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야, 그게 정말이야? - 우리를 다시 웃게 만드는 네 가지 질문 우리 아이 인성교육 시리즈 2
바이런 케이티 글, 한스 빌헬름 그림, 고정욱 옮김 / 불광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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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오랜만에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책은 어떤 것이든 밝은 색상의 삽화들을 볼 때면 참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이 그림책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기는 하지만 성인이 읽어도 참 좋은 것 같다.  어찌나 철학적인지.  요컨대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인다' 이다.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호랑이인 호호는 부모와 친구, 유치원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외롭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우연히 지혜로운 거북이를 만나고 그와의 대화에서 조금씩 생각을 달리하게 되고 끝내 긍정적이고 행복한 생각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그림책은 어떤 일 앞에서 다음이 같이 먼저 네 가지 질문을 던져 보라고 말한다.  1. 그게 진짜일까?  2.  정말 그게 진짜라고 믿는가?  3.  그 생각을 믿고서 어떻게 행동했고 무슨 일이 벌어졌지?  4. 그 생각을 없앤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 될까?  이 네 가지의 필터를 거쳐보면 그 문제는 의외로 쉬운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끔찍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매사에 불만이 많은 어린이, 마음의 상처를 잘 입는 어린이, 의존적이어서 자존감이 없는 어린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어린이에게 들려주면 좋다고 한다.  먼저 그림책은 아이들의 마음에서 공감과 동의를 얻어내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이야기가 좋은데 이 그림책 역시 그랬다.  누구나 호호가 되어 사랑받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되고 호호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리고 곧 호호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마음의 치유함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은 실로 큰 의미를 가진다.  어른들이 드라마에 목숨 걸고 챙겨보는 것처럼 아이들은 재미난 한 권의 동화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읽을 정도로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동화를 자주 접하는 아이라면 자연히 긍정적이고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동화는 아이들을 충분히 매혹할만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등장인물이 그렇거나 마술과 같은 일이 벌어지거나 하는 등의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그런 부분에서는 좀 아쉬웠던 것 같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은 선하고 밝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그런 부분에 치중하게 되었을 때 다소 진부하거나 시시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가 있다.  좀 더 흥미로운 사건이 펼쳐지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생기있는 색상과 긍정적인 내용의 그림책을 보니 내 마음도 더불어 밝아지는 느낌이라 즐겁게 읽었다.  이제는 그림책도 자주 접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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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없는 탄생 - 샘터유아교육신서 24
프레드릭 르봐이예 지음, 주정일 옮김 / 샘터사 / 198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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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 없는 탄생'  요즘은 '평화로운 탄생'으로 표제가 바뀌어 출간되고 있다.  폭력이라는 공격적인 단어 대신 이 분만(르봐이예 분만)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평화'라는 단어를 대입해 더욱 긍정적인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그러면 뭐가 폭력 없는 탄생이고 뭐가 평화로운 분만일까?   

  르봐이예 분만, 인권 분만.  요즘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만법이 되었다.  젊은 엄마나 산모라면 르봐이예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고 르봐이예 분만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도 드물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아기는 의례 태어나 울어야 했으며 울지 않는 아기는 무슨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나도 아마 의사 선생님께 엉덩이를 맞으며 탄생의 신고식을 치뤘을게다.  지금은 자연스러워진 이 분만법이 당시에는 얼마나 혁신적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혹자는 "웬 유난이야?  갓난아기가 뭘 안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화면은 출산 중인 산모의 땀 맺힌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산모는 죽어라 고함을 지르며 단말마의 비명 끝에 아기가 탄생하는데 그 순간 카메라는 분만실 밖에서 대기 중인 가족들의 애타는 모습을 비추다 '응애응애'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모두 화색이 되어 얼싸안는 장면 말이다.  송곳으로 찌른 듯한 아기의 격렬한 첫 울음은 탄생을 연상시키는 신호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아는가?  그것은 아기가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보인 분노이자 고통의 징표라는 사실을. 

