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현대문학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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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읽는 은희경의 4번째 소설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마이너리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그리고 이 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  이 책은 헌책방에서 데려온 책인데 몇 쇄 찍어냈는지 표지가 3가지 종류가 있다.  이것은 그 첫 번째.  요즘 은희경이라는 작가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은희경스럽다'는 것은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이 그다운 것인지....  그녀에 글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그가 주로 이야기로 다루는 소재와 같이 모호하다.  <마이너리그>를 제외하면 내가 읽은 세 편은 모두 꿈같은 이야기였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들....  가만, 그런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이 편 아니면 저 편에 굳이 넣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겠다.  엄밀히 하자면, 현실과 비현실의 그 중간쯤, 그 둘이 살짝 포개진 교집합 영역에 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은희경의 문체는 매끄럽다.  이게 바로 그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거추장스럽지 않고 간결하고 단정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미건조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 여인으로 표현해 보자면 쪽진 머리의 단아한 여인이다.  그래.  겨우 네 작품 뿐이었지만(누군가를 알아가기에 4번의 데이트라면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상대에 대해 어느정도 감은 잡을만한 횟수일 듯 싶다) 그녀의 글은 매력적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글을 더 읽고 싶어진다.  이는 그녀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은희경의 글에 좀 더 다가가고 싶어서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은희경의 소설은 비현실적이면서 꿈과 같은 모호하며 몽환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내가 접해본 바로는.  그런데 이것이 은희경 다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런 성격의 작품들만 읽은 것인지 좀 더 앍고 싶다는 얘기다.  은희경의 글들을 더 읽어 볼테야.

  이 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는 정말 절묘하고 기가 막힌 제목이다.  이 책을 덥자마자 나는 '이게 모두 꿈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준과 진이 나흘간 머물렀던 레인캐슬은 이미 준의 꿈 속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준은 실레의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이야기에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그녀 마리아(혹은 미리암)는 실레가 그려낸 여인과 정확히 일치한다.  노란 빛의 길지 않은 머리칼에 푸른색 소매가 없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  이것은 준이 실레에 그림에 심취한 나머지 꿈에서 볼 수 있었던 환영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은 너무나도 꿈같아서 뭔가 시원찮은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작가만이 아는 일.  그렇지 않다면 독자의 확신만이 줄거리가 될 뿐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장자()의 '호접지몽' 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그 일화를 잠시 소개하자면 꿈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나는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원래 자신은 나비인데 사람이 된 꿈을 꾸고있는 것이라는 착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교과서를 놓고 배운 것이었는지, 무언가를 읽음으로 알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그 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의 내가 실상이고 꿈 속의 내가 허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을까?  꿈은 과연 무엇일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욕구불만 혹은 소망충족의 수단이며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했다.   

  중학교 시절 친구의 이야기인데 그는 늘 같은 꿈을 꾼다고 했다.  꿈 속에 한결같이 한 남자가 등장하고 처음 그 남자를 보았을 때는 두렵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 남자의 얼굴까지 기억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현실공간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꿈에서만 존재하는 남자와 시종일관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문학에 심취해 있었고 이야기 만들기를 즐겨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지금에야 이 꿈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물론 이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 꿈의 진위여부부터 가려야겠지만.  (아, 꿈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어.  글을 쓰기전 머릿 속으로 한 번 정리를 하고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가 있겠다.)

  음....  꿈이란 현실의 쉼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나는 악몽때문에 미칠지경이라구요.  이게 쉼이라구요?'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의학이 발달해 우리네 수명은 백세는 넘긴다긴 하지만) 인간의 심심하고 무료한 삶 속에서 마치 로봇이 변신을 하듯 무한히 열려진 공간을 허락하기 위한 인간에 대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본디 희망에 차있고 환상적인 것이다.  그처럼 우리는 꿈이라는 몽유를 통해 현실에서 얻거나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쉽사리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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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빠상 괴기소설 광인
모빠상 지음 / 장원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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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자의 일생> <비계덩어리> 로 유명한 모파상의 단편 괴기소설 모읍집이다.  그동안 미발표된 작품으로 국내 최초 소개란다.  이 책은 헌책방에서 질러온 책인데 완전 보물 낚은 기분이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더 절실해지는 책이다.  먼저 이 책의 표제를 살펴보면 2가지 뜻을 담고 있다.  첫번째, 모파상은 괴기소설의 광인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파상의 괴기소설집.  타이틀은 광인? 이다.  이 책에 실린 그의 25편의 괴기소설(?) 중 한 편의 제목이 바로 '광인?' 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25편의 제목을 한 번 짚어보자.

