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끝을 봤습니다. 눈은 충혈됐고 위장엔 빵구가 날 것 같으며 머리는 떡져있고 우리집 늙은 강아지께선 제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아무튼 끝냈습니다-_- 소개 및 감상 및 스포일러 들어가겠습니다.
[fate/stay night]는 총 3개의 루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Fate, Unlimited Blade Works(이하 UBW), Heavens Feel(이하 HF)의 세 루트로 각각의 루트에는 에피소드를 대변하는 히로인이 하나씩 내정되어 있습니다. 자랑스럽게도 에로 게임이란 걸 잊어주지 않는 제작사의 배려가 아름답습니다.... 라고도 볼 수 있겠고. 그보단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서 기능하는 일종의 구분법이기도 합니다. 개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같은 시공간의 다른 이야기들이라는 패러렐월드의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dream heart사이트의 인드라지트님이 지적한대로 저 세 루트는 순차적으로 소년-청년-성인의 이야기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의 구조가 무조건적으로 fate루트의 클리어를 가장 먼저 강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겠죠. 아래 포스트에도 올렸듯이 아서왕의 환생이신 이 아가씨, 세이버가 히로인인 fate루트는 많은 이들이 이 게임이 소년만화의 극적구조를 가져왔다고 오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소년만화적 구조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건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적어도 이 fate루트에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아무래도 첫 도입이기도 하니까 비중면에서도 인상이 깊었던 덕도 있겠지요.
세이버의 디자인적 원형은 아틀라스+세가의 합작품으로 괜찮은 반응 및 골수팬을 만들어냈던 이 횡스크롤 게임, [프린세스 크라운]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1997년작으로 상당히 매니악한 인기가 있었죠. 전례를 하나 더 꼽자면 [사무라이 스피리츠]의 샤를르트도 있군요.
괄괄한 칼잡이인 이 금발 미소녀의 이야기는 무투의 과정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동료애와 존나 짱쎈 적과의 혈투를 겪으며 차곡차곡 나아간다는 점에서, 대개 에로계에서 비장의 무기로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 3P 플레이가 첫 에피소드인 주제에 버젓이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주 제대로 소년만화틱하게 나아가는 셈이죠. 그리고 자빠링을 통한 정기의 주입이라는 설정은 아주 완전 와룡강 에로무협지입니다만 이건 뭐, 에로게임 제작자들의 기호와 업계의 현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해야겠지만요. 하지만 그런 소소한 부분을 제외하면 이 에피소드는 말하자면 fate의 세계에 대한 입문으로 아주 적절했던, 달콤한 조미료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아래 포스트에도 밝혔듯 오랜 인고의 시간 끝 마지막에 깊은 안식이자 달콤한 꿈을 꾸기 위해 잠드는 세이버 얼굴을 보면 아무 생각 안 들게 됩니다-_-
앞서 밝힌 것처럼 두번째 루트인 UBW는 청년을 은유합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는 청춘, 신념의 지속, 혹은 폐기, 미래에의 고민과 미래와의 갈등이라는 청년의 고민을 다룬다 할 때 정석을 달리는 소재들이 중심에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팬덤에서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 이 UBW루트임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이 게임의 주요 유저층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죠-_- 자빠링의 형태에 있어선, 첫번째 에피소드에선 일방적인 에너지 주입이 목적이었던 것이 여기선 상호간의 조율의 목적으로 쓰인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고. 모두가 그 충격적이라던 반전이 어떻게 된 게 저는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그냥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기 때문에 전혀 충격적이지가 않았습니다-_- 생각해보니 완벽에 가까운 해피엔딩 결말이나 그에 준하는 해피엔딩만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한 라이트 유저들의 호응이 있었을 듯도 싶습니다. 저로서는 도리어 가장 와닿지 않는 에피소드기도 했습니다만.... 수도꼭지를 비유로 쓸 정도로 현대문명에 해박함을 보이는 아서왕께서 현대 일본의 여러 부분에선 엉뚱한 문맹 노릇을 하는 모순 또한 거슬리는 나스 키노코의 에러였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마지막 HF루트입니다. 실제로 [fate/stay night]에서 가장 중요한 의문사항들이 밝혀지는 에피소드임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fate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에피소드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자빠링은 현저하게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_- 그것은 이 에피소드가 앞서 플레이해야 했던 두개의 루트에 비해서 이질적일 정도로 어둡고 폭력적이며 가학적인 인상까지 주기 때문입니다. 아예 극구조 자체가 다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앞의 두 개가 상승과 전진이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는 하강과 침식으로 그 인상을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UBW루트에 비해 음울하고 희망이 안 보이는 HF루트가 받는 푸대접은 유저계층적인 측면에서 봐도 납득이 가는 바입니다. 이 루트가 성인 유저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확연한데, 그 증거로 여기서 드러나는 섹스가 더이상 앞서의 에피소드들이 보여줬던 목표달성으로서의 섹스가 아니라 폭력적인 일상의 연장을 보여주는 도구로써 쓰이고 있다는 걸 들 수 있겠습니다. 히로인인 사쿠라의 육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십수년간 가학적으로 다뤄진 몸이고 그로 인해 혼란스러운 자아를 가지게 된 그녀는 에피소드 내내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무투씬은 얼마 나오지도 않는데다 그나마 허무하기까지 하고 불리한 위치만 가지는 주인공팀에겐 당최 희망이란 게 느껴지질 않죠. 그 속에서 주인공은 비극적인 결말이 확실시되는 미래와 더이상 자신의 신념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과거에 메여 방황합니다. 노멀엔딩조차도 타인의 희생을 통해 겨우 살아난 저 아낙이 결국 구원 받지 못하고 인생을 보내버린다는 결말일 정도니.... 저로서는 아주 간만에 오래 전 하드보일드 요마물들, [하원기가의 일족]에서부터 [키즈아토], [문]까지 생각나게 만들어버릴 정도의 정통파-_- 다크물 파트였다고나 할까요. 나름대론 반갑기도 했습니다-_-
아아, 아무튼 아주 오랜만에 해 본 에로게임이었습니다-_- 신선한 것 반, 뻔한 것 반이라고 표현하는 게 제 감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HF루트에서의 대체 끝이 언제 날지 모르겠던 나스 키노코 특유의 장광설은 심히 인상적이었습니다-_- 이제 팬서비스용 후일담 및 외전인 [fate/hollow ataraxia]가 남았긴 한데.... 아무래도 안 돌아갈 것 같군요-_-
이런 류를 즐기는 이들이 흔히 하는 얘기처럼 어찌 보면 에로 게임이라고 표현하는 게 부당할 정도의 게임이었습니다만, 예전에 그와 관련해서 [현시연]에서 이쪽류의 게임에 대한 번역이 '에로게임'으로 번역된 것에 대해서 조금 거부감이 들어 번역하시던 편집자분께 다소 어폐가 있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자 원본에도 그렇게 써있고 일반적으로도 그렇게 쓰여서 그렇게 쓰기로 했다고 설명해주시던 게 기억나는군요. 다소 뭉뚱그리는 듯한 천박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대체할 말이 없다고-_- '18금 게임'이라고 붙이는 건 긴데다 어감에도 안 좋고. '미연시'라는 표현은 그쪽 장르의 종사자들부터가 거부한다는군요. 하긴, 조금만 생각해봐도 '미연시'라고 붙이는 건 장르 자체를 너무 협소화시키는 것일테니까요.
이 작품도 코믹스 버전이 월간 전격대왕에 연재중인 [월희]처럼 월간 소년 에이스에 연재중이긴 한데.... 보이는 것처럼 영 황입니다-_-
아서왕이니까-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