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흔히, ‘OO에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한다. 그 OO의 대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신의 온 관심이 그 OO이라는 것에만 집중되어 다른 주변의 상황이나 사물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할 때 쓴다. 만약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은 만약 ‘우리 모두가 눈이 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를 상상해 본 소설이다. 대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치고 있는 심각하면서도 예리한 주제도 흥미롭지만, 이 책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단문 위주의 문장과 쉼표와 마침표만 있는 문장부호 등이 있어 책을 읽는 것 자체도 만만치 않은 즐거움과 호기심이 생긴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한 좋은 리뷰를 썼기 때문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가 조금 더 보태고 싶은 부분만 기록하고 싶다.


1. 빛나는 아포리즘의 보고(寶庫)

   이 소설의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아포리즘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만약에 책에 처음부터 밑줄을 치기 시작했다면 이 책을 다 읽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꼼꼼하게 표시를 해 가면서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다. 


-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있을 것이고.

-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2. 인간다움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

   이 글을 통해서 볼 때 인간다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 행동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눈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이런 게 바로 ‘자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 안의 이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도록 나를 설득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며, 때로는 다그치기도 한다. 결국  이 사람은 내 마음 속에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가 있어야 활동을 시작하는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이다. 언제나 나의 행동을 보고 있다는 가정 안에서 나의 행동을 따라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자질이다.

   이 책에서 가정하고 있는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인간이 자기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 모두가 눈이 멀어서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 번 가정해 보자. 내 마음 속의 나도 더 이상 나에게 더 이상 ‘인간다움’을 강요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머지않아 소설의 가상 상황이 현실의 공포로 변할 수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의 행동을 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 부끄러움을 잃어버린다. 이는 곧 인간다움의 상실이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인간’은 점차 절도, 폭력, 강간, 살인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되며, 그 가운데에서도 폭력에 기반을 둔 권력이 생겨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에 무기력하게 당하거나 굴종하게 된다.

   이제 문제는 결론이 비관적이냐 희망적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이 지금의 현실 상황에 비춰 보아서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다.


3. 우리는 이미 눈이 먼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리뷰를 읽으며 모두가 탁월한 지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도 우리는 이미 '눈이 멀었다'는 자각은 이 책의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기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눈이 먼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을 가져볼 때, 과연 우리의 어떤 상황을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인가에 대한 성찰은 좀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사람들이 자기 문제이기도 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두고 생각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눈이 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심이 있는 기사들은 어쩌다 포털사이트의 댓글까지 읽어 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식 수준이 점차 퇴보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거린다. 시민들의 합법적인 시위나 노조의 합법적인 파업 등과 같은 집단행동에 보이는 네티즌들의 과격한(?) 반응은 그들이 과격하다고 욕하는 행동보다 훨씬 더 과격한 수준이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지금 나의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에 제도화되고 정당화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한 나를 차별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옆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차별’하는, 뻔히 보이는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는, 벌써 오래전에 눈이 멀었지만 아직 우리가 눈멀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독특한 문체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서 제기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는 주제 사라마구의 이 소설은 그 명성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소설이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눠 읽고,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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