  제목이라는 것은 대개 그 글과 개연성이 있게 마련이다.  <박제된 손> <고인> <괴물들의 어머니> <머리카락> <몽 ›?미쉘의 전설> <유령> <손> <물 위에서> <최면술> <공포> <늑대> <크리스마스 이야기> <시체 곁에서> <그 사람?> <광인?> <매물> <미지의 여인> <어떤 이혼의 경우> <산장> <오를라(제 1판)> <오를라(제 2판> <에르메 부인> <수면의자> <누가 알아?>  이렇게 25편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오싹 오싹 공포체험' 같은 책이나 이상한 렌즈의 종이 안경을 쓰고 보면 책 속 사진들이 마치 입체와 같이 느껴지는 무서운 이야기들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가만 생각하니 심취라고까지 할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까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걸로 보면 나에게는 공포는 무척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글은 뭐랄까?  공포스럽다니 보니는 신비한 이야기들이었다.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힘, 그리고 외로움, 강박을 다룬 이야기들이다.  단순히 등골 오싹한 한기를 느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권선징악과 보복으로 난무한 귀신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다.  오히려 무섭기로는 어린시절 읽었던 귀신이야기들이 몇 배나 더 무섭다.  이 책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공포' 라는 두려움을 현상과 상태를 여러 이야기들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원혼이라던가 귀신이 나타나 해꼬지를 하기에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과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 심리에 대해 잘 쓰여져 있다.   깔끔하고 단조로우면서도 강렬한 심리묘사.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발표시기순으로 되어있는데 조기 작품이 원초적인 공포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후기 작품들로 갈 수록 환상적이고 초자연적이다. 

   정신병적인 기이한 강박에 가까운 25편의 공포 이야기들.  이 소설을 읽고 그의 약력을 살펴보던 중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었다.  모파상의 동생은 정신병으로 죽었고 모파상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으며 정신착란증세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단다.  그것도 1월 1일 정초에.  결국 그는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모파상의 괴기소설은 단순히 상상력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그의 병적인 현상이 작용한 글이리라.  이 책은 쉽게 말해 기이한 현상과 공포라는 이름에 담겨진 사회적 금기 사항과 윤리의 위선에 대한 비웃음이다.  물론 이 소설의 특성상 줄거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누군가가 이 책을 짚어들고 내 후기를 읽게되는 거의 희박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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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학교에 간다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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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체불만족으로 유명한 오토다케.  그의 신간이다.  

이 책은 읽기 전부터 감동일 수 밖에 없다.  

팔과 다리가 없는 그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단다.  

그는 틀림없이 남들보다 불리한 신체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팔과 다리를 대신할 강인한 정신력이 있다.  

예전에 나는 TV에서 그에 관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그도 그였지만 그를 대하는 가족과 학교, 

친구들의 따뜻한 시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책....  '장애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희망적 수기' 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사지가 멀쩡한데 감사하며 

주어진 각자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내게 하는 책이리라.  

그런데 이 책의 주된 골자는 오토다케가 말하는 일본의 학교교육이다.  

물론 오토다케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겐 희망이고 

한 편의 성실한 수기임을 한 시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오토다케는 사뭇 진지하고 예리한 시각으로 일본의 학교에 대해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그는 참 진취적이기도 하지만 소신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는 '교육의 기회는 균등하고 평등하게 주어져야 하나 교육의 결과까지 반드시 평등 할 필요는 없다.' 라고 말한다.  

등수 없는 달리기를 위해 모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결승지점으로 달리는 운동회의 풍경이나 

성적을 두 가지 단위로만 평가를 하여 학생들간의 우열의 폭을 좁히는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그것은 향후 이와 다른 성적 평가에 대한 충격을 무방비로 겪게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어린 학생들은 실수와 실패를 모르고 자라간다.  아니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실수와 실패를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은 작은 일에도 큰 상처를 받고 결국 '하잘 것 없는 인생' 이라고 절망하며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실패와 좌절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부모에게도 적잖은 책임이 있다 하겠다. 

실수와 실패도 단련이 필요한 것이고 '오호라~ 하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일깨워주면 되는 것이지

부정적 감정을 일부러 경험하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 줄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일본의 학교교육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춰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나 한국이나 역시 입시문제등 학교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데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와 그들의 대처방안은 너무나도 틀리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학교를 잠시 생각해보자.  

그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방안이 준비되어 있는가? 

나로서는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 이런 점은 내로라 할만하지 않나요?' 하며 그에 대응할 만한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그저 '요즘 아이들이란' 이라는 말로 일관하며 속수무책하는 꼴이다.  너무 지나친 폄하일까? 

 

그렇다면 한 예를 들어보자. 

등교를 거부(오토다케는 부등교라는 말을 사용하잖다) 하는 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학교에 품에 다시 안을 것인가? 

첫째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담임교사의 전화나 학부모 면담일 것이다. 

둘째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다면 정학 혹은 퇴학으로 종결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쇠뜨기 교실' 혹은 '슈레' 라는 프로그램이 있단다. 

이 제도는 학교를 매일 다닐지 하루 걸러 다닐지 등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정하여 등교할 수 있단다. 

그렇다고 무작정 학생들에게 교육의 선택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1주일에 1번 미팅을 통하여 상담을 하고

정상적인 학교 등교가 가능하도록 꾸준히 학생을 조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식으로 학교교육 시스템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 효율적일지 올바른 제도인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따져보기에 앞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고심하며

'보다 나아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고 있냐고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장애인인만큼 그들의 시각과 입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옮긴이 전경빈씨의 입을 빌자면 한국은 2005년 5월의 법개정으로 전체 교원의 2% 이상 장애인을 고용해야 한단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2년 내지 4년.  합이 14년 혹은 16년이다. 

