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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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내용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간혹 서평을 안 써두는 경우는 '읽었던 책이었던가? 읽으려고 관심만 두고 끝내 읽지 못했던 책이었던가?' 헷갈릴 때가 있다.  읽었던 책인지 아닌지 명확히 알고 책장에 꽂힌 모든 책의 내용이 또렷이 기억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용이 가물가물해서였을까?  이야기에 다시 막 빠져들어서였을까?  여하튼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의 내용이 실화를 기반으로 쓴 것이라니 더욱 감동적이었다.  정말 도모에 학교의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이 있을까?  어린아이의 잡담 같은 이야기를 4시간 동안 경청해주고 다른 학교와 교사가 '다루기 어려운 아이'로 낙인 찍은 아이를 이토록 품어줄 수 있는지 말이다.  토토는 개성 있는 아이었다.  고분고분 성인의 말을 그대로 따르길 바라는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였겠지만 이 아이는 천진난만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감정과 느낌들에 솔직할 뿐이었다.   

  그리고 토토는 여러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도모에 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을 지켜보는 것은 나 역시 참 즐거웠다.  토토를 믿어주는 선생님, 아이들이 주도하는 수업, 체험 위주의 활동들....  그리고 무엇보다 토토에게 "넌 사실은 아주 착한 아이란다" 하고 말해주는 인자한 교장 선생님.  이건 단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토토에게는 평생동안 가슴에 남는 따뜻한 말이 되었다. 

  도모에 학교를 오늘날의 학교로 보자면 대안학교와 흡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많지 않은 인원은 교사들로 하여금 아이들과 1:1 상호작용을 빈번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교는 여전히 한 명의 교사가 케어하기 힘들만큼 많은 아이들은 한 교실에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저학년이건, 고학년이건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보면 이런 환경이기에 획일화되고 소수가 무시되는 학급 분위기는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도모에 학교가 존재했던 시기는 굉장히 오래전이었다.  TV가 보급되기 전이었고 히틀러가 유대인을 핍박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오래전에 이처럼 현시대 교육이 지향해야 할 학교 모습과 교육과정을 수행하던 학교가 있었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학교의 환경과 여건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흥미로운 수업과 일과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학생 하나하나를 사랑해주고 섬겨주고 존중하는 교사 없이는 이 학교는 올바른 교육 현장이 되기 힘들다.  그런면에서 도모에 학교는 아주 훌륭한 학교였다.  정말 내 아이가 있다면 이런 학교에, 아니 이런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런 학교에서 점점 자라가며 장애를 가진 친구와도 편견 없이 우정을 나누고 서로 도울 줄 알며 발그스름한 볼에 생기 있는 눈동자를 가진 토토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우리가 문제아라고 보았던 그 아이는 '사실 정말 착한 아이'일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의 따스한 눈빛과 그 아이 자체를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겨줄 때 아이 역시 그런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어려서 모른다'는 것은 정말 거짓말이다.  아니, 도리어 어리기에 성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더욱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교사들은 내게 맡겨진 아이 하나하나를 존중하게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시작인 것이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수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것이 교사냐 학생이냐를 막론하고 진실한 마음 나눔부터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토토의 천진난만함과 순진무구함을 지켜보는 내내 흐뭇했고 교장 선생님의 자애로운 태도는 나를 더욱 감동시켰다.  나 역시 지금은 유치원을 쉬고 있지만, 다시 복귀하게 된다면 이 교장 선생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흉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로 인해 그 아이가 더욱 바르고 착하게 자라가게 되는 따스한 동화처럼 포근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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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아이 사이 우리들사이 시리즈 1
하임 기너트 외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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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다니고 있는 임산부교실 추천도서라 읽게 된 책이다.  몰랐는데 자녀교육서로는 꽤 유명한 책인 것 같았다.  이 책과 비슷한 책으로는 존 가트맨의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2007)>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에서는 주로 감정코칭에 대해 다루었고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는 대화기술과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었다.  그런데 대화에 있어 아이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접근법이 달랐을 뿐 비슷한 내용처럼 여겨졌던 책이다.   

  비단 부모와 아이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소통의 기본이 되는 대화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죽하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라는 우리 속담도 있다.  정말 말 한마디에 어떤 이가 곱게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말 한마디에 밉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인류만이 가진 보물이다.  이는 단지 소통수단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하고 그 문화와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적절하게 사용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대화의 기술과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룬 책이다.  

