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가슴 - MBC 드라마 12부작 박스 세트, 2006년 2월 비트윈 드라마 할인
오경훈. 고동선 외 감독, 김동완. 배두나. 신성우. 김창완. 배종옥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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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각 2화씩 각각 다른 주제로 다른 PD와 작가, 그리고 메인이 되는 주인공을 달리하여 만들어진 [떨리는 가슴]의 기획은 [한강수타령]의 종영과 [사랑찬가]의 후속작 사이에서 벌어진 공백을 메꾸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땜빵 드라마다. 따라서 드라마몹 강명석의 MBC드라마에 대한 훌륭한 비판(http://dramamob.com/Review/view.asp?PKId=334)
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가슴]이 실험성이라는 측면에서 MBC 드라마의 큰 흐름 중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오버다. 분명 갑작스러운 드라마 기획이 만들어낸 제작 상황은 주말드라마로선 전례없는 실험성을 보장하게 만들었지만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떨리는 가슴]은 일종의 시간때우기에 가까웠다. 

[떨리는 가슴]의 전체적인 기조를 관통하는 것은 사랑이란 주제다. 남녀간의 사랑, 아이들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란 주제에 대한 각기 다른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성은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사랑'편에서 우리는 애정의 향방에 대한 익숙하지만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보게된다. 드라마의 첫이야기의 주인공인 배두나는 김동완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 둘의 사랑엔 계속 과거가 끼어든다. 지극히 유교적 관념 하에서 그에 대한 방어기제적 두려움을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이 보여지는 이 이야기는 그제껏 독특한 소녀적 캐릭터였던 배두나가 거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여성으로 보여지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아역배우 출신이자 신화의 멤버로 더 알려진 김동완을 재발견하게 하는 에피소드다.

 

2. 기쁨

두번째 이야기인 '기쁨'에서 우리는 주말드라마에서 무려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보는 경험을 겪었다. 하리수라는 배우가 있기에 가능했던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인터넷의 지하담론, 이태원의 트랜스바, 낙원동의 음침한 소문들에서 존재하던 존재를 드라마로 접하게 된다. 비록 하리수의 연기 자체는 썩 훌륭하다곤 하기 힘들었지만 이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주말드라마를 넘어선, MBC드라마의 파격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만 하다. 여기서 우리의 통속을 깨는 것은 일반의 편견이 아니라 그 편견을 우습게 여겨버리는 사고 당사자들의 의식이다. '사랑'편에서부터 이어지는 주변인들의 배타적 방어기제는 여기서도 여전히 작용하며, 그렇기에 서사적으로 2화는 1화의 구조와 일치한다. 우리 생각보단 훨씬 성숙한 이들인 타인-당사자에 대한 우화.

 

3. 슬픔

아이들의 사랑을 그리는 이 에피소드에서 최고의 성과는 보미역을 맡은 고아성의 발견이다. 온전히 메인 캐릭터가 되어 두시간 가까이 극을 이끄는 그녀의 연기는 놀라울 지경이며 이것이 봉준호로 하여금 [괴물]에 그녀를 캐스팅하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이들의 세계가 아닌 아이들 그자신의 시선이 펼쳐진 연애활극.

 

4. 바람

제목에서부터 아주 노골적인 이 이야기는 중년 아저씨 김창완과 록밴드 보컬 최강희의 바람을 그린다. 최강희는 젊음이며 김창완이 끝내 닿지 못했던 꿈의 지속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화 된 연기 영역의 접합을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김창완의 뮤지션적 자장과 최강희가 가진 매니악한 인기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 얼마나 궁합이 잘 맞는지를 보여준다. 꿈과 지나간 젊음, 그리고 현재의 괴리에 대한 이야기. 산울림의 '너의 의미'가 이렇게 훌륭하게 쓰인 경우를 찾아보기는 앞으로도 힘들 것이다.