  그동안 우리는 의료진이 주체가 되고 산모와 아기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분만실의 분위기를 당연시 여겨왔다.  눈이 부실 정도의 밝은 조명 아래 산모는 침대에 누워 비명을 지르고 의료진은 큰 소리로 산모에게 힘을 주라고 재촉하고 아기가 탄생하는 순간 거꾸로 들어 엉덩이를 때려 자극을 주고 울음으로 강제로 폐호흡을 시키고 급히 탯줄을 자르고 철제 저울에 얹어 몸무게를 측정하고 출생 시간을 기록하고 간단히 아기의 안녕을 살피고 아기는 어디론가 떠나고 엄마 역시 병실로 떠남으로 분만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르봐이예 분만은 이런 분만 환경을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괜한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했을테지만 소수의 의식 있는 산과 의사와 의료진들은 이에 관심을 가지고 그가 제안하는 분만법에 매료되었다.  탄생할 아기의 시력보호를 위해 조명을 최소화하고 산모에게는 자유로운 자세로 진통하는 것을 허용하고 역시 아기의 민감한 청력과 산모의 안정을 위해 의료진들은 소리를 낮춘다.  아기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산모의 가슴 위에 엎어주어 아기와 산모가 서로 교감하며 안정을 취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아기가 폐호흡과 탯줄 호흡이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첫 젖을 빨게 한다.  그리고나서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양수 온도의 물에서 안정을 찾게 한다.   

  그러나 르봐이예 분만이 국내에도 소개되면서 많은 산과 의사들과 의료진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분만은 단지 고통이 아닌 기쁨의 순간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그리하여 국내 많은 산부인과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곳은 그저 분만의 분위기만 흉내 내고 있고 어떤 곳은 종례와 같이 아기를 울게 하는 분만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 르봐이예 분만이 왜 필요할까?  누구나 태어날 아기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이 르봐이예 분만이 탄생할 아기와 산모를 최대한 배려하고 이들의 만남이 건강하고 평화롭게 진행되도록 돕는 분만이다.  이는 아기와 산모가 주체가 되는 분만법이며 태어나는 아기를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하는데 포커스가 맞춰진 분만법이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첫 호흡을 시작한 연약하고 약한 아기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그 시선 자체가 이 분만법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꼭 산모나 산과 의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번 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땅의 모든 아기들이 인간적인 환경에서 보호받으며 탄생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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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독자 보통의 독자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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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독자'인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작품은 읽어본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최근 국내에 최초로 완역되었다는 이 에세이집을 선택했는데, 그녀를 너무 모르고 읽기에는 힘겨운 작품이었다.  오히려 가볍게 소설책부터 읽어보면 나았을까?  (그런데 지인에게 듣기로는 소설 역시 난해하단다.)  이 책은 에세이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평론이다.  그렇다보니 소재가 된 인물가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읽기가 꽤 힘들었다. 

