만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먼저 옆집에 살았던 빙리 씨와 천사 같은 리지의 언니 제인과의 결혼은 두 사람이 현실적인 근거에 기반을 둔 사랑을 하고 있고, 두 사람의 성품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사랑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한 그의 온갖 기대가 튼튼하고  현실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인의 탁월한 이해심, 탁월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성품, 그리고 그녀와 빙리 사이의 감정과 취향이 전반적으로 비슷하다는 점 등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76쪽)


   나머지 한 번의 결혼은 엘리자베스 자신과 다아시 씨와의 결혼인데, 이 둘의 결혼은 나무랄 데 없이 이상적이고 훌륭한 것이라 더 이상의 설명을 불필요한 듯하다.


   애정 없이 조건을 보고 결혼하는 현실파나 애정에만 목을 매는 낭만파 모두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제인 오스틴. 현실에서의 제인 오스틴은 과연 ‘다아시’ 씨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일까? 샬럿이나 리디아와 같이 불행이 뻔히 보이는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편견’에 사로잡힌 느낌이지만 오스틴이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었다면 200년이나 더 지난 후, 그가 살았던 땅의 반대편에서까지 읽히는 이런 소설은 아마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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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8일(목요일)부터 30일(토요일)까지 공부방 캠프를 다녀왔다. 작년에는 전북 부안의 환경 학교에서 위탁 캠프를 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솔 교사로 편안하게 갔다 왔으나 올해는 공부방 식구들이 모두 준비해서 다녀온 캠프여서 여간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역시 애쓴 만큼 재밌고 의미 있는 일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평화'에 대해서 한 번 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모둠별로  참 알뜰하게 준비해서 재미나게 놀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기 전에는 호우주의보를 예상해서 여간 걱정한 것이 아니었으나 참 놀기에 적당한 날씨여서 오히려 더 고마웠다.

  우리가 머물렀던 곳은 양산 통도사 부근의 콜핑 하우스였는데, 독일인 사제인 콜핑 신부의 지도 이념에 따라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콜핑 협회에서 즐거운 삶을 통한 건전한 여가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깨끗하고 자유스러워서 우리들이 편안하게 2박 3일을 지낼 수 있었다.

 


콜핑하우스 전경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스스로 그 세상을 만들라."

콜핑 사제의 어록 중에서


 


 

                                                             콜핑 협회의 깃발

 


   첫날은 오전에 도착해서 짐정리를 하고 난 후 모둠별로 점심을 준비해서 먹었다. 수 년 동안의 캠프를 통해 이런 활동은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서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아이들과 모둠 선생님들께서 식사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곰돌이모둠의 식사 준비

 

 


 

                                                         뭉게구름 모둠의 식사 준비

   첫 번째 활동은 ‘친구 알아가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둘이 맺어진 짝지끼리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질문과 답을 통해 친구의 다른 모습을 이해하는 활동이었다. 끝나고는 서로 둘러앉아 짝지와 나눈 이야기를 발표하고 서로에 대한 별칭도 지어주었다.

 


 

                                         친구 알아가기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샛별선생님

 

 

                                          

                                                '친구 알아가기' 활동 후 발표하기


   두 번째는 신나는 야외놀이라는 것이었는데, 바닥에 압정을 깔아놓고 눈을 가린 다음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길을 건너는 활동이었다. 눈을 가린 채 친구의 도움만으로 정해진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인데, 아이들이 무척 즐겁고 재미있어 했다.

 

 

                    

                                                                 바닥에 깔린 압정

   이후 저녁을 먹었고, 아이들이랑 친구랑 싸웠을 때 어떻게 화해할까?라는 주제로 꼴라주 활동을 했다. 특정한 상황을 설정해 두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모둠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서 그림으로 표현해 보는 작업인데, 미리 가지고 간 잡지로 모자이크도 하고, 오려붙이기를 통해 2절지의 한 면을 6컷의 그림으로 만들어냈다.