 

5. 외출

'외출'은 바로 전작인 4편과 일종의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4편에서 남편의 바람을 목도해야 했던 배종옥이 메인이 된 이 이야기의 시작은 전작에 대한 일종의 복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통속적 불륜극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이야기는 배종옥과 배두나 두 자매의 환상극으로 뒤바뀐다. 이것은 어쩌면 남녀의 '바람'에 대한 차이를 보여준 것일까.

 

6. 행복

배종옥과 김수미가 메인이 되는 이 이야기는 노년, 그리고 모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비로소 '자신'을 찾아나선 어머니들에 대한 풍경화이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다시금 상처받는 여자들에 대한 짙은 호흡의 이야기다. 배종옥과 김수미는 말그대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며 드라마의 마지막을 훌륭하게 장식한다.

[떨리는 가슴]은 전 12화에 이르는 동안 매니아적 측면에서의 화제를 제외한 어떤 이슈도, 그리고 이후로는 그와 비근한 흐름도 만들어내지 못한, 독불장군으로 그자리에 서 있는 흔치 않은 케이스다. 그러나 상업성과 시청률에 목이 메여 트렌디 드라마의 양산에만 골몰해 있는 근간의 드라마 흐름에 비추어 '얼결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게 못박아버린 [떨리는 가슴]의 존재는 확실하게 빛난다. 이와 함께한 시간은 분명 흔치 않은 경험이었으며 묻혀질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온전한 경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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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0-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봉준호의 아내 그리고 조영남의 아내인 윤여정과 닮았다는 배두나와 그 배두나의 조카로 나와서 정말로 '친족'의 느낌을 자아냈던 보미가 <괴물>에 함께 출연하는군요.
얼굴에 대한 취향이라는 건 흥미로워요.

hallonin 2005-10-2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미 귀엽죠... 으흐으흐으흐흐흐흐....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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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인도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알게 모르게, 인도는 우리와 무척이나 친숙한 나라다. 우선 경제계 쪽에서 인도는 황금이 나오는 무주공산이다. 현재 인도내 가전제품 점유율 1위는 LG이고 자동차 점유율 2위는 현대다. 포스코는 얼마 전에 사상 최대 규모의 제철소 건립 계약을 체결했다. 경제신문들은 미국에서 흘러나온 '21세기는 친디아의 세기'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인도는 어느새 중국과 동급의 가능성을 인정 받고 있다. 문화계 쪽에서 보면, 인도는 일종의 성지순례지다. 그곳은 동경의 대상이며 성찰의 요람이며 그럭저럭 수익성 좋은 기행기 생산의 좋은 소스이기도 하다. 깨달음을 얻으러 인도에 간 사람들은 깨달음을 통해 돈을 벌 방법을 안고 돌아오곤 했으니,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예부터 인도는 주는 것이 많은 나라였다.

하지만 정작 인도에 대해, 인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되는가. 그저 달콤한 잠언이나 중얼거리고 있는 명상서적이나 금광을 캐듯 소비자의 습성을 쑤시고 다니는 산업전선의 안테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인도는 괴상한 나라다. 인도는 간디를 배출한지 50년도 안되는 시간에 비밀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나라다. 카스트 제도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으며 IT산업의 최첨단을 달리지만 국민의 30%는 문맹이다. 엄청난 수의 빈곤층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국민의 생활이 자리한 영토를 침식해 들어오는 해외기업들과의 계약서를 착착 잘도 써준다. 이런 극단적인 풍경들을 칼리의 두 얼굴에 대한 오래된 힌두 신화와 같은 노선에서 이해해줘야 하는가? 적어도 아룬다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은 것들의 신]을 쓰고 돈방석에 앉게 된 아룬다티가 1년여의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바라본 인도사회는 커다란 부조리극의 무대였다. 기득권층의 이윤독점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부패한 시스템, 아무런 삶의 보장도 받지 못하는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 소수자들. 그들은 세심하게 고려되야 할 대상은 커녕 서류상에서 숫자로조차도 제대로 기록이 안되는 이들이다. 부패한 시스템이 소수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불합리한 사회를 구축하고, 이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을 그 시스템의 먹잇감으로 삼아 시스템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아룬바티의 우려는 정확하다. 없는 자들은 말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시스템에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결국 약자들의 골수로 이뤄지는 구조물이다. 악순환, 악순환의 연속. 그것은 배려 없는 세상의 추한 몰골이다. 과연 발전과 행복이란 이름을 가진 소수자들만의 잔치극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한은 누가 갖게 되는가?

