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중간 졸면서도 결국 클리어.

제작사인 플라잉샤인사는 2003년, 에로게임 시나리오라이터계의 초신성(이자 풍문에 따르면 저 전설과도 같은 [카나] 시나리오라이터의 다른 이름이라는 소문)인 다나카 로미오와 함께 이 게임으로 폭풍처럼 나타났으나 이후 B급으로 전락. 무슨 사연이 있었는진 모르겠다만 좋아하는 사람은 미치는데 결국 실판매량은 1만장 내외였다는 충격적인 판매실적이 원인이 됐을지도. 뭐 그래도 홈페이지 가보니 라인업은 항상 빵빵. 뽕빨들이란 게 문제지만. 다나카 로미오는 업체 옮겨다니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음. 진골 히키코모리라는 소문.

아무튼 초기작이라 그런지 전반적인 CG(&에로CG)들이 구리다는 게 슬펐다. 그리고 말장난으로 채워진 수다질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게임초반의 특징이 문장의 상당수를 의성어로 바꾼 채로 그대로 이어진 야씬은 그 하염없는 길이에 정말 보는 게 지겨웠질 정도였기에 문제의 이벤트시 내 손가락은 엔터키를 그대로 누른채 떼지 않음으로써 쉼없이 의성어들이 튀어나오는 대화창을 폭주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길더라.

 



예전에 에로게임이 하나의 장르로 특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일단 지리적-문화적 감수성의 문제(적어도 난 서양에서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확인가능한 대규모 에로게임 커뮤니티가 형성되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이런 국지성은 아즈마 히로키의 오타쿠론이 '일본적'이란 것으로 귀결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18금이라는 스스로를 제한하는 조건 등등에 대한 대안으로 귀결된 것이 ebook의 형태로서의 에로게임이었는데, 한마디로 비주얼노블 양식의 변형. 물론 그에 앞서 이미 에로게임이 어드벤쳐 장르에의 편입상태라는 주장과 그에 맞서서 소위 소비자층의 모에코드에 대한 집중적인 표상으로서 일반적인 어드벤쳐물과 구분되야 한다는 얘기들 또한 있었다. 이 문제는 물이 반 채워진 컵을 바라보는 두 시선의 문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크로스채널]은 그런 물음들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루프물이라는 특징처럼 반복을 통해 결말로 나아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이 게임은 주제에의 목적성과 게임형식과의 일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하나의 지표가 됐다. [사야의 노래]가 소재적 차원에서 에로게임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을 잡아냈다고 한다면 [크로스채널]은 형식적인 면에서 대답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독자성의 획득이란 점에서 [크로스채널]의 성과는 에로게임적인 자장에서만 해석될 게 아니라 드라마투르기 응용의 연장에서도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 막연하게, 사람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교실의 이야기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 카프카적인 상상은 꽤 외로운 느낌이었지만 그이상 발전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크로스채널]은 나의 그런 막연했던 상상에 광기와 고독과 절망,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이라는 키워드들이 추가된 고도로 응용된 이상적인 완성형을 보여줬다.

사실 여기서 등장하는 갇힌 시간, 반복되는 세계란 소재는 그리 희귀한 게 아니다. 특히나 에로게임계에선 칸노 히로유키에 의해 확립된 기념비적인 선례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스채널]이 신선했던 것은 소재와 주제의 특징과 게임구조와의 합치가 보여준 흥미로운 가능성, 그리고 서사적 탁월함 덕일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 잔인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는 같이 산다는 것, 그리고 공명한다는 것에 대한 흔한 결말로 귀착되지 않는다. 그저 은톨이적인 외침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가치가 얼마나 쉬이 폄하될 수 있는 세상인가) 이 이야기가 사람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건 그 일방향적인 외침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진리 때문이다. 즉,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혼자이지만 또, 함께다. 그리고 살아간다.

 


 

 

 

 

 

 

 

http://www.geocities.jp/lledoece/nanaca-crash.html

본편의 우울함을 달래줄 수 있는 플래쉬 게임 나나카 크래쉬. 동인게임이라 저작권 문제가 희미해서인지 우리나라 모 휴대폰 게임업체에서 대놓고 베꼈었다.

중독성 장난 아님. 사실 이 게임부터 먼저 해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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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01-20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대체 언제 나올건지…

hallonin 2007-01-2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왕 늦은 김에 2까지 한 번에 초호화양장본으로 내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 아니지, 2는 학산에 판권이 있으려나. 어쩌면 출판사간 알력 문제일지도?
 