  '추천의 글'에서는 '《보통의 독자》에서 울프가 전제로 한 독자는 특별한 문학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독자이다. 그런 만큼 격식을 차리지 않고 열린 자세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듯 썼다. 자연히 스타일은 정감 넘치고, 과시적이 아니며, 탈권위적인 어조이다. 애디슨과 같은 수필 분야의 개척자가 도입한 커피하우스나 찻집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분위기를 상상한다면 수필은 원래 학계의 전문적 독자보다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울프 또한 자신의 수필에서 이러한 서민성을 보전하려고 했기 때문에 난해함으로 알려져 있는 울프의 소설과는 달리 <보통의 독자>에서는 예외적으로 명료하고 선명한 글을 볼 수 있다.(p.6)'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명료하거나 선명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는 나의 무지에서 오는 괴리감인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은유와 비유는 때로는 시적이기도 해서 '보통의 독자'인 내가 눈치채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다.  어쩌면 이 작품들은 세상에 발표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일기처럼 꾸준히 적어온 그녀만의 비망록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목차를 보자면, '보통의 독자, 제인 오스틴,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디포, 몽테뉴, 뉴캐슬 공작 부인, 두서없고 숨김없는 애벌린, 애디슨, 조지 엘리엇, 조지프 콘래드, 패스턴 일가와 초서, 희미해진 사람들의 생애, 개요, 그리스어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시대의 헛간, 엘리자베스 시대의 어느 희곡에 대한 주석, 러시아 인의 관점, 현대 소설, 현대 수필, 후원자와 사프란, 현대인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21가지 주제에 관해 그녀의 생각을 거침없이 펼친다.  주제도 몇 가지 외에는 내게 생경한 것들이었기에 나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독자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솔직히 그녀의 글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쫓기가 싶지 않다 보니 눈으로는 글자를 쫓으나 생각은 딴 곳에 있는 것을 몇 차례나 억지스레 데려와야 했다.  버지니아 울프와 나의 첫 만남은 아쉽지만 실패로 돌아간 듯 하다.  차라리 누군가를 통해 '그녀랑 친해지려면 무엇부터 관심을 갖고 공유해야 할까?' 를 수소문한 후 마주앉는 것이 나을 뻔 했다.  나는 그녀의 깊이 있는 사유를 쫓지 못했고 그녀는 이런 내게서 멀리 달음박질 쳤다.  내 성격상 한 번 열었던 책을 끝을 보지 않은 채 덮는 일이 결코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여러 순간 그러고 싶은 유혹이 왔다.  어찌어찌하여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내려놓긴 했으나 중간에 그냥 덮어버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겐 이 작품을 계기로 버지니아 울프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듯 해 속상하다.  또한 이 작품을 읽고 쓴 서평이란 것이 이토록 '나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로 일축하게 되어 부끄럽다.  그렇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다른 작품부터 차근차근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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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식탁
박금산 지음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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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난해한 소설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에서 조명한 문제작'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 다르다.  분명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다섯(레지나, 민우, 세키, 아녜스, 김일면)의 둘(레지나, 세키)은 장애인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장애인이 등장하고 이들의 사랑과 성적 욕망을 밝히 드러내 보였다고 해서 이것이 장애인들의 일반적인 사랑과 성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비윤리적인 관계와 캐릭터들이 소설 속에 난무한다.  교사 민우와 제자 아녜스와의 관계 그리고 임신, 교사 김일면과 시각장애인 레지나의 관계 그리고 임신, 야설을 쓰는 언어장애자 세키 또 선생 김일면과 세키의 정기적인 도박, 고등학생인 아녜스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민우의 레지나를 향한 욕정, 레지나를 향한 세키의 사랑 그리고 성욕.  줄줄이 나열해놓고 보니 참 복잡하기도 하다.   

  앞서 나는 이러한 관계들은 비윤리적이라고 했는데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다수의 일반적인 입장에 반하는 것들?  이것들을 명명백백하게 규정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동성애의 문제를 놓고 보자면 이들 이성애와 같이 보는 이들도 있고 또 이는 용인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교사와 제자의 성애 관계라면 이는 동성애 문제보다는 좀 더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를 두고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으로 치부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것을 감히 비윤리적인 관계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얼마 전 이런 관계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외신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유부녀 여교사와 남자 중학생과의 관계가 사회를 경악게 한 일이 있다.  둘 사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사랑이 있었건 없었건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관계를 고운 눈으로 본 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이런 관계가 버젓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교사인 민우와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아녜스다.  앞에서 교사 김일면과 시각장애인 레지나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상 이들 관계에 있어서는 문제가 될만한 점은 없다.  레지나는 성인이고 김일면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성일 뿐 이들 모두 성인이기 때문이다.  민우와 아녜스의 관계를 단지 스승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배제한 채 '부적절한 관계'로 치부하는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조금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상 교사와 학생 간에 성행위가 존재하는 것에서는 어떻게든 면죄부를 주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을 정면에서 조명한 문제작' 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하겠다.  '이 시대 장애인'이라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장애인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의 '성과 사랑'이라면 그들의 성 그리고 사랑에 대한 관념이나 행위, 실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면에서 조명'했다 함은 문제를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시하여 까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의 비정상적으로 드러나는 성욕과 그들의 관계를 이 시대 장애인의 성과 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무슨 근거로?  내 보았을 때는 '인간의 은밀한 성과 사랑을 엿본 문제작'이라는 표현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작가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 편협된 시각에서 탈피하길 원했다.  그런데 소설 속 이런 성애 관계와 성적 관계를 말하면서 장애인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작가의 의도에 어긋나는 게 아닐까?  이들의 이런 관계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실제 다르지 않은) 인간들의 관계와 삶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치 장애인이기에 이들이 이러한 관계와 성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과연 레지나와 세키 그들이 장애인이기에 소설 속에서처럼 이렇게 사랑했을까?   