그래서 그녀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댐건설에 이어서 정부가 얘기하는 행복의 평준화와 성스러운 발전이 가장 비대하게 모습을 드러낸 세계화라는 허울을 다음으로 주시하게 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 에세이집에 실린 에세이들 중 6편이 미국과 관련된 이야기다. 댐건설 반대진영의 최전선에 선 덕에 자국 내에서 반정부 사회운동가로 알려진 그녀는 이어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반미주의'라고 하는, 적대자들이 상대에게 씌우기 즐겨하는 표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생각하는 미국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시의 미국인가 촘스키의 미국인가 버팔로의 미국인가 맥도날드의 미국인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는 미국이란 상징 앞에서 그녀는 여유있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녀는 미국에 대한 가장 훌륭한 비판자들이 바로 미국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느 특정한 종류의 신성성을 미친듯이 따져대는 몇몇 양반들과는 상관 없이 그녀는 미국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과거와 현재에 걸쳐, 소설과 에세이에 걸쳐 끊임없이 묻고 있는 것은 그녀가 발을 딛고 사는 인도라는 땅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대립의 구조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반성과 회의에서부터 시작한 이 질문은 분명하게 대답을 내리기가 용이치 않다. 거기엔 인도(정부)와 미국(정부)과 다국적 기업들과 중산층과 (허울 좋은)공공선과 같은 수적인 차원의 압력들과 불협화음이 예상되는 그녀의 가정사, 그리고 그녀의 사회적 위치가 보여주는 이율배반적 모습 때문에 그녀 자신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분명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확신과 증거들이 있으며 동시에 끈질기고, 또한 부드러움과 여유까지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한 것엔 확신에 찬 당연함이 서려있다. 그리고 그녀는 더 많은 이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만들어나가길 바라고 있다. 바로 그 자체가 어떻게, 혹은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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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SEX 1
카미조 아츠시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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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다 지쳐서 결국 이메일 해적판으로 구입한 이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카미조 아츠시의 [섹스]가 드디어 북박스에서 정식 출간이 시작됐다. 앞으로 한 달에 한권씩 전 7권이 나올 예정인 이 작품의 명성은 이미 유명한 터. 스니커즈 수집에 미쳐서 만화 연재에 신경을 안 쓴다는 평판이 돌던 작가였던지라 죽을 때까지 못 끝낸다는 소리와 함께 2권과 3권 사이의 공백기간이 무려 5년이었던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건만 어느새 7권까지 나와서 완결까지 지어버렸다.

[토이]란 만화가 가진 센스는 가히 십년을 앞선 것이었다. 무명이었던 카미조 아츠시를 벼락부자로 만들어준 동시에 완벽에 가까운 게으름뱅이로 만들어버린 그 작품 이후로 보여준 카미조 아츠시의 작품군이 다소 부실하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섹스]에 대한 오매불망 매니아층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 카미조 아츠시는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다. 모노톤의 적절한 조절과 센스있는 컷과 개그, CF적 서사에 익숙한 그의 만화들은 감각적인 측면에서 당대의 최일선을 달리고 있었고 이후 타지마 쇼우와 아사다 히로유키의 작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카미조 아츠시 스타일의 결정판이라고 불릴 법한 [섹스]는 한컷한컷이 대단히 신경써서 만들어진, 일종의 MTV 콘티라고 봐도 좋다. 더군다나 미군이 주둔한 오키나와에 서식하는 앵그리 영맨들의 이야기라니, 저절로 젊은 시절 무라카미 류와의 연대가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다. 카미조 아츠시가 지향하는 지점은, 바로 그 지점에 맞춰져 있다. 그는 언제나 화난 청년들을 즐겨 다뤄왔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려고 한다.