정진정명, 굿즈나 미디어믹스와 같은 부가사업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게임으로 승부를 거는 근성의 에로게임 명가인 엘리스소프트에서 대표적 프랜차이즈인 [란스] 시리즈의 최신작 [전국란스]를 내놓았습니다. 한때 에로게임계의 파이널판타지라고 불렸던 [피아 캐럿] 시리즈가 [그랜드 오픈]으로 완전하게 몰락하고 에로 없는 미소녀게임이라는 충격적인 실험성으로 무장했던 키드의 부도와 같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신작 발표(부가사업 없이 게임 팔아서 먹고 살기 때문에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제작자의 말!)로 건재함을 과시하며 에로게임 외길 정진으로 확보한 최소 1만여 골수팬들의 지지 속에서 발표된 귀축이란 단어의 트렌드화를 이끌었던 동시에 턴제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한 땅따먹기형전략에로시뮬레이션의 독보적인 게임으로 현존하는 [란스] 시리즈의 최신작의 무대는 전국시대. 주인공은 귀축왕의 이름을 걸고 우에스기 켄신, 다케다 신겐 등등 유명인사들을 따먹으면서 덤으로 일본도 정복하면 됩니다....

 

[란스]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무지막지하게 많은 등장(공략)인물의 종합선물세트 속에서 에로계 게임의 거의 모든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엘리스소프트가 선구자라고 불리울 수 있는 확실한 이유라면 트렌드를 개척해가는 철저한 에로혼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순수백합에로전기비주얼노블(이자 엘리스소프트 유일의 비주얼노블)인 [아트락=나카]나 공주님조교시뮬레이션인 [다크로우즈], 에로미소녀전사육성어드벤쳐였던 [초양전사 에스카레이어] 등등은 트렌드를 거스르면서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엘리스소프트의 모토를 확인할 수 있는 지극히 단편적인 부분들이죠. 뭐 이미 수 년 전에 BL게임 전문 브랜드인 엘리스 블루를 발족시킨 것만으로도 그 혼의 촉수가 어떻게 뻗어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상당수 작품들을 자유복제 게임리스트에 올려놓는 대범한 면모도 보이고 있죠. 이건 어떻게보면 현실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창립 이후 18년이란 세월 동안 수많은 에로게임회사들이 명멸해가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에로게임에서 게임성을 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메이커라는 평가까지 받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IQ(전략시뮬레이션), EQ(미소녀), 덤으로 제2외국어(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어 수험생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귀축왕 한 번 되서 나만의 하렘을 완성해보고자 하는 불혹의 열정에 불타는 시대의 표상 아버지들의 애가 욕구불만 중년 아저씨, 사랑의 실패 이후 현실의 여자는 그다지... 가 아니라 싫어요!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게 된 비뚤어진 청춘, 25살 이상이며 파이어볼 구사가능한 퓨어한 정신세계의 마법사, 궁극의 수련을 거듭한 끝에 뇌내왕내숭여동생과의 화기애애한 대화에 성공해버린...., 그리고 약간 취향이 독특한 여성분 등등 모두 다같이 올해 크리스마스는 [란스]와 함께 꿈과 모험의 나라로!

 

 

 

씹덕씹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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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6-12-16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임은 해본 적 없지만(동급생1 이후로는 그 분야의 게임을 해본 적이 없습죠), 그래도 제목에 '란스'라고 적혀있는 걸 보고 바로 뭔지 알아채버린 저는 역시… 왱알왱알.

hallonin 2006-12-1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덕오덕.
 



시간이 남아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 게임도 끝을 봤습니다. 친절하게 표시되는 시간소비량에 근거하자면 이 게임 하는데 25시간을 퍼부었더군요.

[할로우 아타락시아]는 명백히 [페이트]의 팬디스크인 만큼, 어떤 내용상의 전개나 그 비슷한 것은 없는, 말그대로 캐릭터 유희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스 키노코라는 작가의 딜레마가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양새라고나 할까요.

소위 나스체라고 이죽거려지는 표현들, 화면 가득 채워지는 죽어죽어죽어 등등의 명령구의 반복과 명사를 어필하는 식으로 끝나는 문단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이미 예전의 비주얼노블들, 다크물들에서도 활용됐던 부분이기에 그의 독자적인 문체라기보단 에로게임에서의 문체라는 부분에서 장르적 법칙으로 수용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질릴 정도의 장광설은 그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그러나 팬디스크의 속성, 즉 팬에게의 서비스란 차원에서 모든 캐릭터를 다룰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를 플롯으로 만들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승화시킨 것은 신선했습니다. 어디서 가져온 설정이 아니라면 말이죠. 저로선 그 장광설 덕에 마치 영겁의 세월을 지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해준 것 빼곤 그럭저럭 만족했습니다.