  또한 이들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민우는 아녜스와 관계를 갖고 아녜스가 임신(물론 소설 속에서는 아녜스의 임신이 민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김일면을 통해 밝힌다)을 한 상태지만 아녜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김일면 역시 레지나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임신하지만 레지나가 아이를 낳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서로 사랑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경우라 할지라도 어느 한 쪽이나 쌍방이 아기를 원치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김일면은 민우에게 레지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것을 의아해 하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쩌면 김일면은 레지나의 매력적인 외모때문에 그녀를 독점(세키가 레지나를 좋아하는 것을 시기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  물론 나는 김일면과 레지나의 관계에서도 둘 사이의 진실한 사랑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끝으로 세키.  세키는 정말 레지나를 좋아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아녜스에게 여러 차례 성욕을 느낄까?  민우가 아녜스를 사랑했다면 어찌 레지나에게 느끼는 성욕을 아녜스에게 풀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이들 관계를 사랑이라고 보지 못하겠다.  도리어 제어되지 않는 너저분한 은밀한 성욕이 존재하는 관계라고 단언하고 싶다. 

  이 소설에서 장애인은 레지나와 세키였다.  그러나 이들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민우, 아녜스, 김일면 역시 장애인이다.  사회에서는 이들을 정상인으로 간주하겠지만 이들은 자신만이 안고 있는 내재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장애인의 성과 사랑....'이라고 언급한 것을 용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어쩌면 나와 다른, 내가 비윤리적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이 마치 나로 하여금 이들에게서 외톨이가 되게 하는 듯 했다.  이들의 세상 속에서는 날 선 눈빛과 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규정짓는 것이 비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정상', '비정상'을 너무 쉽게 갈라버리는 나의 시선이 어쩌면 내가 가진 장애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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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교는 과학이다 - 아이의 평생을 결정하는 엄마 아빠의 첫 교육
박문일 지음 / 프리미엄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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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유익했던 책이다.  시중에는 방대한 태교서적들이 널려있다.  그중에서도 태아의 지능개발 따위를 다룬 책들이 가장 많은 것 같다.  벌써부터 뱃속 아기를 가르치기 위한 책들 같은 느낌을 폴폴 풍기는 책들이 너무 많다.  대개 키워드들은 EQ 태교, 뇌태교, 영어태교, 명화태교, 음악태교, 명품태교, 지능개발, '똑똑한' 등등.  솔직히 이런 책들은 한사코 읽고 싶지 않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학습시키고 가르치기 위한 태교는 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과연 이런 것들을 태교라 불러도 될까?   

  오늘날, 태교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첫째, 지나치게 뱃속 태아의 학습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 근거없는 미신이 무분별하게 난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내 느낌이고 내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 태교에 관해 제대로 말해주는 책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태교는 과학이다> 

  임신 초창기 '임산부가 읽을만한 좋은 책이 없을까?' 싶어 태아, 태교, 임신 등의 키워드로 도서를 검색해 보았다.  그때 이 책을 처음 보았다.  물론 당시에는 이 책 역시 그렇고 그런(?) 태교 책이리라 생각했다.  '태교는 과학적인거다.  그러니까 당신네들 부지런히 태교하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참석하고 있는 임산부 교실에서 이 책을 추천도서로 권해주었고 그 도서들이 하나같이 읽으만한 책들이기에 이 책도 믿고(?) 읽어 보았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의 오해가 완전히 풀렸다.  그야말로 태교의 참 의미를 말하고 있는 책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말하는 태교와 태아기 발달에 맞는 태교들을 살펴보며 태교의 참뜻과 진정한 의미를 소개한 책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참 지혜롭다.  우리는 태어나면 아기의 나이를 1살로 세는데 이것은 이미 뱃속에서 잉태되며부터 열 달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단다.  그렇기에 서양에서 넘어온 월령보다는 엄밀히 말해 태아 존중에 대한 기본이 깔려 있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떤 나라보다도 태교를 강조해온 나라였다.  그것은 <태교신기>,<칠태교>등 전통 대교 서적들에도 밝히 나와있다.  그 뿐 아니라 임산부라면 누구나 몇 가지 강령(?)과 같은 수칙을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임산부나 그의 가족은 가급적 상갓집등 슬픔이 있는 곳에 가서는 안 된다, 모양이 바르고 신선하고 건강한 것만 먹어야 한다, 나쁜 것은 보지도 말고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등등.  예로부터 전해지는 대다수의 태교는 임산부의 몸가짐, 자세를 바르게 하고 조심하여 태아를 보호하고 심성이 바른 아이로 성장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태교는 '똑똑한 아이 만들기' '열 달 먼저 시작하는 조기교육'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임산부의 자세와 마음가짐, 몸가짐보다 영어는 어떻게 들려주면 되는지, 음악은 모차르트를 듣는 게 좋다는 등의 오로지 뱃속 태아만을 위한(과연 위하는 것이기나한지 그것도 의문이다) 태교들이 난무하고 있다. 

