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은 뭐, 세기말이긴 했지만 정말 세상에 망조가 들어서 모든 것이 다 몰락하고 있다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그 세기말, 종말의 분위기가 문화적으로 너무 남발이 되선지, 혹은 이미 사람들이 세상에 지칠대로 지쳐서 될대로 되라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세기말의 우울이란 코드는 이미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거의 정리가 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사실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에겐 호황기나 불황기나 그게 그거인 법. IMF 직후인 전국민적인 침체의 시기에 말세를 꿈꾸는 건 너무 풍요로운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요점은 그 시기에 암울 및 우울이란 코드를 쓴다는 건 거의 B급 정서에나 먹힐만 한 일이었다는 거죠. 그런 세상에 시대를 착각하고 안이한 판촉전략을 세운 탓인지, 정말 일반적인 정서와는 괴리되는 암울한 스타일의 게임이 한 편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슈팅게임의 명가 사이쿄에서 제작한 두번째이자 최후의 대전격투게임이었던 [타락천사]였습니다.
2000년 2월 지진의 충격을 받은 '도시'는 컴퓨터 관리 시스템의 고장과 동시에 균열로 인해 대륙으로 떨어져 나가 하나의 섬이 됨으로써 질서가 없는 혼돈의 세계가 됩니다. 범죄가 지배하는 곳이 된 부패한 도시는 사람들에게 '에덴'이라고 불리게 되고, 이 이야기는 십년 후, 2010년의 망가진 '에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보기만 해도 둔탁한 인상이 드는 스토리입니다만 게임을 더욱 암울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무라타 렌지의 캐릭터 디자인입니다. 독특한 음울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스타일을 기억해보자면 예상이 가는 바이긴 합니다만 이 게임에서 그는 자신의 그 어두운 면모를 극대화하기로 작정한 듯, 어딘가 망가진 캐릭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에 담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래곤 헤드]를 연상케 만드는 소년이라든지 [프랑켄슈타인]형 괴물의 마이너 체인지판인 모양새의 녹색 거한, 파리를 달고 다니는 극진공수도 무도가와 미치광이 총잡이 등등, 무라타 렌지의 어두운 색감을 그대로 화면에 박아넣은 탓에, 게임의 그래픽 또한 내내 칙칙하고 하수구 구녕에서 건져올린 듯 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차가운 색기가 감도는 로리 스타일의 예쁘장한 캐릭터는 끼어들 틈이 없는 방향인 거죠. 물론 인사치레처럼 미소년 미소녀 쌍둥이 커플이 한쌍 있긴 합니다만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다 트랜스 커플이란 점에서 역시나 이 게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스토리나 캐릭터 디자인에 충실하게도 게임 본편 또한 어딘지 괴상했습니다. 그래픽만 보자면 현재에 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퀄리티이고 줌 인 아웃 시스템을 활용하여 큼지막한 캐릭터들이 화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것은 분명히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일단 캐릭터를 활용하는 인상이 밋밋하다고나 할까요. 어두운 톤의 그래픽에 맞춰서 보여지는 기술이나 동작, 스타일, 심지어 초필살기까지 화려하기는 커녕 밍숭맹숭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니, 아예 게임의 전체적 디자인마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이 그런 밋밋한 분위기에 호응하듯 연속기가 아니라 묵직한 한 방을 노려야 하는 단타형 대전 격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대전 격투 게임의 흐름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던 것으로 [스트리트 파이터3] 류와 일맥상통하는 바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마이너한 대전격투게임의 전반적 특징은 연속기 배제, 단타 지향으로 결정지어지는군요. 반대로 손이 느린 저로선 무척이나 좋아하는 요소들입니다만.
아무튼 시대를 따르면서도 시대를 거스르려 했던 이 애매한 게임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조차 제대로 확인 받지 못하고 사이쿄로서는 대전격투게임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는 경영방침을 정립하도록 한 후 어떤 콘솔로도 이식조차 되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로 끝날 뻔 했지만. 마메쪽 개발자들이 롬을 추출하여 웹에 퍼뜨리는 덕에, 중증 마이너 대전 격투 게임 중에선 꽤 인지도가 있는 쪽에 속합니다. 나중에 SNK가 KOF99의 신캐릭터들, K'와 맥시마의 캐릭터 디자인 및 추가된 신기술 디자인 다수를 여기서 베껴온 것으로도 이름을 탔었죠. 전 처음 보자마자 삘링이 왔었는데 [타락천사] 자체가 워낙 마이너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이슈가 되더군요.
저로선 삘링이 단박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다이야기지만 예전엔 동네 양아치들의 건전한 사교의 장이었던 고전주의 지향의 오락실에 바로 이 게임이, 웬일인지 2개월 가까이 설치되 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인기도 좋아서 플레이하던 사람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판시장에서도 꽤 레어품으로 취급 받고 있는 것이 [타락천사]입니다만, 아무튼지간에 저도 그 시기에 원없이 보고 가끔씩 즐길 수 있었습니다.
마메 게임들 중에서도 꽤 고사양을 요구하던 놈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즐길 기회가 없었지만, 요즘은 잘 돌아가더군요. 역시 돈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