 

어째 1호 때도 그랬건만 이번에도 나오자마자 품절상태로 올라가버린 파우스트 2호입니다. 판매량은 좋았지만 낯선 감수성 때문에 호응도는 높지 못했던 1호에 대한 반동으로 생각보다 일찍 세일즈 메이커인 나스 키노코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2004년 7월에 시작된 나스 키노코의 DDD시리즈 첫번째 이야기인 [DDD J the E]가 실렸군요. 이에 대한 전반적인 비평은 옐로싸인님의 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외엔 듀나와 타키모토 타츠히코의 단편에 대한 평가가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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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벽이 벽이 아니다.... 내 눈에 비치는 세계란 어디까지 보장 가능한 것인가.

[팬텀 오브 인페르노]로 데뷔하여 열광적인 골수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제작사 니트로플러스에서 만든 2003년작. 48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앨범으로 치면 미니앨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짧은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트로플러스의 게임들은 뭐랄까, 마이너한 감수성의 결정체라고나 할까요. 다분히 밀리터리매니아를 광분시킨 게임이었던 [팬텀 오브 인페르노]나 크툴루 신화를 기반으로 한 [데몬베인]도 그렇고, 그들의 작품군에선 꾸준하게 스탠다드한 노선을 거부하는 그런 인상이 있습니다. 물론 [사야의 노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 후미노리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가게되지만, 현대의학의 쾌거로 인해 겨우겨우 살긴 삽니다. 다만 그 사고로 인해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 그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즉 그의 눈에 비치는 세계, 그리고 보통 인간들이란 피와 붉은 살덩어리, 체액으로 가득한 괴물들의 세상이 된 것이지요. 거리의 벽과 건물에서부터 친한 친구들까지 예외없이 그렇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그는 지옥 한가운데에서 사는 것과 다름 없게 됩니다. 눈만 뜨면 나날이 미쳐버릴 것 같은 세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는 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통 사람(보단 미소녀)처럼 비춰지는 사야를 만나게 됩니다.

무릇 섹스와 고어는 표현에 있어서의 양대 금기로써 전통적으로 치명적인 유혹의 대상이었습니다. 18금 에로 게임이라고 하는 장르는 그 두가지를 활용하는데 있어서 타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극히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일단 에로 게임이라는 위치가 담보하는 표현의 자유로움도 그렇거니와 그 소비층 자체가 마이너하면서도 결집력 있는 집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증명하듯 에로게임의 생산자들은 소비자로서의 경험 또한 풍부하게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더불어 그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이 장르가 '아는 사람만 알고 하는 사람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로게임 제작의 영세한 특성상 시스템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긴 힘듭니다. 게임의 어떤 장르보다도 다양성과 순수한 게임성이란 측면에서 부실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바로 에로 게임이지요. 따라서 이 장르에서 중시되는 요소 중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스토리, 설정의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에로게임이란 장르에서의 스토리의 힘이란 거의 원시적인 위력을 가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전형적인 벗기기 게임, 포르노그래피티의 단순차용 또한 넘쳐날 정도로 존재합니다만 소위 비주얼노블이라는 하위장르의 탄생과 더불어 스토리의 특화성 또한 심화된 것이 사실입니다(이 얘긴 차후에 따로 다뤄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야의 노래]는 바로 그 고어와 에로라는 두 영역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비주얼노블입니다. 플레이 시간이 아무리 길어야 세시간 남짓한 짧은 단편소설이랄 수 있는 이 게임은 실로 에로게임이라는 지형에서만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온통 끈적한 피와 살덩어리로 채워진 세계, 식인행위, 러브크래프트적인 괴물, 피폐해지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표현과 미소녀라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고, 또 그것이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을 가진 장르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러브스토리이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의 노래]의 이야기는 훌륭합니다. 마치 꿈을 꾸듯 흘러가되 그것이 편안한 악몽 속과 같은 느낌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보여지는 너절하고 추잡하며 폭력적인 광경들과 미소녀 캐릭터라는 거친 조합은 그 자체로서 잔인한 매혹의 은유와도 같습니다. 결국 그것들은 우리가 눈을 돌려왔던 것이기에, 이 이야기의 병적인 인상은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그림과 더불어 표현된 죄인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저로 하여금 정말 이 게임을 불쾌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표현의 폭력성보다는 그 조합 자체가 던져주는 까끌까끌한 자극입니다. 여기서 불쾌함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자극적인 시선 속에서 혐오와 매혹을 저 자신이 동시에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니 굳이 오글리쉬에 들어가서 뇌내에 시각인지형 마조히즘 호르몬을 생성해낼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쪽 계열의 감수성에 면역이 된 사람에게나 마땅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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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뭐, 세기말이긴 했지만 정말 세상에 망조가 들어서 모든 것이 다 몰락하고 있다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그 세기말, 종말의 분위기가 문화적으로 너무 남발이 되선지, 혹은 이미 사람들이 세상에 지칠대로 지쳐서 될대로 되라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세기말의 우울이란 코드는 이미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거의 정리가 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사실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에겐 호황기나 불황기나 그게 그거인 법. IMF 직후인 전국민적인 침체의 시기에 말세를 꿈꾸는 건 너무 풍요로운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요점은 그 시기에 암울 및 우울이란 코드를 쓴다는 건 거의 B급 정서에나 먹힐만 한 일이었다는 거죠. 그런 세상에 시대를 착각하고 안이한 판촉전략을 세운 탓인지, 정말 일반적인 정서와는 괴리되는 암울한 스타일의 게임이 한 편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슈팅게임의 명가 사이쿄에서 제작한 두번째이자 최후의 대전격투게임이었던 [타락천사]였습니다.