  우선 좋았던 점은 상황이나 주제에 따른 대화법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아쉬웠던 점은 책 속 대화들의 예가 현실적이지 않았다.  소위 말해 나쁜 예에서 그런 대화들이 많았는데 실례로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에미 애비도 없이 컸니?  씨는 못 속인다니까!", "도대체 왜 그래?  미친 거냐, 멍청한 거냐?  평생 그 꼬락서니를 면하지 못할 거야!"  따위들의 대화들이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자녀를 위한 대화의 나쁜 예이다.  나쁜 예라고 한들, 정말 자기 자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건 나쁜 예를 넘어 거의 저주가 담긴 망언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을 것이고 이보다 더한 말을 하는 부모 역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대상이 누군가 하는 것을 좀 더 염두에 두고 읽는 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예시들을 제시함으로 호흡을 같이 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읽는 이는 모르긴 몰라도 '자녀를 바람직하게 길러 내고 싶어하는 부모' 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래, 나도 이렇게 말 한 적이 있는 것 같아.  이래서는 안되는데....'하는 각성을 불러야 할 것이다.  반면 이 책이 자녀에게 학대를 일삼고 폭언을 하는 등 문제부모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고 그러한 부모들이 대상이 되리라 염두에 두고 집필한 책이라면 이러한 예시들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비유가 적절치 못하거나 상대로 인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조금 어긋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책 속 모든 대화들의 예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어머,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단 말이야?' 하는 기분이 시종일관 들었다는 대화의 나쁜 예로 들어 사용한 문장들이 지나치고 자극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외국어가 원문이던 글이 우리 말로 번역되면 생긴 문화적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게는 이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그리고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책에서 소개한 내용들은 '그래, 대화의 방법이 참 중요해.  자녀를 이해하고 상처주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이 '나도 당장에 실천해봐야겠어' 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끌어내기보다는 정적인 내면의 움직임을 꾀했기 때문인지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다 맞는 말이고 옳은 말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요'  어떻게 이러한 실천들을 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행동으로 실천으로 연결지어 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이 세계의 많은 부모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된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간의 책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지도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면 이 책은 아이를 위해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변화의 주체가 다르다.  변화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존의 자녀교육서와 달리 부모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했던 것 같다.  이것이 부모를 감동시키지 않았나 싶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빛과 포옹과 따뜻한 말이 거름이 되어 자란다.  부모와 아이 사이.  더욱 조심스럽고 다정한 존중이 꼭 필요할 것 같다.  내 아이에게 진실하게 사랑을 전하고 싶은 모든 부모를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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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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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심장을 쏴라>로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정유정의 신간이다.  <내 심장을 쏴라>는 읽어보지 못했는데 주변에서 이를 읽은 이마다 엄지손가락을 세우는지라 그녀의 신간인 <7년의 밤>부터 먼저 읽게 되었다.  (<내 심장을 쏴라>는 추후 읽을 작정이다.) 

  가볍지 않은 소설이었다.  엄중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음산했다.  참 몰입해서 읽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은 탓인지 이야기의 맛을 느끼며 집중할 수 있었다.  S시 세령읍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잔혹하고 처절하며 슬픈 이야기.  이 소설은 작가의 상상을 넘어 마치 이 공간이 실재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함께 수록된 S시 세령읍의 그림약도가 더욱 실감 나게 했다. 

  이야기를 여는 첫 문장 역시 범상찮았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어쩌면 이 문장은 이 소설의 핵이 아닐까 싶다.  최현수의 아들 서원, 또 어떤 아버지의 아들 영제, 영제의 딸 세령 또 어느 잠수부의 아들 승환.  심지어 죽임을 당한 어미 고양이의 살아남은 마지막 새끼였던 어니.  이들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놓여나지 못하는 가엾은 존재들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에 깊이 베인 자들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이유로 서로 끊지 못할 운명에 사슬에 메여버린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아버지를 교수대에 세우고 그 마루를 기어코 내려버려야 하는 이들이었다.         

  특히 '살인마' 라는 수식어를 단 아버지 최현수의 아들 서원의 삶을 보는 것은 참 힘겨웠다.  새삼 모든 범죄자의 가족들이 이렇게 처연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부정할 수 없는 피붙이기에.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인연이기에.  어린 서원이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삶이었다.  게다가 영원히 도려낼 수 없을 듯한 삶이었다.  이런 슬픈 삶은 비단 서원 뿐만 아니었다.  아버지의 손에 반죽임을 당하고 또 다른 이의 우발적인 사고로 완전하게 죽게 되는 세령.  피냄새가 나는 가녀리고 연약한 삶이었다.   