   이후 간단한 간식을 먹었고, 밤이 깊어지자 분위기를 좀 잡아서 아이들에게 ‘자기가 죽는다면 어떤 말을 남길까’하는 주제로 글쓰기를 하고 모의 ‘관’에 들어가는 체험을 해 보았다. 아이들이 무척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죽는다면 어떤 말을??-진지한 모습


   둘째 날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아침밥을 챙겨 먹은 다음 6시간 동안 영축산 산행을 했다.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산행을 시작하는 산이자, 1059미터의 영축산을 가장 어린 초등학교 1학년짜리 학생도 거뜬히 올랐다가 내려왔다. 오후에는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가 이어졌고, 저녁에는 캠프파이어를 겸한 놀이, 장기자랑 발표가 이어졌다. 특히, 모둠별 장기자랑 준비가 알차게 되어서 장기자랑 발표시간에 모두들 깜짝 놀라기도 하고, 즐거워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아기공룡 둘리로 아침체조를!!


 


                                                  영축산에서 바라본 시살등

 

                                                        


                                                     영축산에서 바라본 신불산

 



                                                 영축산 정상에 오른 곰돌이모둠

 

                                              영축산 정상에 오른 뭉게구름모둠



곰돌이모둠의 댄스 장기자랑


   셋째 날은 오전부터 물놀이를 신나게 하고, 점심까지 지어먹고 나서 캠프 평가와 설문을 쓰고 나서 짐정리를 했다. 우리가 썼던 시설물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서 봉고차를 타고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글로 남기면 아주 짧은 2박 3일의 일정이었지만 이 짧은 일정을 준비하고 실제로 집행하기 위해서 마음 졸이고, 애를 써 본 사람들은 아마 알 것이다. 이 짧은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얼마나 심리적인 부담감이 큰 것인지를 말이다. 나야 이번에는 그냥 스태프로 참여한 것이지만 현장에서 움직여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달픔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이번 여름 캠프가 사고 없이 모두들 행복하게 끝나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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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무현선생님의 글

  “꿇어.”

   영화에서 보아온 조직폭력배들의 세계는 분명히 아닌데 하루를 살다 보면 교무실 이곳 저곳에서 무릎을 꿇는 아이들을 참으로 많이도 만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저렇게 무릎도 꿇고 고개도 숙이고 앉아 있나 하고 넘겨다보면 아이들의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지각을 해서 꿇은 아이, 수업 태도가 나빠서 꿇은 아이…….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과연 아이들을 꿇어앉히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교사들끼리 말을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그저 ‘저건 아닌데’ 하는 생각만 하다가 얼마 전 회식 자리를 빌려 몇몇 선생님들께 문제 제기를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들은 이런 말을 한다.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무릎을 꿇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것도 하나의 교육이다.’

   ‘아이 스스로도 잘못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꿇어앉으라는 교사의 지시를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선생님은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정말로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무릎을 꿇을 만한 잘못은 어떤 것이며, 그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정한 기준인가? 그리고 잘못을 했으면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또 잘못을 뉘우치게 하려면 반드시 무릎을 꿇려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내 스스로의 답은 너그럽지 않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 잘못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정말로 뉘우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또 아이들 스스로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오히려 아이들이 무릎을 꿇는 행위에 대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면 무릎을 꿇게 하여 반성을 이끌어내려는 시도 역시 아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역시 내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일까?

   잘못을 했을 때는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를 바로잡아주는 것과 교무실 바닥에 아이를 꿇어앉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교사의 앞에 아이가 무릎을 꿇고 앉는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교사와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학생의 대화는 더 이상 인간 대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를 지닐 수 없다. 한 사람은 내려다보고, 한 사람은 우러러보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마음과 마음이 오갈 수 있겠는가.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제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로잡아주려고 한다 할지라도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데서 출발하는 교육은 결국 교사 중심의 편의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조금은 귀찮을지라도, 조금은 피곤할지라도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교무실 한쪽에 쌓여 있는 간이의자를 교무실 곳곳, 구석구석에 나누어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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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사과 2005-07-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님의 글을 읽다보면,저만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네요.느티나무님의 그런 순수한 마음이 왜 제게는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