 



2000년 2월 지진의 충격을 받은 '도시'는 컴퓨터 관리 시스템의 고장과 동시에 균열로 인해 대륙으로 떨어져 나가 하나의 섬이 됨으로써 질서가 없는 혼돈의 세계가 됩니다. 범죄가 지배하는 곳이 된 부패한 도시는 사람들에게 '에덴'이라고 불리게 되고, 이 이야기는 십년 후, 2010년의 망가진 '에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보기만 해도 둔탁한 인상이 드는 스토리입니다만 게임을 더욱 암울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무라타 렌지의 캐릭터 디자인입니다. 독특한 음울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스타일을 기억해보자면 예상이 가는 바이긴 합니다만 이 게임에서 그는 자신의 그 어두운 면모를 극대화하기로 작정한 듯, 어딘가 망가진 캐릭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에 담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래곤 헤드]를 연상케 만드는 소년이라든지 [프랑켄슈타인]형 괴물의 마이너 체인지판인 모양새의 녹색 거한, 파리를 달고 다니는 극진공수도 무도가와 미치광이 총잡이 등등, 무라타 렌지의 어두운 색감을 그대로 화면에 박아넣은 탓에, 게임의 그래픽 또한 내내 칙칙하고 하수구 구녕에서 건져올린 듯 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차가운 색기가 감도는 로리 스타일의 예쁘장한 캐릭터는 끼어들 틈이 없는 방향인 거죠. 물론 인사치레처럼 미소년 미소녀 쌍둥이 커플이 한쌍 있긴 합니다만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다 트랜스 커플이란 점에서 역시나 이 게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스토리나 캐릭터 디자인에 충실하게도 게임 본편 또한 어딘지 괴상했습니다. 그래픽만 보자면 현재에 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퀄리티이고 줌 인 아웃 시스템을 활용하여 큼지막한 캐릭터들이 화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것은 분명히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일단 캐릭터를 활용하는 인상이 밋밋하다고나 할까요. 어두운 톤의 그래픽에 맞춰서 보여지는 기술이나 동작, 스타일, 심지어 초필살기까지 화려하기는 커녕 밍숭맹숭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니, 아예 게임의 전체적 디자인마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이 그런 밋밋한 분위기에 호응하듯 연속기가 아니라 묵직한 한 방을 노려야 하는 단타형 대전 격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대전 격투 게임의 흐름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던 것으로 [스트리트 파이터3] 류와 일맥상통하는 바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마이너한 대전격투게임의 전반적 특징은 연속기 배제, 단타 지향으로 결정지어지는군요. 반대로 손이 느린 저로선 무척이나 좋아하는 요소들입니다만.

 



아무튼 시대를 따르면서도 시대를 거스르려 했던 이 애매한 게임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조차 제대로 확인 받지 못하고 사이쿄로서는 대전격투게임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는 경영방침을 정립하도록 한 후 어떤 콘솔로도 이식조차 되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로 끝날 뻔 했지만. 마메쪽 개발자들이 롬을 추출하여 웹에 퍼뜨리는 덕에, 중증 마이너 대전 격투 게임 중에선 꽤 인지도가 있는 쪽에 속합니다. 나중에 SNK가 KOF99의 신캐릭터들, K'와 맥시마의 캐릭터 디자인 및 추가된 신기술 디자인 다수를 여기서 베껴온 것으로도 이름을 탔었죠. 전 처음 보자마자 삘링이 왔었는데 [타락천사] 자체가 워낙 마이너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이슈가 되더군요.

 



저로선 삘링이 단박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다이야기지만 예전엔 동네 양아치들의 건전한 사교의 장이었던 고전주의 지향의 오락실에 바로 이 게임이, 웬일인지 2개월 가까이 설치되 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인기도 좋아서 플레이하던 사람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판시장에서도 꽤 레어품으로 취급 받고 있는 것이 [타락천사]입니다만, 아무튼지간에 저도 그 시기에 원없이 보고 가끔씩 즐길 수 있었습니다.

 



마메 게임들 중에서도 꽤 고사양을 요구하던 놈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즐길 기회가 없었지만, 요즘은 잘 돌아가더군요. 역시 돈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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