  또 근거 없는 미신 역시 아주 많다.  임신 중에 오리를 먹으면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이 붙어 나온다더라, 닭을 먹으면 닭살이 된다더라, 게를 먹으면 아기가 거품을 문다더라 뭐 다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미신들이 많다.  대개 먹을거리와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미신들은 우리나라의 전통태교와는 근거 없는 내용이며 여기저기서 생겨난 속설에 불과하단다.  가끔 온라인 예비맘 카페 같은 곳에 접속해보면 짜증 날 정도로 황당한 질문들을 만날 때도 있다.  '오리, 닭 그런거 먹어도 되나요?', '게 먹으면 안 된대요', '플라스틱을 쓰고 있는데 환경호르몬이 태아에게 유해하겠죠?', '매운 것을 먹으면 아토피 걸린다죠?', '파인애플을 먹었는데 정말 유산되나요?' 등등.  태아에 대한 이해와 생활환경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간혹 이런 글을 볼 때면 나 역시 임산부지만 '아니 그럼 임산부는 뭘 먹으라는거야?  차라리 병원 중환자실 무균실에 누워있는 편이 낫겠네' 싶을 정도다.  물론 태아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것은 하지 않으려는 산모의 조심스러운 마음이야 나무랄 수 없다.  그러면 태교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바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사실 이 책은 그 초판이 1999년에 출간된 책이었다.  약 십 여년을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며 다른 태교 도서의 근간이 되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전통태교에서 태교의 뿌리를 찾아보고 태아의 발달에 맞는 일상생활 속 태교는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임산부의 마음가짐과 평온한 임신기를 위한 조언들이 가득하다.  태교법보다 태교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기에 더욱 읽을만한 책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산부인과 의사 및 해당학 교수로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데 담당하던 한 임산부가 조산한 미숙아를 다룬 대목에서는 정말 감동했다.  태아의 성장에서 중요한 것은 엄마와 아빠의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조산을 이유로 부모의 사랑의 목소리를 다른 아기들보다 듣지 못한 채 출생하게 되었으니 그 부분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그 부부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녹음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큐베이터 안의 태아에게 그것을 들려주었고 그 태아는 빠른 속도로 몸무게를 불려 가며 잘 성장한 것을 목격한 대목이었다.  아니 어떤 의사가 미숙아에게 의료기기를 통한 의술이 아닌 그런 정서와 심리적인 면까지 고려하여 태아를 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조산을 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부부의 목소리를 태아에게 들려주도록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저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미숙아가 부모의 목소리만을 통해 조금 더 잘 성장하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 연구하고 발표할 계획이란다.  개인적으로는 이 연구가 잘 진행되어 학계와 의료계에 주목을 받아 모든 의료진들이 이와 같이 산모와 태아의 심리적인 면을 고려한 의료행위를 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무튼 이것은 정말 따뜻한 진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밖에 임신에 대한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내용도 유익하고 읽기도 쉬웠다.  태교가 무엇인지 알고 산모와 태아와 그의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태교를 원하는 이라면 꼭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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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별뽀야 2012-07-1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너무 재미있어요. 군데군데 독설같은 유머에 빵 터졌습니다.ㅋㅋ 공감공감!!ㅋ
인터넷상 카페나 지식검색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어 책을 통해 몸과 마음가짐,
앞으로 태교를 어떤방법으로 해야 할까 싶어 들어왔는데 님의 자세한 서평 덕분에
이 책 꼭 사서 필독해보려구요.ㅋㅋ 태아의 지능 올리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그에 앞서
태교개념부터 알고 시작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