그러나 나는 한 차례도 장애인 교사를 본 적이 없다.  교정에서건, 강연회에서건. 

물론 장애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끔 하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우리는 그들에게 '불완전하다' 는 시각으로 비장애인과의 생활 영역에 들여놓지 않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오토다케와 같이 중증장애인이 된 경우는 

속된 말로 멀쩡히 다니던 학교(뿐 아니라 직장을)를 그만둬야 할 판이다.  이건 결코 억측이 아니리라.

 

이 책은 단순히 오토다케의 눈을 통해 학교교육을 엿보는데 만족하게끔 하지 않는다. 

우리네 모습은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한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나 그리고 여러분 우리 모두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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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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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맛깔스런 형광빛의 표지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그 제목만으로도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책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완벽한 추리와

셰익스피어의 매혹적인 비극이 만났다! 는 띠지의 글들에

또 한 번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영하 30도의 냉동실에 한 '네스터 채핀치' 라 불리우는

한 요리사가 갇혀 얼어죽게 된다.

그 죽음을 발단으로 그가 죽기까지의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데 소설은 아무런 복선도 던져주지 않는다.

추리소설은 독자가 탐정이 되는 듯할 때

비로소 활기를 띄게 되는 것인데 이 소설은 좀 달랐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사망사건이라면 살인사건이 대부분의 경우일 것이다.

그 피해자를 둘러싼 탐정의 수사.  용의자들의 알리바이. 

이 모든 것이 절묘히 숨가쁘게 돌아가는 것이 적어도 내가 본 기존의 추리소설이었다.

학창시절 애거서 크리스티나 에드가 알렌 포우의 추리소설을 여럿 읽었던 기억이 있다.

많은 용의자들 중에서 진짜 살인범을 찾아내는 것은 묘한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많이 적중한다는 사실은 '내 두뇌가 명석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런데 이 추리소설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탐정도 없으며 '네스터를 의도적으로 죽이려한 용의자도 가해자도 없다'

그러나 네스터는 영하 30도의 냉동실에 갇혀 죽는다.  그렇기에 이것은 정말 처절한 비극이다.

한 선량하고 재능있는 요리사는 사람들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책잡힐 짓을 한 자들은 정작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우연에서 시작해 우연해서 죽게 되는 아주 기막힌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추리소설은 숨가쁘게 진행이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게 추리소설인가 싶은 정도로 더디 진행되고

인물 인물들의 내면 깊이까지 묘사하는데 공을 들인다.

그러다보니 조금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야기가 끝을 치닫게 될 수록 추리소설 본연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듯 싶었다.

 

스페인소설은 처음인 듯 하다.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으며

'추리소설은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 는 공식을 속시원히 깨버린 새로운 발상의 추리소설이다.

 

당신들은 어떠할 것인가?

치욕스러운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그 자의 입을 막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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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견 - 5,000년의 사랑 이야기
이수현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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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7년 이탈리아의 만토바 근처 발다로 유적지에서 

   서로 마주보고 굳어버린 남녀의 화석이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책은 그 화석에서 영감(?)을 얻은 우화소설이다.

  

   이야기의 첫부분을 읽으며 영화 '단적비연수' 가 떠올랐

   다.  바위사람, 물가사람이라 불리는 두 부족. 

   그 부족의 생존과 영역차지를 위한 대립.

   결론은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루게 되는 두 종족의 이야기

   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비슷했다.

  

   몇 장 넘기지 않아 '정말 재밌겠는데?' 하고 읽기 시작했다.

   두껍지 않은 탓에 단숨에 읽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매력적인 스토리의 재미는 반감되고 

 

마치 인간관계에 관련된 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쉽다.  이야기의 첫느낌을 끝까지 잘 지켰다면 아주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싶다.

 

그리고 chapter 사이사이의 분홍빛의 종이에 씌여진 글들은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사랑에 대한 한담거리들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글쎄, 자칫 여성우월주의(?) 적인 발상의 글들이 많았던 것 같다.

뭐 여성우월주의하고까지 명명하긴 뭣하지만

남자들의 정서적 수준을 폄하하는 글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장담컨대, 필시 이 글들에 발끈하는 남자들이 있으리라.

뭐 그것도 그다지 과잉반응이라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사랑에 대한 모호하고 주관적인 영역을 무 자르듯 제법 단호하게 쓴데 있어서는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내가 생각기에는 그 이야기들 대부분이 사실과는 차이가 있고

일반화 시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이 분홍빛 종이의 글들 때문에 이 책이 우스워진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의 편협한 생각들을 단정짓듯 해버린 것은 실수인 듯 하다.

이 때문에 선물용 책다운 느낌마져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화석을

모티브로 쓴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두 연인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나 화석이 되기까지의 사연들을 더 담아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첫느낌은 참 좋았는데 여러모로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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