  서원과 세령만이 아니다.  그들의 엄마들 역시 가엾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제의 아내 하영, 현수의 아내 은주.  어찌보면 이 소설에서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살아가고 있었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한데 모인 이들의 삶은 차마 보기가 힘들었다.  증오와 미움 그리고 불신.  서로 쫓고 쫓기는 삶이었다.  마치 세령과 서원이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  한 발짝도 마음껏 내딛지 못하고 술래를 직시하며 조심히 옮겨야 하는 그 좁고 아찔한 보폭 같았다.  술래에게 최소한의 미동도 보여서는 안 되는 경직된 몸짓.  이렇게 날이 선 그들의 메마르고 거칠어진 감정의 교류들.  작은 불똥 하나로 홀랑 타버리고 말 것처럼 건조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저씨 '승환'의 소설 속에서 밝히 드러난다.  마치 추리소설 같기도 했다.  책장마다 비 냄새와 피 냄새, 그리고 짙은 호수의 비린내가 났다.  그런데도 한사코 눈을 뗄 수 없었다.  잔혹하고 슬펐다.  또 한순간의 파멸을 경험한 이후로 이들의 피폐한 삶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의 내면을 너무나도 선명하고 처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비극적인 7년의 밤을 간직한 한 마을의 이야기이자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상처 나고 아파지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세령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아빠'.  '아빠' 라는 이름은 이 모든 비가(悲歌)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마치 아버지라는 이름이 이들을 어떤 몽환적인 곳으로 데려가는 데자뷰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을 위한 슬픈 진혹곡이 끝이 났다.  이들의 구슬프고 처절한 삶이 마을이 잠겼던 7년 전 그날 밤처럼, 완전히 침수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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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런 점이 좋아요 마음을 전하는 작은 책 시리즈
호리카와 나미 글.그림, 박승희 옮김 / 인디고(글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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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사랑하는 남편의 생일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어젯밤 끓여 두었던 미역국을 데우고 밥과 반찬, 케익으로 생일상을 차리고 생일축하 카드와 함께 선물을 전했다.  선물은 들키지 않게 준비하려고(사용 중인 신용카드가 남편 명의로 되어 있어 긁으면 바로 남편 핸드폰으로 문자가 '삐릭' ^^;;) 언니 카드로 결제하고 대신 언니 통장으로 송금해서 구입하리만치 치밀하게(?) 준비했다.  요며칠 서울로 출장을 다녀 평소보다 출근 시간은 더 일찍었다.  이른 새벽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생일상을 준비하고 마주 앉았지만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할까 했는데 '오늘 일이 일찍 마친다면'이라는 가정하에 가정한 일이었다.  며칠내내 남편이 출장에다 퇴근이 늦었는데 오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남편과 저녁을 함께하지 못해 서운하기보다는 생일날조차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남편이 참 안쓰러웠다.  할 수 없이 혼자 미역국과 저녁을 먹고 책을 펼쳤다.   

  <당신의 이런 점이 좋아요>  정말 얇은 책이다.  앉아서 읽으면 10분이면 족히 읽을 만치 얇은 책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눈물이 송골송골 맺히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도 나와 남편의 이야기 같은지....  어쩌면 이렇게나 우리 사랑과 닮았는지.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의미조차 두지 않을 소소한 행동과 말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랑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작은 책 한 권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할 정도였다.  포근하고 소박한 느낌의 삽화들 역시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한 것 같다.      

  장황하지 않고 길지 않은 책이다.  오히려 단조롭고 간략하다.  그래서 더 이 책이 좋다.  '이래서 행복하고 이러해서 이것이 사랑이며....'  따위로 설교하지 않는다.  그냥 나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아,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저자인 호리카와 나미는 현재 그림책 작가로 활동 중이며 따뜻하고 감성적인 글과 그림이 담긴 그림책을 출간하고 있단다.  <또 다른 우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 <LOVELY DAYS>, <내 꽃이 피기를> 등이 있단다.  국내에 출간된 도서로는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 <또 다른 우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이 나를 깨울 때>가 있단다.  이 중에서는 일본에서와 달리 표제만 다르게 출간된 작품들이 있는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들도 몽땅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모조리 품절이구나;;)      