사실 [섹스]는 이제 와서 보면 상당히 고전적인 인상을 준다. 그것은 카미조 아츠시와 같은 감각이 흔해진 세상이 되어서야 카미조 아츠시의 최고작을 경험해야 하는 리스크다. 카미조 아츠시의 만화들은 이제 MTV, [다중인격탐정 사이코], 수많은 타지마 쇼우의 아류작가들, 뻔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그렇고 그런 아이들, 3D 게임 동영상과 같은 이미지들과 동의어다. 그래서 쿠메타 코우지가 신랄하게 비꼬았던, 그런 영역의 질릴 법한 사카린맛을 지워버리기란 힘들다.

하지만 그래서 [섹스]는 동시에 아련함을 느끼게 만든다. 이것은 처음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즈]를 읽었을 때,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를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재생하는 것과도 같은 얘기다. 그 수많은 아류작들에도 불구하고 카미조 아츠시의 [섹스]에는 아직 낭비되지 않았던 시절의 순수함과 위엄이 느껴진다. 이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동어반복과 자신을 앞질러 가는 시대와의 속도전 속에서 힘들어하던 카미조 아츠시가 비록 이리도 뒤늦게, 우회해서 도착한 만화에서 팔팔 날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역시 괜찮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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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0-1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를 보면서 장바구에 넣을까말까 고민했던 작품인데...
넣겠습니다..^^

sudan 2005-10-1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 이러다간 책장을 하나 더 사야겠는데.

hallonin 2005-10-14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만 보면 좀 고민이 될 듯.... 그리고 부담드려서 죄송-_- 헐헐

chilee1999 2005-10-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드뎌 정식으로 출간, 게다가 완결이라니.
북박스 최고 ㅠ.ㅠb

hallonin 2005-10-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박스 뒤에는 중앙일보가 있죠.... 시공사 때와 같은 패턴입니다만, 그래서 좀 불안하기도-_-

로드무비 2005-10-3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21에서 출간 소식을 보고 달려왔더니 리뷰가 있네요.^^

hallonin 2005-10-3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간만이신 듯. 그러나 여전히 바그다드 카페군요.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요시나가 후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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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가 후미라면 반사적으로 집어들게 되는 훈련된 손이 일을 그르쳤다.... 가뜩이나 긴축경제를 몸으로 겪고 있는 마당에, 음식소개만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만화책을 집어들다니.... 제목하야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오호라, 저 제목 좀 봐라. 당당하게 성욕을 능가하는 식욕의 위대함이라는 진리을 설파하는 동시에 아주 대놓고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찬란한 예찬을 풀어놓고 있는 제목을.

동경을 중심으로 한 요시나가 후미의 음식점 기행기랄 수도 있는 이 작품은 [서양골동양과자점]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할 때랑 잘 때 빼고는 거의 하루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작중의 비장한 대사에서처럼 작가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수다를 떨려고 작정을 하고 나선 결과물이다. 그 취지에 지나치게 걸맞게 프랑스, 중국, 일본, 한국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양식의 요리들을 먹어치우면서 인물들이 뱉어내는 수다는 위속 산성농도를 기하급수적으로 올려놓는데 탁월한 기여를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처럼 밤인 경우엔 그 고통의 농도가 더욱 진해질 듯 싶다.