  이 책을 덮고 너무 후회가 됐다.  이 책은 오늘 아침 출근길 남편 손에 들려줬어야 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한 공간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고 있는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 따스하고 행복한 기분을 전해주었다면 자신의 생일을 맞는 아침이 더욱 사랑스러웠을텐데.  오늘 밤,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면 잠들기 전 읽어주는 것으로 대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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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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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이 인도 대륙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흘러도 그는 여전히 보석 같은 희대의 극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지?' 싶기도 했고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제목만 알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같이 드는 생각은 '내 독서는 왜 이리 고전을 외면하고 있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가만 생각해보니 난무하는 신간들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루가 다르게 맛있어 보이는 새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고 관심 있는 작가들의 신간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것들에 비해 고전에 대한 관심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다른 것은 제쳐놓고 고전만 읽어라'고 했을 정도로 고전에 대한 강조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고전은 학창시절에 더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교과서에 맛보기로 등장하는 글의 전문이 궁금했기도 했고 어린 시절 책장에 꽂힌 문학대전집덕인 것도 같다.  여하튼 결론은 '고전 읽기를 더욱 부지런히 해야겠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던가?'  그러나 나는 필시 이 책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생경했다.  그렇게 나는 단지 작품의 이름만을 알고 지내다 언젠가 한 번쯤 읽었을 거라는 착각을 부르는 <베니스의 상인>을 비로소 읽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의 언어유희가 일품이며 작가의 의도나 활용된 단어와 문맥을 외국어로 완벽히 전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고 하듯 정말 그랬다.  각주나 해석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물론 작품 배경에 대한 나의 무지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들이 결코 일상적이지 않았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서양판 사극 드라마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또 한 문장 한 문장이 기품있고 경박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면 다소 우스꽝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부분의 문장이 철학적이고 예술적이었다.   

  극본을 읽을 때는 꽤 집중해야 한다.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이미지인지를 머릿속에 그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등장하여 대사를 치고 빠지고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비슷하기라도 할 때는 더 헷갈리기 마련이다.  이 작품도 그랬다.  앤토니오, 설리어리오, 설라니오, 바싸니오, 로렌조, 그라쉬아노, 포오셔, 니리서, 샤일록, 란슬럿트, 리어나도, 제시커 등.  분명 다른 이름이지만 내게는 비슷해보였다.  작품에 익숙해지고 엉덩이를 깊숙이 넣어 앉은 관객이 되자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왔다.   

  이 작품은 참 인간군상의 모든 감정들이 녹아있다.  우정, 사랑, 신의, 지혜, 배신, 복수, 미움, 증오 등등.  앤토니오와 바싸니오의 우정과 앤토니오에 대한 샤일록의 복수심, 포오셔의 지혜, 바싸니오와 포오셔의 사랑, 로렌조와 제시커의 사랑 등등.  등장인물간의 얽힌 여러 감정의 끈가닥을 짚어보는 일도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팽팽한 대립이 작품의 긴장을 늦추지 않게 했다.  그러나 서로 종교다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불편했다.   

  이 극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바로 법정에서일 것이다.  이들이 법정에 가기까지의 배경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바싸니오는 포오셔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래저래 비용이 필요하게 되고 절친한 친구인 앤토니오에게 대출을 부탁하는데 앤토니오는 신임할 수 있는 거부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샤일록에게 돈을 대출하여 바싸니오에게 건넨다.  샤일록은 평소 앤토니오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데 이 기회에 복수할 심산으로 돈을 대출해주며 '만약 갚지 못하게 된다면 당신의 살 1파운드를 베겠다'는 약정을 걸고 앤토니오는 그에 응한다.  그런데 앤토니오의 사업이 잘못되어 대출금을 갚지 못할 위기에 놓이자 바싸니오는 자신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앤토니오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바싸니오와 사랑에 빠진 포오셔는 바싸니오의 친한 친구라는 앤토니오를 구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한다.  포오셔는 법관으로 위장하여 등장하고 샤일록을 설득한다.  그러나 샤일록은 완강하게 처음의 약정대로 그의 살을 베겠노라 고집을 피운다.  포오셔는 마침내 샤일록에게 앤토니오의 살을 밸 것을 허락한다.  단, 약속대로 1파운드의 살만.  한 단 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 됨을 샤일록에게 강요하자 샤일록은 복수를 포기하게 되고 만다는 이야기다.  영락없이 살을 베일 처지에 놓인 앤토니오를 궁지에서 건져내는 포오셔의 지혜는 정말 놀라웠다.  그러나 왠지 이렇게 당하고(?) 마는 샤일록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앤토니오의 살을 요구하는 그의 잔혹한 복수심에는 인간의 내면의 악함이 얼마나 지독한지 엿볼 수 있기도 했다.  이러한 순간에도 바싸니오를 책망하지 않는 앤토니오의 우정에도 감복했다.  정말 그야말로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작품에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아차리거나 헤아리지 못한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고전을 두고 마치 숨은그림찾기 마냥 무언가를 찾아내고 동그라미치려는 심산으로 읽으려는 접근 자체가 고전을 내게서 멀리한 또 다른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이제 고전을 너무 어렵게 바라보지 않으련다.  이 작품을 통해 좀 더 고전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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