읽기 전, 음식과 음식점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룬 만큼 작중의 이야기가 부실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그 이야기 부분도 의외로 괜찮은 맛이 있다. 의례적인 당연함이 섞인 처음 들어가기 전,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고 실제인물과는 상관이 없다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명백하게 주인공이 'Y나가 F미'라고 묘사되는 차에야, 더군다나 그 사람의 직업이 '남자들간의 애널섹스 등등을 그려 생계를 잇고 있는 31세'라고 하는 데에야, 어찌 오버랩을 안 시킬 수가 있겠는가. 물론 극적 흐름을 위해서 이야기에 공상, 망상, 허상, 호접몽 등등이 첨가가 안됐을 리가 없겠지만 요시나가 후미라는 만화가의 일상과 사고관의 단면을 단편적으로나마 잡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작품의 장점은 보장될 듯 싶다. 또한 원래의 의도대로 동경 부근 음식점들에 대한 안내서적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하여 각 음식점들의 주소에서부터 영업시간, 교통편, 지도, 주차장 유무까지 기재되어 있다.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작품에서 요시나가 후미의 창작품들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쿨한 게이라든지,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라든지, 손가락 긴 멀대남이라든지 하는 것들과 그들의 '쌔끈한' 농탕질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기선 그녀 특유의 입삐죽 옆모습조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노처녀 작가의 칼로리 넘치는 음식점 기행기를 따라다니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깨에 힘 뺀 작가와 그녀의 주변인들이 보여주는 보통 사람다운 모습들과 잘 만든 음식 하나하나에 환호하며 시시껄렁한 연애담과 인간관계들을 풀어내는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그 심심하고 정감있는 풍경들이 독자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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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와 늑대 눈높이 어린이 문고 23
진 크레이그헤드 조지 지음, 유기훈 그림, 작은 우주 옮김 / 대교출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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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곤경에 처한 에스키모인인 줄리, 아니 미약스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친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던 길에 조난을 당해서 북극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녀는 당장 잘 곳은 커녕 먹을 것조차 제대로 마련되 있지 않은 상태고 북극의 날씨는 더없이 춥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녀는 살아남아야 한다.

시작부터 꽤 살벌한 동화 [줄리와 늑대]는 그때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에 처한 미약스가 자연과, 특히 늑대와의 교감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생각외로 긴장감이 도는 전개 속에서 그녀는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체득한 에스키모 사람들의 지혜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 오래된 지혜들을 통해 늑대 무리와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함으로써 결국 그들과 같은 일원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 이후부터 우리는 소녀와 늑대들 간에 싹튼 우정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보여주는 양상은 자연을 존중하는 법, 자연과 하나가 되는 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죽음과 가까이 간 장소, 너무도 괴로웠던 상황은 늑대들과의 우정과 자연과의 동화를 통해 서서히 바뀌어 나가고 이약스는 그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함과 충만한 정서를 느끼게된다. 그에 반해서 미약스가 북극 한복판에 떨어지게 된 이유, 그리고 미약스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게 되는 것은 현대문명에 의해서다.

실로 작가가 지향하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그 반대쪽에 서는 문명과의 대립각은 이야기 전체를 꿰뚫고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지혜들에 비추어 볼 때 문명은 진보와 발달이라는 고상한 옷을 입은 야만이며 미약스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것들의 본질이다. 서구문명의 유입과 함께 미약스가 살던 땅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라는 달콤한 가면을 쓴 문명은 늑대들을 사냥하는 비행기로 드러나서 미약스를 위협한다. 인간은 자연과 멀어지고 자연은 인간을 홀대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이 이야기의 제목이 '미약스와 늑대'가 아니라 [줄리와 늑대]일까. 이 불길한 제목에서부터 이 이야기는 좌절의 이야기임이 암시된다. 그러나 그 좌절이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 되버린 것이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미약스'의 발걸음은 그리도 슬퍼 보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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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0-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좋은서평 이벤트에서 우수리뷰로 뽑히신걸~

hallonin 2005-10-26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좋아라